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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시침 1994년으로 되돌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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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시침 1994년으로 되돌아가나

'불바다 발언'과 '재난 발언'의 불길한 닮은꼴

한반도 시침이 1차 북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으로 되돌아가는 분위기다.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20일 열린 남북경제협력추진위 5차회의에서 북쪽 대표단단장인 박창련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지난 15일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과 관련해 "오늘 새로운 엄중한 장애가 조성되고 있다"며 "남쪽이 핵문제에 추가적인 조치라면서 대결방향으로 간다면 북남 관계는 영(0)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되면 남쪽에서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을 접한 남측 대표단은 북측에 강력히 항의하며 납득할만한 조처를 하기 전에는 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며 사실상 회담을 중단했다.

***'서울 불바다' 발언과 '헤아릴 수 없는 재난' 발언**

이와 비슷한 사태가 9년전인 1994년 3월19일에도 있었다. 이날 판문점에서 열린 특사교환을 위한 남북 실무접촉에서 북측 박영수 대표는 "서울이 여기서 멀지 않소. 전쟁이 발발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오"라고 발언하면서 회담은 결렬됐고 이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한반도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었다.

이번 평양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재난' 발언과 지난 1994년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대단히 흡사하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시간당 최소한 5만발을 쏠 수 있는 화력을 동원해 서울을 공격해 초토화시키겠다는 메시지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연초에 팬타곤 등 미국 매파들이 '북폭론'을 제기했을 때 북측은 "그러면 미 용산기지에 반격을 가하겠다"고 맞대응했었다. 그러던 것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공격대상이 '남쪽' 전체로 확대된 셈이다.

이런 상황 전개는 한-미정상회담에서 '유사시 추가적 조치'와 '남북경협과 북핵의 연계' 합의가 나오면서 이미 예견됐던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한-미정상회담 합의를 계기로 남한의 대북정책이 강경대응으로 선회하면서 북한의 강성대응이 예견됐고, 그 결과 남북대화가 중단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정에 남한의 중재력이나 발언권이 사라지는 상황을 우려했었다.

실제로 북한의 '헤아릴 수 없는 재난' 발언후 '강경대응'을 요구하는 보수세력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노무현정부의 운신폭도 급속히 좁아지는 추세다. 북한 발언을 접한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에게 남북회담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의 전개과정과 한국**

1993~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도 상황 전개과정은 지금과 대단히 유사했다.

1차 북핵위기는 1993년 3월12일 북한이 NPT(핵확산방지조약)를 탈퇴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갈등은 그러나 그해 6월 뉴욕에서 강석주-갈루치의 회담을 통해 북한이 NPT탈퇴를 보류하고 북핵문제의 정치적-평화적 해결원칙에 동의함으로써 일단 파국은 피했다.

하지만 그후 협상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북한은 '정치적 일괄타결'을 요구한 반면, 미국은 '선(先)NPT 복귀'를 요구함으로써 견해차를 드러냈다. 특히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 미국내 강온대립이 노출돼, 국무부는 북측 요구의 일부 수용을 주장한 반면 국방부는 대북제재와 군사대응을 주장했다. 이같은 미국내 대립 과정에 당시 김영삼대통령이 남한이 배제된 '북-미 직접대화' 및 '정치적 일괄 타결'에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미국내 매파의 발언권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후 진통을 거듭하면서도 진행되던 북-미협상은 1994년 2월 미국방부가 주한미군과 국군이 전시작전계획인 'OPLAN 5027'을 발표하면서 긴장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 계획 후반부에 북한의 주요전력 격멸, 대규모 상륙작전, 평양 고립화, 점령지역의 군사통치 등 북한을 자극하는 예민한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남북특사 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 이틀 전인 3월17일 김영삼대통령이 일본 NHK방송과의 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의 불가피성'을 언급하면서 상황은 한층 악화됐다. 김대통령 발언이 있은 지 이틀 뒤 판문점에서 열린 실무접촉에서 북측은 이 문제를 들고나와 치열한 설전이 이어졌고, 그 와중에 문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기에 이르른 것이다.

위기는 그해 6월 미국이 북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넘길 준비를 하는 동시에 북폭을 공격하면서 전쟁일보 직전의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위기는 6월15일 지미 카더 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일괄타결 및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극적으로 넘길 수 있었으나, 전쟁발발시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던 우리는 이 과정에 철저히 소외됐었다.

***반전평화 피플 파워만이 유일한 희망**

1차 북핵위기 과정과 지금의 2차 북핵위기 과정은 전개과정이 붕어빵처럼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당시보다 여건은 더욱 열악하다. 미국내 보수강경세력의 발언권이 1994년보다 몇배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위기가 어떤 결말로 끝맺음될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단하나는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사실이다. 전쟁 발발시 한민족의 미래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날이 긴장도를 높여가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같은 불확실성속에서 어떻게 평화라는 확실성을 담보할 것인가.

지난해 촛불시위와 연초 이라크 반전시위때 표출됐던 '반전평화 피플 파워'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 점점 많은이들의 공감을 얻어가는 추세다. 지난번 1차 북핵위기때보다 상황이 더욱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강점이 바로 피플 파워이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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