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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로움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을 바란다"

[시민정치시평] 외로운 사람들의 시대, 정치가 해야 할 일 上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한 이유

선거제도 개혁이 패스트트랙을 탔다. 그 과정 동안 국회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본 시민들의 마음은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한편으로는 비참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그렇게 다행이다 싶다가도 또 비참해지는 이런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직업이 '정치학자'이다 보니 궁금한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냐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란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은 소선거구제로만 대표를 선출하고 있고, 네덜란드나 스웨덴처럼 비례대표제만으로 선출하는 곳도 있다. 핵심은 선거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채택한 선거제도가 그 국가의 현실에, 구체적인 정치 및 사회적 맥락에 적합한지다.

그렇다면 소선거구제는 대한민국에 적합한 제도인가?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소선거구제 기원의 부조리, 소선구제가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있는 지역주의, 최근에는 소선거구제가 만들어내는 남성중심주의 등 다양한 이유로 소선거구제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정치 및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합당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이유다.

하지만 나 자신이 소선거구제에 대한 개혁을 원하는 이유는 좀 다르다. 이런 이유가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경쟁적 소비사회가 만드는 집단적 외로움'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을 원한다.

영국,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하다


지난해 1월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가 트레이시 크라우치를 외로움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으로 임명했다. '외로움부 장관'. 생소하고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외로움을 담당하는 장관이라니. 영국 정부는 그 근거로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보다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도 내놓았다. 6600만 명의 인구 중에 900만 명가량의 영국인들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보고서도 덧붙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외로움 따위를 다루는데, 장관이 필요하다니. 속된 말로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타고난 운명 혹은 속성의 일부라고 믿는다면 더 그럴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신이 인간에게 준 본연의 감정이라 믿는다면 더더욱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영어권에선 16세기까지 '외로움'(loneliness)이란 단어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17세기에는 있으나 잘 쓰지 않는 용어 사전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영어를 쓰는 사람만 16세기까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런 추론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다.

인간은 모두가 고독하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고독이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면, 외로움은 '소통이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고독사'라고 부르는 것의 제대로 된 이름은 '외로운 죽음'이다. 요즘 뉴스에서 이런 외로운 죽음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외로움이란 말이 고스란히 드러내듯 그들의 죽음이 제대로 된 주목을 받지 못할 뿐이다. 이런 현실을 마주할 때면 17세기 영국 사람들이 외롭다는 말을 쓰기 시작했을 때 뜻했다는 외로움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외롭다는 건, '사회가 제공하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 '외딴곳에 멀리 있어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외로운 군중,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운 사람들


17세기 사람들이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던 주된 이유는 대개 '물리적 거리'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외로워진 우리는 수많은 군중 속에 살고 있다. 아파트가 이처럼 많은 나라에서 서로 벽을 마주하고 살아도 우리는 때로 혹은 늘 외롭다.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과잉접속의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외롭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느낀다. 외로움을 느낄수록 우리는 인간이란 원래 외로운 존재라고 변명하며, 그 외로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산다. 하지만 16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애초에 타고나는 것이라 변명하는 그 외로움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놀랍게도 1950년에 데이비드 리스먼과 그 동료들은, 우리에겐 <고독한 군중>이라고 알려진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The Lonely Crowd', 바로 '외로운 군중'이다. 이 제목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는데,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외로움은 타자들 사이에서 존재할 때 더 날카롭게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스먼은 탈산업사회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타인지향형 인간으로 산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단면, 생산자보다는 소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소비사회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 '무엇을 소비하는지'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사회에 살 때, 타인이 보내는 작은 소비적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특정 가게 앞에 몇 시간을 기다리고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타인지향형 인간이 만드는 대표적 현상이다. 리스만은 이들이 '동시대인들이 보내는 신호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그 유통과정에 참여하려 한다'고 설명하며, 이런 타인지향형 인간이 미국사회를 장악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소비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을뿐더러, 반응한다고 해도 그 유통과정에 온전히 참여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선호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잃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은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런 신호에 반응하려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최소한 신호에 반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외로워진다는 사실을. 결국, 이 과정에서 소외된 수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외로워진다. 소비사회에서 '외로운 군중'은 이렇게 생겨난다.

그런데 이 외로워진 군중에 관해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이 집단적으로 외로워진 군중이야말로 20세기가 만든 급진적 악의 실체, 전체주의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외로워지는 현상이 다른 나라만의 일일까? 만약 우리도 그렇다고 한다면 질문은 명확하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것일까? 도대체 외로움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위험한 요소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선거제도 개혁이 이런 일을 다루는데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다음 칼럼에서 위 질문을 따라가 보겠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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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연구소는 참여연대 부설 연구기관으로, 참여민주사회 모델 개발, 대안 정책의 생산과 공론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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