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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평화협정의 불가피성 미국에 설득해야"

이삼성 "평화협정 없는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선언 이후 북한 비핵화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은 미국이 당초 합의에서 후퇴해 북한의 일방적 선 핵포기를 요구한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또한 중재자를 자임한 한국이 이러한 미국의 변화된 입장에 끌려간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는 지난 26일 서강대에서 열린 제9회 맑스코뮤날레에서 '한반도의 평화: 6.12 싱가포르선언 이후 북미협상의 교착과 한국외교'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북한 비핵화는 평화협정과 동시에 진행돼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면서 이제라도 한국 정부는 평화협정 협상의 명분과 불가피성을 당당히 밝히고 미국과 국제사회를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싱가포르 북미선언의 핵심은 평화협정체제 구축에 의한 북한 비핵화 진행이라는 대원칙에 미국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었고 그것을 국제사회를 향해 명확히 선포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 선언 이후 북한이 비핵화 일정표와 북미 간 외교·경제관계 정상화 일정표를 함께 엮어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기를 기대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싱가포르선언 이후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선행조치들을 요구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미국 측의 조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즉 북한의 선 비핵화 요구라는 과거 패턴으로 복귀한 것이다.

실제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018년 10월 6일 4차 방북 직전 "최종적,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비핵화(FVID)가 완수되면 평화협정이 가능하다"며 달라진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싱가포르 선언 직전인 5월 27일 상원 청문회에서 행한 그의 발언에서 명백히 후퇴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할 것을 요구하듯이 미국이 북한에게 제공할 보장들 역시 마찬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계획은 협상을 타결해서 상원에 회부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 목표다"라고 말했었다.

문제는 이처럼 달라진 미국 정부의 입장을 한국 정부가 묵종하고 만 데 있다. 지난해 9월 20일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평화협정은 완전한 비핵화 이후의 일"이라고 못박았다. 즉 평화협정체제 구축에 의한 북한 비핵화 진행이란 싱가포르 선언의 대원칙을 포기한 미국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반면 당시 CNN과 인터뷰한 미국의 한 전문가는 "북한이 비핵화 자체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의 핵심은 평화조약"이며 "북한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협상을 위해서는 이제 평화협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정곡을 찔렀다.

미국 언론과 상당수 전문가들의 눈에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평화협정"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우회하면서도 북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허언"(empty words)을 일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삼성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대해 "4.27판문점 선언까지는 잘 갔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북핵문제 해결의 기본 틀과 관련해서 스스로 채택한 4.27선언과 달리 미국 강경파의 프레임에 동조하거나 순응하면서, 북미를 함께 이끌 수 있는 포괄적인 '틀 지우는 비전'(framing vision)을 결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미 중간선거 직후 기자들에게 "(한국 정부는) 우리가 승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Without our approval, they do nothing!)고 말해 한국 정부가 미국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 교수는 싱가포르선언 이후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 선행조치론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함으로써 말 그대로 '가야 할 노선은 미국이 정하고 한국은 운전만 하는', 그래서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미 간 협상에 맡긴 채 방관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의 당면한 역할은 "포괄적이면서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인 평화조약 형태의 '합리적인 빅딜'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고 강조했다.

2019년은 "북한이 호혜적이며 대칭적인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 체제 구성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미국과 한국의 외교가 그 조건을 마련해낼 것인가, 아니면 북한이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버리고 결국 핵보유국 지위를 향해 분명하게 방향을 잡을 것인가"가 결정되는 역사적인 분수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삼성 교수의 발표 논문 중 싱가포르 선언의 배경과 향후 시나리오를 제외하고 북미 협상 교착 원인에 대한 부분만을 전재한다. 편집자

▲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6.12 이후 북미 협상 교착과 그 원인


6.12 북미 정상선언 이후 수개월 간 북미협상에서 최대 이슈는 핵 리스트를 신고하고, 나아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먼저 제거하는 가시적인 조치들(tangible steps)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었다. 북한이 핵무력을 (일부라도) 먼저 내놓는, 이른바 '프런트 로딩' 조치를 취할 것을 미국이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은 북한에게 일정한 비핵화 선행조치들을 요구하면서도 그에 상응한다고 북한이 판단할 만한 조치들에는 부정적이었다. 선(先) 비핵화 요구라는 과거 패턴으로 복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6.12 싱가포르 선언을 무효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북한은 이를 "강도적 행태"(ganster-like behavior)라며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이는 결코 예기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종전선언'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종전선언은 적대 관계의 선언적 청산으로서 평화협정 교섭의 전단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교환되면 외교관계 개선과 경제 제재 일부 해제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여기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소극적인 이유에 대해 <뉴욕타임스>가 분석한 것을 보면, 우선 미국의 당시 입장은 북한이 최소한 핵무기와 핵시설 그리고 미사일 리스트를 제출하지 않는 한 종전선언은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종전선언에 응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 안의 강경파와 특히 군부 인사들은 주한미군을 포함한 동아시아 미 군사력의 위상과 명분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이는 "미국의 패권 대전략"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보았다.

또한 한국 진보정권이 종전선언을 계기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지위 약화를 추구할 가능성도 우려한다고 했다. 이 언론에 따르면, 존 볼턴과 짐 매티스 국방장관이 종전선언에 가장 반대하고 있었다. 이들 강경파는 설사 북한이 핵리스트 제출에 응해도 "종전선언 전에" 엄격한 검증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2년 국무부의 군축담당 차관으로서 북한과의 제네바합의를 공식 파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바람에 북한 핵무장이 본격화되었다는 것 때문에 북한 정부 인사들 사이에서 볼턴은 "자기네들 핵무기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ir nuclear program)로 통한다.(1) 볼턴은 6.12 싱가포르 선언까지는 방해하지 않았지만 그 선언이 담고 있는 새로운 대원칙의 실천을 가로막는데 이미 다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셈이다.(2)

미국이 6.12 선언의 대원칙에 충실한다면, 북한 비핵화는 평화협정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평화협정 협상은 시작하지도 않은 채, 종전선언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마저 "쉽게 내주어선 안 되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종전선언이라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단계로 격상시키고 그것을 평화협정 협상과 분리한 다음, 종전선언을 빌미로 북한의 비핵화 선행조치를 요구하는 모양새였다. 종전선언을 한미연합훈련 재개 위협과 엮어서 그 대가로 북한의 비핵화 선행 조치들을 확보하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는 "살라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2018년 10월 6일 폼페이오(Mike Pompeo)가 그의 4차 방북 직전 일본에서 평화협정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최종적,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비핵화(FVID)가 완수되면 평화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3) 이것은 6.12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무효화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같은 무렵 북한 공식 매체는 "종전선언은 비핵화 흥정수단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었다.(4)

2018년 9월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미국 언론 CNN의 보도는 유의할 대목이 있었다. 이 언론과 인터뷰한 미국의 한 전문가는 "북한의 비핵화 의도에 관해 남한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핀트를 벗어나 있다"(All the talks from South Korea about North Korean plans to denuclearize miss the point)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미국이 실질적인 평화협정 협상을 회피하며 살라미전략을 구사하는 상황에서는, "북한이 이런 저런 작은 것들(small things)을 요구하는 협상을 할 수는 있지만, 북한이 비핵화 자체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의 핵심은 평화조약(a peace treaty)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협상을 위해서는 이제 평화협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정곡을 찔렀다. 미국 언론과 상당수 전문가들의 눈에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평화협정"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우회하면서도 북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허언"(empty words)을 일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2018년 8월 하순 폼페이오의 방북 계획을 트럼프가 취소한 원인이 된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김영철의 편지가 있었다. CNN 등 미국 언론은 김영철의 편지는 '평화협정' 협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폼페이오의 방북이 취소된 배경과 관련해 한국 대표언론 KBS 9시 뉴스를 포함한 한국 언론사들의 보도들은 미국은 비핵화 선행을 요구하는 데 비해서 북한은 "종전선언"이 먼저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한국 정부와 함께 언론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 미국과 한국이 정면으로 직시하고 감당해야 할 문제의 본질이 종전선언이 아니라 평화협정 협상의 본격화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4.27 판문점선언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명시했음에도, 한국정부가 6.12 공동선언 이후 미국이 후퇴한 이래 "평화협정"이란 개념 자체를 거의 금기시하는 분위기까지도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한국 언론은 그러한 정부의 태도를 투영하고 있었다.

2018년 9월 평양정상회담과 그 후의 '평화협정 문제'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선언을 했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 해소에 의미 있는 역사적 진전을 이룬 선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9월 20일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평화협정은 완전한 비핵화 이후의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발언은 문재인 정부가 평화협정에 관해 "선 비핵화"라는 종래의 패턴으로 도돌이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평화협정이 들어서야 할 자리를 멀리 뒤로 미루고 그 대신 종전선언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로써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북한의 일정한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내는 대가로 인식하는 점에서 미국의 살라미전략에 포박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를 위해 필요한 "평화협정 체제를 통한 비핵화의 비전"을 포기했거나 혹은 처음부터 결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북한의 의구심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분명했다. 평화체제 구축 이전에 "(북한) 핵무장의 일방적 해체는 없다"는 것이었다.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과 평양선언이 있은 지 불과 얼마 후인 2018년 9월 29일 리용호 북한 외상이 행한 유엔 총회 연설에서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핵·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중지와 핵실험장 폭파 등) 북한이 중대한 선의의 조치들을 먼저 취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상응한 화답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핵·탄도미사일) 시험들이 중지된 지 근 1년이 되는 오늘까지 제재 결의들은 해제되거나 완화되기는커녕 토 하나 변한 것이 없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2018년 8월 남북 철도 공동 조사가 유엔사의 군사분계선(MDL) 통행 불허로 무산된 것과 관련하여, "유엔군사령부는 북남 사이의 판문점 선언의 이행까지 가로막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선(先) 비핵화'만을 주장하면서 그를 강압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제재 압박 도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심지어 '종전 선언' 발표까지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제재가 우리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우리 국가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미군의 핵 위협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2018년 10월 유럽 순방길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영국 정상을 만났을 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비핵화 진전"을 대북한 제재 완화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10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방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한반도 평화 구축"을 언명했다.

그런데 2018년 12월 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진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다시 "완전한 비핵화" 뒤에 대북한 제재 해제를 대원칙으로 재확인했다. "한미 정상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기존 제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고 하였다.(6)

요컨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및 한국 내 정치권과 국민을 향한 문재인정부의 공식적인 대북정책 원리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서, 미국을 향한 공식 정책 천명에서는,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포르선언의 대원칙에서 공식적으로 후퇴한 상태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 이후 판문점 선언을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그렇다면 평화협정 문제에 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은 결국 무엇일까? 다음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 4.27선언의 취지대로 <평화체제 구성을 통한 북한 비핵화>를 내심 원칙으로 간직하면서도, 미국의 변화된 입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북미 간 대화 지속과 남북관계 발전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집중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서 "표면상 후퇴"한 것일 가능성이다.

둘째, 4.27 판문전선언 당시엔 "평화협정 체제 구축을 통한 비핵화"의 대원칙에 동의했지만, 이후 미국이 6.12 싱가포르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 대원칙에서 후퇴하여 "비핵화를 전제한 평화협정"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문재인 정부도 스스로 후퇴하여 평화협정 문제에 관해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을 가능성이다.

셋째, 4.27 판문점선언에서 문재인정부가 합의한 '평화협정'은 애당초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한 평화협정"이었던 것으로서, 북한의 평화협정 개념에 실제는 동의하지 않았거나 애매한 상태로 두면서 서명했을 가능성이다.

위의 셋 가운데 어느 쪽인가를 한국정부 주요 인사들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 판단하면, 첫째일 가능성은 적어지고, 둘째도 아닌 세번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평화협정에 관한 한국 정부의 인식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평화협정은 "평화의 결과"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문서"이며, "평화를 붙들어놓기 위한 제도적 장치" 라는 의식이 부재하거나 분명치 않은 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진보 학계까지 포함하여 한국 전문가집단과 지식인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사고방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평화협정은 평화의 입구가 아니라 출구"일 뿐이라는 사고방식이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한 인식의 부작용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쪽이든 평화협정의 추진을 통한 북한 비핵화라는 대원칙을 공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멀어져 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 핵프로그램의 내면적인 진전과 확장의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목표로 하는 평화체제 구성도 남북관계의 포괄적 진전의 가능성도 멀어지는 것이었다.

포괄적인 호혜적 평화협정 협상은 배제하거나 뒤로 미룬 채, 종전선언 및 "환상적 경제적 미래"(fantastic economic future)를 앞세운 미국의 살라미 전술을 뒷받침하는 효과가 우려되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미국/한국이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지연시킬 수 있었다. 문재인정부의 이러한 평화협정 개념으로는 "평화체제를 통한 비핵화"를 위한 창의적 중재외교는 가능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협정' 개념의 한계에 직면한 북한의 전략은 우선 평화협정과 비핵화는 북미 협상으로 푼다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북한은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 인식의 한계를 직시하고 평화협정 문제는 남한과의 협상 어젠다에서 분리하여 미국과의 협상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남북대화 어젠다는 북미협상 어젠다에서 분리시킨다. 북미 간 협상에서 남북관계를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활용한다. 남한과의 협상에서 주요 어젠다는 남북간 군사긴장 해소와 남북 경제협력에 한정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대미 협상 유지와 '핵보유국 지위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의 동시적 추구 방안을 모색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핵무장 확장 능력' 포기 (=영변핵시설 폐기)의 수준, 그리고 대미 타격 가능한 ICBM 폐기에 관한 협상을 수단으로 삼아서 미국의 대북 제재의 일정한 해체를 확보해내고, 기왕의 핵무장 수준은 유지하여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하는 노선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2019년 2월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1994-2018년 기간에 북미 간 성립한 합의와 그 성격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1994년 제네바합의 (Geneva Agreed Framework), 2005년 9.19선언, 2007년 2.13합의, 그리고 2018년 6.12 싱가포르 선언이 있다. 이들 합의 유형은 모두 일괄타결 및 단계적인 동시적 실천의 틀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의 대북한 안전보장과 제재 해제 이전에 먼저 실질적 비핵화를 진행하는 합의에 응한 적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이들 합의의 공통된 한계는 미국의 행정부 수준의 협정 내지 합의(executive agreement)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미국 정치권의 초당적 합의에 기초한 제도적 보장이 결여되어 있다. 동시적 행동의 원칙을 천명하거나 내포했지만, 구체적인 실행의 일정표를 결여하고 있던 것 또한 공통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합의들의 운명 역시 공통적이었다. 제네바 합의는 미국 내 정권교체에 의해 파기된다. 9.19 공동선언은 미국의 동일 행정부 자신에 의해 번복된다. 2.13합의는 북한 핵실험 이후, 북한의 판단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2018년의 6.12 싱가포르 선언은 현재진행형이지만 "미국의 동일 행정부 자신에 의한 번복"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과거 북미 합의의 역사에서 유추 가능한 향후 북한이 응할 비핵화 합의의 요건은 다음과 같았다고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일괄타결이다. 미국과 북한 각자의 핵심 요구사안들의 포괄적 동시적 교환이자 단계적인 동시적 실천에 관한 합의이다. 둘째는 미국의 초당적 합의에 의한 제도적 보장이다. 미 의회의 비준을 받는 조약 형태의 평화협정을 의미한다. 셋째는 동시적 교환과 실천에 관한 구체적 일정표를 담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장 완성 이후에 응할 '비핵화 합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은 절대 불가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북한이 원하는 일괄타결은 미국의 요구가 비대칭적으로 과도한 형태가 아닌 "호혜적, 대칭적 일괄타결"이라는 점이다. 한국 언론은 "미국은 일괄타결, 북한은 단계적 협상"을 요구한다는 이분법으로 이 문제를 정리해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이분법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보도해왔다. 4.27 판문점선언에서 언급된 평화협정, 그리고 6.12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에 담긴 '항구적 평화체제'는 북한 비핵화의 일정표와 북미 간 외교 및 경제관계 정상화 일정표를 서로 연결해 담아낸 포괄적 일괄타결을 전제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괄타결은 비핵화도 경제·외교관계 정상화도 시간적으로는 "단계적"이고 북미 간 행동의 선후에 관해서는 "동시적인" 실천의 일정표를 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북한에게 한국과 미국이 그 선언들을 통해 약속해준 것의 실체는 "단계적인 실천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의 청사진을 함께 만들어내자는 합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괄타결과 단계적 협상을 상호 대립되는 것으로 이분법화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 습관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간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문제의 근본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을 원하고, 북한은 그것을 거부하면서 단계적 협상을 원했다는 한국 언론의 도식적인 주장은 북한이 평화협정 협상 본격화를 원할 때 미국은 사실상 북한 비핵화 선행을 앞세움으로써 진정한 평화협정 협상을 거부해온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미국이 얘기하는 '빅딜'이 북한이 기대한 "단계적 실천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로서의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과 거리가 먼 일방적인 요구로 가득한 것일 때, 그것은 빅딜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선택할 것은 포괄적 협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우선 당장 북한 경제의 목을 조이는 경제제재의 일부 해제라도 확보할 수 있는 중간 딜이라도 추구해보는 일일 터이다. 이것이 지난 2018년 가을 이래 북한이 모색해온 방법론적 전환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때의 중간 딜은 물론 북한이 기존의 핵무장 상태의 골격은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북한이 9월 남북정상의 평양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언급한 영변핵시설 폐기를 카드로 미국의 대북 제재 일부 해제를 교환하는 협상을 하려 한 것이라면, 그것은 6.12 싱가포르 선언 이후 미국과 한국의 '평화협정' 관련 개념적 한계에 직면하면서, "북한이 안심하고 비핵화를 진행할 수 있을 조약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대칭적 일괄타결"로서의 평화협정 가능성에 비관적이 되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6.12 싱가포르 선언 이후 북한의 비핵화 협상 전략과 태도는 미국의 후퇴와 한국의 평화협정 개념의 한계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김정은 위원장을 포함한 북한 최고 지도부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의 "비핵화 협상 중재자 또는 운전자"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핵화 문제에 관해 한국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북한의 관점에서 비핵화는 평화협정 체제 구축을 통해서만이 실질적 진전이 가능했다. 평화협정을 견인하여 북한 비핵화를 이룩하는 협상과정에서 한국은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다만 한국은 남북관계 발전을 견인함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전쟁불사 정책을 견제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북미 협상 국면을 가능한 한 유지시키는 역할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2018년 7월 이후 한국외교의 핵심 문제와 숙제는 한국이 미국 내 강경파의 노선에 대한 적극적 견제 노력을 회피하고 그에 사실상 동조(同調)한 데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장은 한미간 공조 유지라는 장점을 누릴 수 있었다. 한미 간 마찰 표면화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내 보수 세력의 공세와 남남갈등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주요 행위자 역할을 포기한 셈이었다. 북한의 핵보유국화를 받아들인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를 원하면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 비핵화 달성 후 평화협정"이라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틀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북미 간 평행선을 유지하였다. 북미가 평행선을 벗어나 합류할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 하나는 북미 모두 윈-윈하는 지점이라고 해야 할 "호혜적이고 대칭적인 포괄적 일괄타결" 결국 평화협정 협상의 비전을 한국정부가 지혜로운 방식으로 외교적 공론화를 하는 것이었다.(7)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과 그 실패의 구도

2019년 2월 27-28일에 하노이에서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어떤 합의도 낳지 못하고 결렬로 막이 내렸다. 합의 실패와 관련해 두 가지 가닥의 협상 구도가 드러났다. 하나는 트럼프도 밝힌 것과 같이, 미국은 북한에게 "영변핵시설과 알파(영변외 핵시설)의 폐기"를 요구하고, 미국은 대북한 제재를 해제하는 문제를 두고 벌인 협상이다.

▲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메트로폴 호텔에서 북미 확대 정상회담이 열렸다. ⓒ로이터=연합뉴스

다른 하나는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추가적으로 밝힌 것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핵무기뿐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를 대상으로 한 포괄적 일괄타결"을 요구하였고, 대신 "엄청난 경제적 미래"를 북한에게 약속했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이른바 '빅딜' 협상틀이다.(8)

여기서 볼턴이 말한 협상틀을 '일괄타결 방식'으로 본다 해도, 그것은 북한 관점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호혜적·대칭적 일괄타결"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대칭적 일괄타결"의 한 형태거나, 일괄타결이되 북한이 이행할 비핵화 일정과 미국이 그에 보상하는 의무 이행의 순서가 사실상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이행하면 미국이 그것을 평가해서 북한이 원하는 바를 제공한다는 식의 "비핵화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법으로서의 대칭적 일괄타결이 아니라, 북한의 선 비핵화를 향한 전방위 압박외교로의 복귀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합의의 틀은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이다.

① 첫 번째 협상틀은 호혜적이며 대칭적인 포괄적 일괄타결이다. 이 협상틀은 모든 것의 포괄적 타결과 단계적〮 대칭적인 이행 일정표를 담은 것으로서, 북한 비핵화의 단계적 이행과 각 단계마다 북미 외교 및 경제관계에서 미국의 동시적인 약속이 이행되는 일정표를 담는다. 또한 미국 내 초당적인 비준에 의한 조약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북한이 안심하고 비핵화를 진행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평화조약을 가리킨다.

② 두 번째 협상틀은 미래 핵(영변 핵물질 생산시설)의 폐기를 카드로 북한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경제 제재의 주요 부분의 해제를 교환하는 것이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포르 선언 때,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호혜적이며 대칭적인 포괄적 일괄타결로서의 ①의 가능성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차 정상회담 후 미국의 태도가 볼턴 등 강경파의 주도 아래 뒤로 후퇴하면서, 김정은은 그 희망을 거의 상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대안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그 대안으로 북한이 고려할 수 있는 옵션이 ②의 방안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②의 방안의 전제는 ①의 실현 가능성이 비관적인 조건에서 선택한 차선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안심하고 비핵화 의지를 갖고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북한이 당면한 경제제재의 일부 해제나마 모색하고자 할 때 북한이 취할 수 있는 협상틀인 것이다. 북한이 적어도 기존에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는 영구히 유지하여 핵보유국을 목표로 하면서 다만 영변 핵시설 폐기만을 협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의심도 물론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이 정당화되려면 미국이 북한에 제안했다는 '빅딜'이 내용상 과거와 같은 '북한 비핵화 선행'을 조건으로 하는 비대칭적 일괄타결 방식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 내용과 이행 절차에서 북한이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단계적 동시행동의 원칙을 반영한 '호혜적이며 대칭적인 포괄적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이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미국은 이 점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게 뻔한 비대칭적 요구들로 미국이 북한을 압박했던 정황이 더 풍성하게 전해졌다.

2018년 6.12 싱가포르 선언 이후 2019년 2월 말의 하노이 회담 직전까지 미국이 드러낸 대북 외교는 볼턴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가진 가운데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조치 선행(先行)을 요구하는 양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북한에게 대칭적인 평화조약을 통한 평화적 해결에 희망을 버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노이 회담에서는 ①의 대칭적인 평화조약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린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중요한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나서자, 미국은 한편으로 영변 핵시설 외의 미국이 의심하는 추가 핵시설의 동시 폐기를 요구했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볼턴 등 강경파들이 심지어 생화학무기까지 거론하며 그것을 '포괄적 빅딜'로 포장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북한으로선 6.12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그 선언에서 천명된 대원칙, 즉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비핵화"라는 틀로부터 후퇴한 상태가 반년 이상 지속된 상황에서 ①의 포괄적인 평화조약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할 수 없었고, 이런 상태에서는 일단 영변 핵 포기를 협상 대상으로 삼아 그 대가로 일정한 경제 해제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이 영변 핵 이외의 미국이 의심하는 핵시설까지 신고하고 폐기를 약속하는 이른바 '플러스 알파'라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포괄적인 대칭적 평화조약의 협상틀을 수용하지 않는 한, 북한의 옵션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 유지를 모색하는 것을 전제한 지엽적 협상과 교환에 한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①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②의 수준에서 비핵화 협상을 할 경우, 미국이 대북한 제재의 핵심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해제하는 사실상의 전면 해제를 해준다 하더라도 그 대가로 북한이 실행해도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비핵화 수준은 영변 핵 폐기와 ICBM 추가실험 포기 정도에 그칠 것이다.

평화조약과 같은, 미국 내 초당적인 법적 구속력 있는 제도적 장치로 북미외교 및 경제관계 정상화가 보장되지 않는 한, 미국이 아무리 "환상적인 경제적 미래"(fanstastic economic future)를 약속한다 해도, 북한이 응할 수 있는 비핵화 수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노이 회담은 명확히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는 4.27판문점 선언까지는 잘 갔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북핵문제 해결의 기본 틀과 관련해서 스스로 채택한 4.27선언과 달리 미국 강경파의 프레임에 동조하거나 순응하면서, 북미를 함께 이끌 수 있는 포괄적인 '틀 지우는 비전'(framing vision)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미 중간선거 직후 트럼프는 기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승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Wiithout our approval, they do nothing!).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평양선언에서 합의된 남북 군사적 긴장완화와 철도 및 도로 연결과 같은 남북관계 개선의 중단기적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하려 나름 충실하게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유지하게 하고, 미국을 진지한 포괄적 협상에 임하게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중재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중재를 자임하지만, 중재를 이끌어갈 자신의 비전이 미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북한의 선택지 중 ①과 ②에서 모두 한국정부는 북미관계의 돌파구를 촉진할 수 있는 역할의 동력을 상실하고 구경꾼의 위치로 전락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하노이 북미회담을 통해서 노정되었다. 한국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포괄적 빅딜의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 결과 한국은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빅딜의 방식에 대해 미국에 중재할 기회도, 준비도, 능력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가 현실적으로 부분적 교환을 모색하는 경우에도, 그에 대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미국 강경파들에게는 2017년 12월 중국이 동의하여 결정된 강력한 유엔 제재라는 어렵게 확보한 대북 제재 장치로 북한을 압박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북한과의 어떤 비핵화 협상보다 더 귀중한 기득권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제재를 유지하여 북한 경제발전을 저지하고 북한 붕괴를 촉진한다는 관념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2차 북미회담을 앞두고 미 군부 및 정보기관 수장들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2019년 1월 말 CIA 국장과 DNI(국가정보국장)는 의회 증언에서 "북한의 핵 완전 포기는 없을 "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2019년 2월 12일 필립 데이비슨 인도-태평양지구(Indo-Pacific) 사령관도 상원 청문회에서 같은 취지의 증언을 했다. 이들은 미국이 6.12 싱가포르 선언 후, 그 선언의 대원칙을 무효화함으로써 김정은을 혼란과 "고뇌"에 빠뜨린 점에 대해서는 분명 언급하지 않았을 터이다. 트럼프의 톱-다운 방식의 대북 협상에 대해 견제하고 사보타지하는 볼턴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전선이 작동한 셈이었다.

볼턴이 2018년 4월 부임한 이후 처음 두어 달은 폼페이오와 트럼프식 협상전략을 방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6.12 공동선언에 따른 평화협정 협상을 차단하는 데 이미 성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짐 매티스(Jim Mattis) 국방장관과 볼턴(John Bolton)이 주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노이 회담에 앞서 볼턴 중심으로 <백악관-군부-정보기관> 연합전선이 강화되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트럼프는 국내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미국 군부와 연결된 볼턴 등 강경파 연합의 관점에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 안팎의 강경파 연합전선은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트럼프식 협상이 계속될 경우 미국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전략의 기반이 무너질 것을 크게 우려할 수 있었다. 특히 미일동맹의 동요를 우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향후 관건의 하나는 미국이 또 다시 "북한 붕괴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이다. 이를 둘러싼 미국 내 강온파 간 논리 경쟁이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온건파가 유리해 보일 수 있다. 중국 대륙을 60여 시간에 걸쳐 유유히 횡단하며 하노이를 오간 김정은 위원장의 여행 루트는 무엇보다 북중관계 복원의 심도를 말해준다. 그것은 북한 조기붕괴론에 기대려는 미국내 강경파들의 유혹을 제한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정부가 미국 내 강온파 간 정책 경쟁에서 강경파를 견제하고 협상파에 힘을 실어주는 보다 적극적 비전과 역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중심에 선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과 그에 기초한 동아시아 평화에의 기여는 공염불에 그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4월 11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맺는말

2018년이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중대한 분수령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의 봄이 왔고,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짐으로써 한반도 분단사에 한 획이 그어졌다. 4.27 판문점선언과 9월의 평양선언, 그리고 6월의 6.12 공동선언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모두가 함께 추구할 이정표를 세웠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실천은 역시 어렵다는 것을 그 이후의 사태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2019년은 2월 말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으로 희망과 함께 그 한계를 노정하며 시작했다. 북한이 앞서 정의한 호혜적이며 대칭적인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 체제 구성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미국과 한국의 외교가 그 조건을 마련해낼 것인가, 아니면 북한이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버리고 결국 핵보유국 지위를 향해 분명하게 방향을 잡을 것인가. 2019년은 그 가닥을 잡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역사적인 분수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중엽 이래 적어도 수십만 명의 국민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나가야 했던 역사적 경험을 했다. 지금도 수백만 명의 국민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절대빈곤국가의 질곡"을 벗어나는 것이 이제 지상과제라는 북한 사회 전체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8년 봄 비핵화 의지를 천명한 직후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서 그 때까지 북한 국가정책의 금과옥조였던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발전 우선 노선을 통과시킨 것은 그 상황을 반영한다.

다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중관계와 함께 핵무장이라는 상황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최대한 그리고 효과적인 지렛대로 삼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지속가능한 안전보장과 경제 제재 해제 일정표와 동등하게 맞교환하고 그것을 미국 정치권에서 초당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의 형식으로 확보해내는 한에서만 진정한 비핵화 일정표를 제시해 합의하고 그것을 진실하게 이행할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4.27 판문점 선언과 6.12 북미정상 공동선언의 요체는 명백히 평화협정체제 건설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라는 대원칙이다. 이 대원칙이 구체적인 후속협상에서 일관성과 신뢰성 있게 관철되지 않을 때 북한은 비핵화가 아닌 다른 길을 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은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새 길"을 언급함으로써 더 구체성을 띠기에 이르렀다. 후자의 불행한 상황이 되면 그 책임은 결코 북한에게만 전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점 한미 양국 외교가 함께 명심해야 한다.

한국정부는 4.27 판문점 선언에서 "2018년 안에 종전선언"을 하고 이어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간다는 비전에 동참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6.12 북미정상회담 이후 그 원칙과 미국이 제기해온 다양한 형태의 북한 비핵화 선행조치론 사이에서 때로 스스로 입장이 불분명하거나, 때로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 선행조치론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함으로써 말 그대로 "가야 할 노선은 미국이 정하고 한국은 운전만 하는," 그래서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미 간 협상에 맡긴 채 방관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행은 북한과 미국이 서로 줄 것과 받을 것을 포괄적이고 동시적으로 규정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2018년 9월 정의용 특사단의 2차 방북 때 김정은이 재차 강조한 것 역시 그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정부는 협상 교착의 원인과 해법의 본질에 관해 정면으로 명확하게 언명하는 것을 회피해왔다. 한국정부는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정상공동선언의 기본 취지가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북한 비핵화"라는 대원칙에 대한 한국 및 미국 정상들의 동의였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밝히고 여론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제 북한의 진정한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북미협상의 본질이 평화협정 협상의 본격화 여부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하여 명분과 전략적 불가피성을 당당하게 밝히며 설득하는 더 적극적인 외교가 시급하다. 그 핵심은 미국이 사실상의 '북한 선비핵화 요구'가 뒤섞인 '막무가내식 빅딜'을 내세울 때, 한국은 포괄적이면서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인 평화조약 형태의 '합리적인 빅딜'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데에 있다.

굳이 미국 대륙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량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북한은 이미 2017년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미국과 공포의 균형을 확립할 정도의 핵무장 완성을 달성했다. 그 핵무장을 전쟁의 위협 없이 평화적으로 해체해내기 위해서 한국과 미국이 각오해야 할 협상의 실체, 그 최소요건이 평화협정이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숙제를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요행을 바라며 비켜가려 해서는 안 된다.

6.12 싱가포로 선언의 정신을 잃어버린 트럼프 행정부, 그리고 그러한 미국에게 한때나마 가졌던 기대를 이제는 접고 비핵화 의지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을 북한, 이 둘을 다시 견인해낼 수 있는 궁극적인 접점 역시 평화협정 협상의 본격화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힘이 약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보수적인 행정부라도 미국 정부 안에는 강경파와 협상파 사이에 경쟁과 긴장이 있다. 둘 사이의 힘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변수는 한반도의 당사자인 한국의 선택과 비전이며 이에 기초한 지혜로운 외교적 노력 여부이다. 강경파는 전쟁불사를 외칠 수 있지만, 그들 역시 실행할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한국의 비전과 선택은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정부, 정치권, 언론 그리고 지식인사회가 모두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빠져있는, 평화협정을 평화의 결과로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평화협정은 평화과정의 출구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고 제도화시키는데 필수적인 '진정한 평화의 입구'이며, 그렇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의 끝무렵에 맺어지는 평화협정은 분명 이미 힘으로 결정된 평화의 뒤처리 문서이기에, 평화과정의 '출구'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회피하고 더 나아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약속 문서로서의 평화협정은 당연히 평화의 '입구'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인식되어야 한다.

■ 필자주석

(1) Joel S. Wit and Jenny Town, "What Happened in Hanoi?," 38 North, February 28, 2019. Editor's Column.

(2) 2018년 3월 트럼프 대통령이 존 볼턴을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Editorial, "Yes, John Bolton Really Is That Dangerous," By The Editorial Board, The New York Times, March 23, 2018.

(3) SBS 뉴스, 2018.10.6.

(4) The Associated Press, "North Korea says peace declaration not a nuclear bargaining chip," The Asahi Shimbun, October 2, 2018.

(5) 김진명, "리용호 '핵무장 일방 해제는 없다: 유엔 총회 연설서 주장, 미국의 선상응조치 요구," <조선일보>, 2018.10.1.

(6) 2018년 12월 1일 청와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언론 브리핑.

(7) 2019년 1월 1일 김정은 신년사의 핵심을 한 미국 언론이 파악한 것을 보면, 그 실체는 결국 평화조약의 문제였다. David E. Sanger, "Kim and Trump Back at Square 1: If U.S. Keeps Sanctions, North Will Keep Nuclear Program," The New York Times, January 1, 2019.

(8) 2017년 12월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문건은 북한이 생물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대북한 제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음해라며 반발했다. 한국 국방부는 북한이 화학무기를 4,500톤 정도 보유한 것으로 주장해왔고, 2018년 2월 미 국무부는 김정남 암살 사건을 근거로 북한이 화학무기를 개발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뉴스위크> 등 외신들이 지적하듯, 북한이 무기급 화학무기를 대량생산해 보유하고 있는지는 정확한 근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이다. 랜드(RAND)연구소가 2018년 1월 발행한 보고서도 북한의 생화학무기 보유를 주장하지만, 정보 부족으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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