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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 기차역에서 울려퍼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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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 기차역에서 울려퍼진 아리랑

[시베리아 시간여행] 5.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국제열차 아리랑 호를 꿈꾸며

2019년 4월 25일 저녁 6시 30분, 블라디보스토크행 352 열차는 기관차가 힘을 썼는지 한 번 움찔하고는 하바롭스크 역 선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하바롭스크 거리들은 100여 년 전 조선 독립을 염원했던 사람들이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걸었던 곳이었다. 거리명에 까지 한인 이름을 딴 김유천로가 있을 정도이고 지금도 중앙시장 건물 입구를 열자마자 나타나는 것은 고려인이 파는 김치 판매대다. 연해주 조선 문학 대가 조명희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도시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이자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는 하바롭스크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모아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바롭스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혁명가는 김 알렉산드라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던 한인사회당은 김 알렉산드라와 이동휘의 합작품이었다. 김 알렉산드라 빼뜨로브나 스탄케비치, 긴 이름처럼 역사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그였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하게 운명의 길을 갔다. 그의 몸이 던져졌다던 우쵸스 언덕 밑 아무르강처럼 김 알렉산드라의 이름은 계속 이곳을 흐를 것이다.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 거리 22번지에는 김 알렉산드라가 죽기 전인 1918년까지 하바롭스크 외무장관으로 집무했던 건물이 남아있다. 이 건물에는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부조로 그려진 석판과 그의 영웅적 활동을 담은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리 모델링 과정에서 현재의 안내판으로 바뀌었다. 이 안내판에 한글 표기가 같이 되어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내가 쓴 책<시베리아 시간여행>의 하바롭스크 편에는 "원래 명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А.П.КИМ-СТАНКЕВИЧ)라고 이름이 제대로 쓰여 있었으나, 새 명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쿰 스만게피치(А.П.Кum-СmaHkeBuч)라고 잘못 박혀 있다"고 썼다. 이것은 내가 러시아어 필기체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잘못된 서술이었다. 안내 명판에 필기체를 쓰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키릴 문자 필기체는 영어와 달리 인쇄체와 간극이 너무 멀어 и → u로, т → m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현재 러시아 당국이 보호 건물로 지정한 김 알렉산드라의 집무실 벽 명판의 표기는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증쇄를 하게 되면 이 오류를 마땅히 수정할 생각이지만 오랜 불황의 출판시장이다.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것 보다 이렇게라도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외국인, 여성, 혁명가.....소수자 중 소수자였던 김 알렉산드라. 하바롭스크를 떠나며 내 삶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그와의 추억을 시베리아의 하얀 눈처럼 시리게 가슴에 묻었다.

막 객실에 올라탄 승객들은 부산하게 짐을 부리다가 열차가 움직이자 드디어 출발이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본다. 나를 제외한 한국인 일행들은 모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처음 타보는 이들이다.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일 것이었다. 차장은 비닐 포장된 물건을 한 아름 안고서는 침대칸 방마다 나누어주었다. 요와 이불을 싸는 시트와 베갯잇, 수건이 비닐 안에 들어있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방마다 식사 준비로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차창 양쪽으로 2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 작은 탁자가 있다. 이것은 식사 시간이 되면 훌륭한 식탁으로 변신을 한다.

열차 출발 전 하바롭스크 역 옆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이 한 상 차려진다. 방울토마토와 청포도, 바나나, 샌드위치, 빵, 치즈, 샐러드, 컵라면, 비빔밥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 보드카 한 잔. 물론 횡단열차 안에서 음주는 금지되어 있기에 적절하게 위장된 한 잔이다. 큰 음모를 꾸미는 아이들처럼 신난 여행자들은 차창 밖으로 자작나무 숲이 흐르는 움직이는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독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본 자작나무 속의 석양 ⓒ박흥수

오래 이어진 식사시간이 중단된 것은 누군가의 환호성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벌판 위로 떨어지는 태양을 보고는 입이 절로 벌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방에서 나와 모두 복도 창가에 달라붙었다. 황홀함, 그리움, 넉넉함, 아련함, 갖가지 표정의 얼굴들이 자작나무 숲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열차와 숨바꼭질을 벌이는 붉은 태양을 쫓았다.

시베리아 벌판은 지는 태양의 마지막 각혈로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둠에 잠겼다. 열차는 검은 대지를 뚫고 동남쪽의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1917년,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이 민중들에 의해 점거되고 혁명 깃발이 올랐다. 혁명에 놀란 주변 왕국들은 반혁명에 나선 복고파 귀족 군대인 백위군 지원에 나섰다. 그중 중요한 거점 도시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군은 백위군과 연합해 혁명군인 소비에트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긴 이유는 자명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일대에는 조선인 수 십 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조선 국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항일 세력이었다. 또 중국과도 맞닿아 있어 만주에 근거지를 둔 조선 독립운동 세력을 제압하고, 중국 침략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싼 공방전은 치열했다.

백위군을 지원하는 연합국 간섭기인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군과 조선인들은 백위군과 일본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일곱 번 점령하고 여섯 번 빼앗겼다. 이 일곱 번의 전투에서 조선인들은 가장 앞장 서 싸웠다. 전투에 참전한 조선인 중 하나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증언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다. 조선인 혁명가 박진((朴鎭)이다, 박진 부부와 두 동생은 일곱 번의 블라디보스토크 공방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맞섰다.

박진의 부모는 전쟁 중에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박진은 4월 참변으로 알려진 1920년 일본군의 대공세에 맞서 싸우다가 폭탄을 맞아 앞니가 다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조선인들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1921년 조선소비에트위원회 산하에 시베리아 소비에트의 한 축으로 조선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조선인들이 피로 엮은 땅이었다. 1922년 내전 승리가 선언될 때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인 혁명가들 자부심이 넘쳐나는 혁명 성지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 비명은 한밤중에 일어났다. 침대에 둘러앉아 보드카에 취해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 소리가 난 방으로 갔다. 비명을 지른 주인공은 창가에 붙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방안 조명을 껐는데 갑자기 나타난 밤하늘 은하수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낸 것이다. 다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열차를 따라 달리는 별들의 행진을 보았다. 신음 소리 같은 탄성이 나왔다. 시베리아 한인 혁명가들이 독립을 꿈꾸며 봤던 별들이 반짝였다. 우주의 시간개념으로 보면 그들과 우리가 함께 보는 별이었다. 규칙적인 강철 기계음을 내며 달리는 횡단 열차는 어느새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새벽 1시 14분, 열차는 루지노 역에 닿았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구간 중 가장 오랫동안 정차하는 역으로 352열차는 40분을 정차한다. 이 시간 동안 기관차를 교체하고 객차 제동기능을 시험한다. 심야 시간임에도 많은 승객들이 승강장으로 내려와 흡연을 하거나 바람을 쐰다. 역사 한쪽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포효했을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루지노 역 승강장은 이 구간을 오갔던 사람들의 아련한 사랑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긴 정차시간으로 여유를 가지고 승강장을 걷다가 한 무리 러시아 젊은이들을 만났다. 한국인 일행들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그 중 하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이었다. 루지노 역 승강장에서 왈칵 울음이 쏟아질 뻔했다. 이역만리 시베리아에서 어깨동무를 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아리랑은 기쁨과 감동이었다. 한인들은 아리랑으로 기억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 루지노 역에 전시된 증기기관차 ⓒ박흥수

▲ 루지노역에서 아리랑을 함께부른 러시아 젊은이들 ⓒ프레시안(서어리)


노래는 메들리로 이어져 곧바로 러시아 민요 카츄샤로 옮아갔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 노래라서 합창에 끼어들 수 있었다. 러시아 젊은이들은 자기들 민요를 덥석 받아 부르는 한인 아저씨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리랑에 대한 답가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352열차는 마지막 선물로 아무르만 아침 바다를 보여주었다. 수면위로 뜬 해는 구름 속에 숨었다. 얇은 빗방울들이 간헐적으로 바닷길을 달리는 열차를 적셔주었다. 오전 9시 10분, 15시간 여정 끝에 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섰다. 원래 계획은 심오한 감상으로 동방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종착역에 발을 디디는 것이었으나, 흐트러진 짐들을 배낭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혹시라도 놓고 내리는 게 없는지 침대 아래위를 샅샅이 뒤지고는 사람들에 밀려 헐레벌떡 뛰어 내렸다.

야간열차 승객다운 초췌한 얼굴로 숙소를 찾아 짐을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걸었다. 한인들 역사가 서린 장소들을 돌기 위해 길을 나서 초창기 이주 한인들이 살았던 옛 개척리 거리를 찾았다. 100년 전 사진에 찍혔던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최재형, 장지연, 이동휘, 안중근, 우덕순, 이상설, 안창호, 오하묵, 김알렉산드라, 김아파나시아르센치비에치, 그 외에도 수많은 유무명 한인들. 이들이 기쁠 때나 즐거울 때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아마도 아리랑이 아니었을까?

국민당과의 내전과 항일 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 나선 중국 혁명가들이 대장정 끝에 도착한 곳은 산시성 옌안이었다. 1937년 님웨일즈는 옌안에서 신비함으로 가득 찬 한 조선인 혁명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된다. 님 웨일즈에게 밝힌 이름 김산은 이 조선인 혁명가가 쓰던 여러 가명 중 하나였다. 님 웨일즈의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김산은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울며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님 웨일즈는 김산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는데 잘 알려진 <아리랑>이다.

"한국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이름이다"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말했던 아리랑에 대한 설명 일부분이다. 아마도 김산은 님 웨일즈 앞에서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렸을 것이다.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일대를 걷던 중 뉴스 속보 하나가 공유됐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의 정상회담 차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던 김정은 위원장 환송식이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 여파로 시내 곳곳이 통제되고 도로 위의 차들은 꼼짝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발걸음을 서둘러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역 일대는 이미 경호 경찰병력과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접근 금지선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역 광장을 내려 다 보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사용되는 역 앞 도로와 광장은 완전히 비워졌다. 도로 아스팔트 위에 붉은 주단이 깔리고 러시아 군 의장대가 도열했다.

▲ 김정은 환송식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역 앞 광장을 정리하는 러시아 경찰들 ⓒ박흥수
▲김정은 환송식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역 앞 광장에 도열한 러시아 군 ⓒ박흥수

한 참 시간이 지난 뒤에 군중들 술렁임이 일어났다. 검은 색 세단들이 줄지어 나타났고 이내 김정은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은 위원장은 얼굴에 위엄을 가득 담고 붉은 색 카펫위에 섰다. 그때 러시아 군악대가 연주한 음악은 아리랑이었다. 러시아는 북한을 형제의 나라라고 말해왔다. 남한이 미국 도움으로 국가체제를 지켰다면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 지원에 기댄 역사가 있다. 러시아 군악대의 절도 있는 아리랑 연주는 형제의 나라 북한 정상에 대한 예우였다. 아리랑 연주가 끝난 뒤에 이어진 것은 러시아 민요 카츄샤였다. 지난밤 횡단열차가 정차했던 루지노 역에서 러시아 젊은이들과 어우러져 불렀던 두 곡이었다.

아리랑은 한국 또는 한인을 상징하는 노래다. 기쁘게도 슬프게도 부를 수 있는, 한인들 한과 풍류가 섞인 노래다. 아리랑만큼은 남과 북이 너와 내가 없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도, 멕시코 애니깽(에네켄) 밭에서도, 중앙아시아 황무지에서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조선 독립을 염원했던 혁명가들도,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해 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위해 총을 들었던 젊은이들도 불렀던 노래였다.

이제 한반도는 대결의 시대를 넘어야 한다. 더 이상 "너는 어느 편이냐" 눈을 부라리며 묻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 시대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고 그 열쇠는 철도가 될 것이다. 남과 북 철도가 연결되고 대륙으로 달려 나갈 철도가 될 것이다. 국제역이 된 서울역에서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베이징이나 울란바타르, 모스크바로 향하는 국제열차 이름 중 하나는 아리랑호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목 놓아 부르면서 만주를, 시베리아를 달리고 싶다.

▲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향해 아무르만 해안을 달리는 기차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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