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에서 언급하였듯이,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던 시민경제론을 21세기에 다시 부활시킨 룸사 가톨릭 국립대학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201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하는 중 '천당과 지옥'에 대한 비유를 입담 좋게 소개하였다. 내용인즉 대충 다음과 같다.(☞ 관련 기사 : 시민경제에 대하여)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아온 착한 사람이 사후에 갈 천당과 지옥이 너무나 궁금하여 매일처럼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여 마침내 살아생전에 지옥과 천당을 방문하는 특별한 허락을 받아 냈다.
먼저 들어가 본 지옥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떡 벌어지게 차린 잔칫상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니 이런 곳이 지옥이라니!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질 못해 안달을 내고 있었다. 까닭인즉, 자신의 팔장 길이보다 훨씬 긴 포크를 들고 있는데 반드시 포크 끝을 잡고 먹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혼자서는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꼴이 된 셈이다. 맛난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을 앞에 두고 혼자서는 도무지 먹을 수 없어서 영원히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천당을 방문하였는데 놀랍게도 지옥에서 본 같은 잔칫상에 사람들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아니, 천당과 지옥이 똑같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곳 천당 사람들은 서로 마주 앉은 상대방에게 음식을 먹여 주면서 덕담을 즐기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포크의 끝을 잡아 상대방을 도와 서로 먹여주면서 맛난 음식을 공유하여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혼자서 독식하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인 지옥은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인 데 반하여, 협력하고 공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천당에서는 서로 도와가며 차려진 음식을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메시지였다.
현실에 유비하여 보면, 잔칫상을 차릴 수 있는 선진 경제권역 중에 역동적 복지체제를 도입하고 포용적 사회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은 천국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국가의 부를 1.0%의 소수가 20 % 수준을 상회하여 차지하고 대부분 성장의 과실을 독점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괴물 트럼프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등장하여 극우적인 에너지산업 자본을 위해 국제적으로 합의를 이룬 기후변화협약을 거부하는 동시에 '모두를 위한 건강보험'이라는 최소적 사회정책의 도입마저도 결사 반대하는 미국을 지옥에 가깝다고나 지칭할 수 있을는지?
보스턴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경북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김광기 교수는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동아시아 펴냄)라는 저술을 통해 미국의 속내를 생활체험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마침 김 교수에게 직접 들은 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그대로 전달한다.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 가족들과 유명한 하와이의 해변으로 휴양을 가서 체험한 이야기란다. 미국의 상류 계층들이 즐기는 세계적인 호놀루루 해변에는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수천 명의 노숙자들이 깔판과 덮을 이불을 들고나와 바닷가 모래밭을 덮는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실제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김 교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태양이 비추는 낮에는 상류층이 즐기던 천당 같은 해변이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면 가난한 노숙자들이 잠을 청하는 지옥의 숙소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하와이의 집값이 너무 높아서 소유는커녕 월세조차 지불할 수도 없어 노숙자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인당 GDP가 6만5000불(2019년 추정치)를 넘어서고 세계 부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부국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위에서 예를 들은 생지옥 그대로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의 현실사회는 천당과 지옥의 중간으로 천당의 이타적인 인간군(群)과 지옥의 이기적인 무리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고 있다. 개별적인 인간 역시 대체로 복잡한 감성적 모순을 지닌 채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동기와 박애적이고 헌신적인 의무감이 뒤섞여 공존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이기적 본능과 충동적 동기가 없는 개별적 삶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력(vitality)이라는 에너지를 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수만 년 인류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기적인 본능의 에너지를 다스리면서 대화와 공감과 상생의 지혜로 수렴하여 오면서, 이를 담아낼 다의적 도덕과 공동체적 규범을 발전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근·현대에 이르면서 강제력을 동반한 국가라는 틀 속에서 법치사회의 시민으로 도덕과 규범에 기초하여 본능을 다스리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적 판단과 공동체적 자유를 고즈넉이 지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숨겨진 본능과 이기심이 폭발하는 것도 자주 목격한다. 또한 우리의 내면적 갈등 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교대로 속삭이며 서로 자신이 옳다고 유혹하는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천당은 아니더라도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공간이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각자가 개별적 존재로서 탐욕적이고 이기적 본능을 억제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선한 의지가 자신을 인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고 교육과 실천을 통해 생활 속에 습관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함께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개인의 선한 행위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형성되도록 유도하는 공동체적 관습과 상생적 문화의 정착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선한 행위가 결국은 보상을 받는 반면에 이웃에 무관심하면 위에 예시한 지옥처럼 자신에게 불리하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반드시 합의된 규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원칙이 정치 경제 사회의 강제력으로 제도화되고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예시와 함의적 교훈을 잘 보여주는 국내 출판물로서, 진화론적인 게임이론의 세계적인 산실인 산타페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경북대 최정규 교수의 저술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펴냄), 참여정부 시절 국민경제 비서관으로 큰 활약을 보였던 정태인 박사와 이수연 공저인 <협동의 경제학>(레디앙 펴냄), 번역물로써는 유럽에서 학술 저널리스트로 명성을 날리는 슈테판 클라인의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장혜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와 미국 인디애나 대학 엘리노어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서>(윤홍근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등이 소개되어 있다.
미국에서 2014년에 발간된 애덤 그랜트가 저술한 <기브앤테이크(Give & Take)>(윤태준 옮김, 생각연구소 펴냄)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인간형을 '받기만 하는 자 Taker', '타산적인 자 Matcher' 그리고 '베푸는 자 Giver'로 분류하여 잘 나가는 조직과 단체들의 종사자들을 분석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받기만 하는 자'는 대부분의 조직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거나 예외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엔론의 경영자처럼 부패와 부정을 통해 자신이 속한 조직을 와해시킨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항공업체들의 이야기가 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인 '타산적인 자'는 소속된 조직과 단체에서 무난한 생활을 지탱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앞선 리더가 되지 못하고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는 것이다.
마지막인 '베푸는 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해당 조직에서 양극단으로 나뉘어서 밑바닥을 형성하여 구진 일을 도맡아 하거나 아니면 최상층의 리더로서 화합을 이끌어내고 비전을 제시하고 성공을 이끄는 역할을 해낸다는 것이다. 무개념적으로 그저 사람 좋은 역할로서는 일상적인 활동의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만, 미래지향적으로 조직과 단체를 앞서 이끌고 나갈 수 없다면서, 베풂(giving)의 행위가 성공적 자원과 기제로 제대로 작동하며 영향력을 갖고 확장되기 위한 몇 가지의 제안을 던지고 있다.
제안들의 내용은 미국인스럽게 실용적이고 내용을 담고 있다.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베품의 행위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인지하고 평가해 내야하며 긍정적인 영향이 확인되면 이를 확산시킬 수 있는 고리로써 모임을 만들어 내고,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합의된 베풂 행위에 대한 과제를 부여하여 이를 실천하면서 조직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도움을 청하는 동료에게 최소한 5분 이상의 시간을 할당하여 하소연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할 수 있는 도움을 제공하고 그(녀)와 이해관계를 떠나 평소에 농담과 수다를 포함한 생활적인 대화를 즐기는 한편, 베품을 실천하는 조직에 관여하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를 일상적으로 즐기고 습관이 되도록 조언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 첨언한다면 미래의 조직과 단체는 상하식 명령 전달 체계가 아니라 수평적 협력과 대화방식(DAO, Diversified Autonomous Org)으로 바뀌어야 하며, 경영진과 책임부서는 단지 전체적인 협력과 대화를 조직하고 종합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재배열하면서 일정 기간 단위로 엄정한 평가를 내리는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보상체계와 자율적 협동이 조직의 핵심을 이루어야 한다.
최정규 교수와 정태인 박사의 저술은 현대적 게임이론들을 재미있고 풍부한 예화들을 섞어가며 죄수의 딜레마, 치킨게임, 사슴사냥, 내쉬의 균형이론, 공짜 수입의 배분게임, 무임승차, 트럼프가 취하고 있는 미친놈 게임, '눈에는 눈'의 대응 논리(Tit to Tat) 등 다양한 경우와 조건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다만 위에서 언급되는 다종의 게임이론을 접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게임을 적용하는 상황과 조건에 대한 층별적 분류이다. 예컨대, 한사람과 한사람이 맞상대하는 상황과 다수와 다수가 집단적으로 접하는 상황, 사건이 동시적(simultaneous)으로 발생하는 경우와 순차적(consequential)으로 전개되는 경우, 일회성으로 끝나는 조건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조건 등에 따라서 내용과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은 게임이론처럼 단순화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요인과 상황이 뒤섞여 전개될 뿐만 아니라 갇힌 조건이 아니라 개방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예상하지 않은 외부적 상황이 유입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따라서 게임이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암시적 교훈이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마치 근대경제학에서 인간을 추상적 모델로서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조건제한(모순)적이기에 게임이론의 내용을 실제 상황에 단순히 적용하게 되면 판단의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른 한편, 슈타인은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라는 책에서 이탈리아에서 죄수들을 치료하고 상담하던 헌신적이었던 갈레세라는 의사에 의해 처음 발견된 '뇌 속의 거울뉴런을 소개하고 있다. 거울뉴런은 공감하는 능력을 지닌 뇌의 일부로서, 이를 통하여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협력과 신뢰의 기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거울뉴런의 예는 인간이 가진 공감하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가운데 뇌의 지극히 작은 일부일지 모른다. 실제로 인간의 신체는 단순히 뇌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체감하고 학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소마(somatic) 이론'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반사경 같은 거울뉴런을 통한 공감과 감정이입은, 힘들여 습득해야 하는 복잡한 이성의 능력과 반복적으로 훈련하여 익숙해진 기능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고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일부이자 존재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스레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진화된 포유류적 동물이라는 암시이다. 신경심리학자들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기부행위를 할 때 느끼는 감정은 선물을 받을 때 기쁨과 동일하고,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는 섹스와 비슷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자연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악한 것으로도 선한 것으로도 작동할 수도 있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 시대에 보여준 집단적 광기는 인간의 공감과 감정이입의 본능을 나쁘게 악용된 대표적 사례로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대중심리 역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집단적 분위기와 흐름에 자연스레 휩쓸리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건데 광화문에 등장하는 태극기 부대는 자신들의 성찰과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잘못된 환영이 깊이 각인되고 반민족적 반민중적으로 조작된 집단적 광기가 누적되어 반영된 대중심리의 잔상이다. 청산하지 못한 근현대사의 독소조항이 못된 이해관계로 결집되고 자연반사적인 거울뉴런의 작용으로 집단화되면서 한국사회의 미래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예수 이름을 팔아먹는 사이비기독교 장사치들과 일제부터 형성된 매판적 기득권의 함정에 빠져있는 자유한국당을 거부해야 하는 역사적 근거와 당위가 여기에 있다.
이와 더불어 경영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공유지의 비극'이다. 1968년 미국의 한 대학 교수 개럿 하딘에 의해 제기되어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 지하자원 초원 공기 바다의 고기 등과 같이 공동체가 모두 같이 사용해야 할 공공재를 사적 이익에만 맡기면 자원이 남용되고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예로 제시된 내용으로 최대 100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는 목초지를 공유지로 방치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100마리가 넘는 양이 목축되면서 결국은 목초지가 황폐해진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핑계로 공공적 소유를 폐기하고 사유화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공공재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공기업조차 가능한 한 모두 민영화해야 한다는 근거로 정당화했다.
이에 대항하여 오스트롬 교수는 공동체적 개입을 통하여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공재의 실천적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재확인해 주는 방안을 제시하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수많은 나라의 공유지들의 면밀한 내용분석을 통하여 상황과 조건에 대한 실제적 파악, 명확한 경계와 구성, 정합적인 규칙의 체계화, 집합 선택의 공간 설정, 규칙에 대한 실행 여부 감시, 위반 사항에 대한 제재와 처벌 수위, 갈등 해소와 자율적 조직 구성, 제도적 성찰과 개선 등을 통하여 공유지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소중한 자원으로 관리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마디로 공동체적 합의에 기초한 실용적 제도의 도입과 실천적 관리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 종이 등장한 지난 10만여 년간 생존과 문명의 역사는 공감과 협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생물학의 일반적인 판단이다. 빙하기 등 가혹한 자연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합쳐야만 했고, 들소나 매머드 같은 거대한 동물 사냥과 고래잡이는 협동과 사냥감에 대한 공정한 배분이 없이는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공감과 협동적 능력은 사회적 규모가 커지고 국가라는 공동체적 형태를 갖추면서 비로소 도덕과 규범 그리고 정의라는 주제로 전환된다. 기축의 시대로 알려진 BC 4~6세기 전후에 부처와 공자, 소크라테스 등 현자들이 등장한 것은 단순히 우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의 역사는 집단생물학적 영역에서 정치경제와 문화사회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위에 언급한 슈테판 클라인의 저서에는 여러 가지 실험과 사례를 나열하고 있지만, 사회생물학적 결론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진화의 과정을 거친 현재의 인간은 상황에 의존하는 조건부적인 이타주의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 속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류라는 집단은 스스로 상황과 조건을 마주하며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개인적 삶과 사회 및 역사의 내용을 대자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도와 법규를 통하여 구속적 조건을 형성해온 것이 정치경제적 주제가 되고, 제도 밖에서 상황의 흐름을 형성해온 것이 문화적 도덕과 사회적 규범이 되는 셈이다. 이 글의 시작에 언급한 브루노 교수의 천당과 지옥의 비유가 도덕과 사회적 규범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면, 다양한 게임이론과 오스트롬 교수의 주장은 시스템적 규칙 및 공동체적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만여 년간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류 종을 지켜온 협력과 공유의 진화적 과정을 벗어나, 근세 수백 년은 자본주의를 통하여 사회경제 시스템에서 자본의 자기증식이 중심축을 형성하고 인간이 가진 이기적 탐욕을 정당화하는 비정상적 시기였다면(신자유주의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분명코 인류라는 집단은 조만간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자동화와 초연결과 더불어 인공지능으로 상징하는 제4차 산업혁명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지식이 자본을 대체하여 경제 활동의 핵심요소로 등장하면서, 예측이 어려운 경제적 환경과 급변하는 산업구조에 대응하는 해결책으로 참여와 협력 창의와 혁신 공유와 순환 생태적 지속조건 등이 다시 인류에게 미래를 향한 핵심적인 주제어로 다가온다. 이제 창의적 협력과 배분적 공유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출산율 위기에서 보듯이 양극화와 사회 불안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한국 사회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성장 지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혁신적인 조세정책을 통하여 사회안전망으로서 적정한 복지체계를 정립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특혜와 수탈로 집적된 기득권체계 중심의 물적 기반을 사회적 상속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영성적 도덕과 협력과 공유를 강조하는 공동체적 규범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촛불 혁명이 우리에게 명령한 시대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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