자살하는 사람들이 90년대말이래 계속해 늘고 있다.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의 2배에 달할 정도다. 특히 경기침체가 심해지면서 개인파산자가 급증한 지난해 들어서는 빈곤때문에 자살하는 이른바 '빈곤 자살' 숫자가 경기가 괜찮던 지난 2000년보다 2배이상 늘어날 정도로,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는 극한적 빈곤층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예산은 국방비 우선 증가 원칙에 따라 정작 벼랑끝에 몰린 빈곤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 예산'이 외면당하고 있어, 재고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해 자살자, IMF사태때 사상최고치 경신**
행정자치부가 8월31일 한나라당 이원형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외환금융위기(IMF사태) 발발직전인 지난 97년 9천1백9명이던 자살자 숫자는 IMF사태로 1백여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할 정도로 많은이들이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던 98년에는 1만2천4백58명으로 급증하며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그후 자살자 숫자는 99년과 2000년에 각각 1만1천7백13명과 1만1천7백94명으로 잠시 줄어들며 증가세가 멈추는가 싶더니, 2001년에는 1만2천2백77명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인 2002년에는 IMF사태직후 98년때 기록한 사상최고치를 앞지른 1만3천55명으로 사상최고치 기록을 경신했다.
올 들어서도 자살 증가세는 계속돼, 7월말 현재 자살자 숫자는 6천5명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자살 증가세는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가파른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IMF사태 발발전인 지난 97년에는 교통사고사망자가 1만1천6백3명으로 그해 자살자 9천1백9명보다 많았다. 하지만 빈곤 등의 이유로 자살자가 급증한 98년부터는 자살자 숫자가 교통사고사망자를 크게 앞지르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98년의 경우 자살자는 1만2천4백58명으로 그해 교통사고사망자 9천57명을 최초로 앞지른 데 이어, 99년 역시 자살자가 1만1천7백13명인 데 반해 교통사고사망자는 9천3백53명에 그쳤고, 2000년에도 자살자(1만1천7백94명)가 교통사고사망자(1만2백36명)을 앞질렀다.
또한 2001년과 2002년에 교통사고사망자는 8천97명과 7천90명으로 격감추세를 보인 반면, 자살자는 1만2천2백77명과 1만3천55명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여 대조를 이뤘다.
매일같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거의 2배나 많은 이들이 자살하고 있다는 얘기다.
***'빈곤자살' 급증이 근원**
지난해 자살자가 사상최고치 숫자를 경신한 데에는 빈곤때문에 자살하는 이른바 '빈곤 자살'이 급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해 전체 자살에서 빈곤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6.7%로, 이는 경기가 좋았던 지난 2000년의 3%보다 배이상 늘어난 수치이기 때문이다.
올 들어서도 7월말 현재 자살자 6천5명 가운데 빈곤 자살자가 4백8명으로 전년도와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월평균 58명, 하루에 2명꼴로 빈곤 자살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해부터 빈곤 자살자 숫자가 급증한 데에는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카드채무 급증 및 이에 따른 개인신용불량자 급증에 따른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개인신용불량자는 7월말 현재 3백35만명으로 급증해, 경제활동인구 7명중 1명이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고 웬만한 직장에 취업조차 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 몰려있다.
***'생명의 그물망'은 뒷전**
빈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며,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선 사회안전망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특히 IMF사태후 '적자생존 경쟁'을 원칙으로 삼고있는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를 도입, 채택하고 있는 만큼 사회안전망 구축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게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상을 향한 가파른 '벼랑 오르기'에 비유되는 앵글로색슨형 경쟁 상황하에서 경쟁에서 밀려 벼랑에서 떨어지는 이들을 중간에서 받쳐줄 '생명의 그물망', 이른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자, 사회적 타살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사태후 말만 무성했지, 실제 정부대책은 언제나 '립서비스'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특히 빈곤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기획예산처에 의해 마련된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비 증액 논리에 밀려 사회안전망 구축비용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전면적 재고가 요구되고 있다.
기획예산처는 지난주말 노무현대통령에게 올해보다 2.7% 늘어난 내년도 예산안을 보고했다. 올해 경기가 3% 성장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데 따른 초긴축예산 편성이다.
문제는 이 정도 소폭 늘어나는 예산의 60%가 국방비 증액으로 편성됨으로써 사회안전망 구축에는 돌아갈 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다가 예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직성 경비인 공무원 임금은 내년도 4.5% 인상으로 잡고 있어, 이러다가 빈곤층에 대한 사회복지성 예산은 도리어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낳고 있다.
참여연대같은 시민단체는 이에 1일 "차상위 빈곤계층, 빈곤아동 등에 대한 지원이 절실한 현실 상황에서 국방비 증액으로 인해 사회보장 예산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정부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국방비 증액분을 줄여 사회복지예산 편성을 늘리라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야, 실천으로 보여라**
정부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예산을 "거둬들일 만큼만 쓰겠다"는 '균형예산 원칙'에 따라 초긴축 편성한 대목은 대단히 높이 평가할만 하다. 하지만 균형예산 논리에 과도하게 집착, '생명의 그물망'인 사회안전망 구축을 뒷전으로 미룬다면 용납할 수 없는 무사안일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대통령과 최병렬 한나라당대표 등 여야 정치지도자들은 오는 4일 5자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여야지도자들은 회동의 최우선 목적을 '민생'과 '경제살리기'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기국회가 16대 마지막 국회로 내년총선을 의식한 여야간 정쟁이 심하고 의원들의 '지역예산 확보'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안전망 예산은 뒷전으로 밀릴 공산이 커 보이며, 이미 곳곳에서 그런 징후가 목격되고 있다.
물론 빈곤 자살을 막는 가장 근원적 해법은 경기 회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빈곤 자살은 불가피하다"는 역의 논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앵글로색슨형 시장경제를 경제운영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러하다. 사회안전망은 경기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시급히 구축해야 할 체제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오는 5일 머리를 맞댈 여야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면 일부 적자예산을 감수하면서라도 빈곤 자살을 막기 위한 획기적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합의를 도출하기를 기대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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