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스에 대한 공포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금, 모두가 잊었던 위협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바로 비만이다. 사스의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게 전염되어 치료법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는 닥치지 않을 듯 보였던, 소위 '선진국형 질병'인 비만이 어느새 우리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비만은 '지구촌 전염병'?**
올해 5월 29일부터 4일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12차 유럽 비만 문제 학술대회는 전세계 성인 비만 인구가 2억 5천만 명에 달해, 비만이 이미 '지구촌 전염병'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성인 3명 중 1명이 비만이라는 2001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결과가 있었다. 또 전국 병의원에서 비만으로 분류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진료비를 청구한 환자 수도 1999년 1200여 명에서 2001년에는 약 1만 7000명으로 늘어, 무려 13배가 넘게 급증했다. 20대에서 40대 사이에 초점을 맞춰 보면 비만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사람이 2년 동안 30배가 넘게 증가한 셈이다.
이러한 비만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생활 습관의 변화다. 그 어느 때보다 고열량의 식사를 하면서도 운동량은 부족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례 없이 급작스런 비만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경우 비만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없애는 도시개발 방식과 '정크 푸드'의 확산도 개발도상국에서 증가하는 비만의 또다른 원인이다.
이런 비만은 최근 들어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대 의학이 비만을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증,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 간·담낭질환, 골·관절증 등의 원인으로 지적하면서부터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대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1996년에 비만을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고, 1997년 보고서를 통해 선진국에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비만 인구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는 경고신호를 보냈다. 급기야 최근에는 '담배 다음은 비만'이라면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WHO 아·태지부와 대한비만학회에서 서구의 기준보다 동양인의 비만기준을 강화해 발표하면서 비만의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동양인은 서구인에 비해 같은 체격일 때 근육이 적으므로 합병증의 위험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1백75cm의 키라면 76.6kg만 넘어도 비만으로 봐야 한다. 기준이 엄격해진 만큼, 의학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비만인의 규모도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2002년 한 해 동안 의사협회에서 비만을 의사와의 상의를 통해 치료해야 할 만성 질병으로 규정하고, 비만의 날을 선포하는 등 대대적인 비만퇴치 캠페인을 벌이면서부터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비만〓치료해야 할 질병'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캠페인은 비만약을 생산하는 한 다국적 제약회사의 협찬을 받아 진행되었다.
이러한 의학계의 주장은 이전보다 체중이 불어난 사람들은 물론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많은 현대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만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사람들은 기존의 식이요법이나 운동뿐만 아니라 약물치료나 수술 등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통해 비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만은 곧 질병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는 중에도 한쪽에서는 비만을 과연 질병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2001년 7월 런던에서 열린 비만학회에서 미국 과학자 스티븐 블레어는, "몸이 튼튼하면서 비만인 사람과 날씬하지만 튼튼하지 않은 사람의 당뇨병에 걸릴 확률을 비교하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비만의 정도보다는 튼튼한 몸 상태가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한편 미국의 건강 심리학 2002년 11월호에서 레이먼드 노라 연구팀은 화를 심하게 내는 것이 흡연, 비만,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위험요인들보다 심장질환의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많은 의학계 종사자들이 동의하듯 질병은 대부분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며, 어디서부터 질병으로 규정하고 의학적 치료를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비만뿐 아니라 분노도 그 특징에 따라 의학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질병으로 취급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역시 그 경계가 매우 애매하다.
***비만은 질병, 비만 시장이 부추겨**
하지만 문제는 이런 논란이 그야말로 사소한 시비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질병으로서 비만 담론을 이끌고, 한편으로 이 담론 덕을 보고 있는 것은 바로 비만치료제 시장이다. 최근 전세계 비만치료제 시장은 연평균 20%가 넘게,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연간 20조 원에 달한다는 위궤양 치료제 시장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2001년 1조 6천억 원 가량의 시장을 형성한 비만치료제 시장의 규모는 2010년이 되면 10조 원 가량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비만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2001년 판매가 시작된 한 비만치료제는 100일 동안 95억 원 분량이 팔려나가면서 비아그라의 기록을 깨는 기염을 토했다. 1조 원대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다이어트 시장에서는 앞으로도 식이요법이나 운동, 또는 '비과학적인' 다이어트 식품들보다는 '의학의 권위'를 등에 업은 비만치료 약물의 위상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식욕억제제로 처방되다가 1995년에 대규모 국제 연구를 통해 그 심각한 부작용이 밝혀져 4년 뒤인 99년에 사용이 금지된 한 비만치료제 사건에서 보듯 약물 치료가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
***비만은 사회가 만들어낸 질병**
더욱 근본적으로는 비만을 식생활 습관, 노동 환경이나 교통 및 주거 형태의 특징 등 사회적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만 자체를 문제시하고 나아가 질병으로 취급하는 것은 현재 비만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확대, 재생산케 하는 '과학적인 근거'로 작용할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뚱뚱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은 비만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뚱뚱해서 좋을 건 없다'는 인식이 비만인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압박으로 다가오는 이 때, "체지방보다 체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나, "건강한 뚱뚱함을 자랑할 수 있는 자신감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조언이 대중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처럼 비만을 권하는 사회도 없었다지만, 또한 지금처럼 비만을 혐오하는 사회도 없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 등장하는, 목조건물이 겨우겨우 지탱할 만큼 엄청난 비만인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머니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때때로 언론에 등장하는, 창문을 뜯고 크레인을 동원해서야 집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만인의 존재 역시 건강은 물론 사회생활 자체를 파괴하는 비만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긴다.
비만은 건강 뿐 아니라 행복까지도 파괴하는 질병이라는 의학담론은, 이러한 극단적 비만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훨씬 더 넓은 범위의 '비만인'에게 약물치료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비과학적인 다이어트를 과학적인 비만치료로 전환한다고 해도 불행해지는 비만인의 수가 행복해지는 비만인의 수보다 획기적으로 줄어들긴 어려울 것이다. 설사 치료가 필요할 만큼 병적인 비만이 아니라 해도, 점차 강화되고 있는 비만 담론은 '건강한 비만인'에게도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해 서울시내 직장인 26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남성 10명 중 8명이, 여성은 10명 중 5명이 정상범위에 속한 체중의 여성을 비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서울백병원 이성희 교수팀의 조사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 개념에는 이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과 그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환자들을 연민의 또는 혐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질병의 원인도 만들고, 질병에 대한 이미지도 생산하는, 따라서 환자를 이중으로 생산하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건강'이라는 화두가 절실하다. '지구촌 전염병' 비만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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