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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양천고을에서 허준과 정선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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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초여름, 양천고을에서 허준과 정선을 만나다

2019년 6월 서울학교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 제77강은 조선시대 제6로(第六路)인 강화로에 있는 한강변의 양천고을에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숙종 2)∼1759(영조 35))과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중종 34)∼1615(광해군 7))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길목에 있는 하늘공원에서 건너편 한강변의 산봉우리들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하늘공원에 펼쳐진 광활한 초여름의 시야Ⓒ마포구

서울학교 제77강은 2019년 6월 2일(일) 열립니다(현충일 연휴 관계로 첫째 주 일요일로 당겨 엽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역(6호선) 1번 출구 지상에 모입니다(찾아오시는 방법 : 지하철은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1번 출구, 버스는 710번(간선), 7019번(지선), 7715번(지선)을 이용, 월드컵경기장 동문쪽으로 오십시오.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 240).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암동 올림픽경기장역-하늘공원-전망대(양천고을 조망)-노을공원 아랫길-생태습지공원-가양대교-광주바위(광제바위)-허가바위(공암)-허준기념관-점심식사 겸 뒤풀이(<양천골해정갱>에서 야채전, 막걸리를 곁들인 양반효종갱 또는 황태해장국)-양천읍치구역터-겸재기념관-양천고성지-소악루-양천향교-양천향교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서울학교 6월 답사로ⓒ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강화로의 길목이면서 한강변 풍광 좋은 곳
조선시대의 6대로(六大路)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종단, 횡단하는 간선도로로서 삼남로(三南路)는 전라도 해남과 경상도 통영까지, 영남로(嶺南路)은 경상도 동래까지, 평해로(平海路)는 강원도 강릉 지나 경상도 평해까지, 경흥로(慶興路)은 함경도 경흥까지, 의주로(義州路)은 평안도 의주까지, 강화로(江華路)는 강화도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화로는 한양도성을 벗어나 양화진(楊花津)에서 배로 한강을 건너 양천, 김포, 통진, 강화, 그리고 교동도까지 이어지는, 한양에서 서쪽으로 난 간선도로인데 양천고을은 그 길목이면서 한강의 남쪽 연안에 자리 잡고 있어 반대편인 강북에서 바라다보면 한강 너머로 확 터인 시계(視界)가 확보되어 총체적으로 풍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악양루 옛 터에 새로 지은 소악루Ⓒ서울학교

하늘공원, 억새의 향연
그래서 부득이 지금은 한강 하류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되어 있는 옛날의 난지도에서 양천고을을 조망하며 인문지리적인 교양을 쌓고 가양대교를 건너가 조선시대 때 양천고을의 읍치구역과 허준과 정선의 자취를 더듬어 볼 예정인데, 특히 하늘공원에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거리는 억새의 향연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은 지금은 두 개의 산봉우리로 보이지만 본래는 삼각산의 문수봉, 비봉, 수리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서쪽 능선으로 흘러내린 물길인 불광천과 남동쪽 능선으로 흘러내린 홍제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었던 퇴적층으로 형성된 난지도(蘭芝島)라는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아름답던 섬 난지도
홍제천은 다른 이름으로 모래내[沙川]라고 불릴 만큼 많은 모래들이 흘러왔던 곳으로 하구(河口)에 와서 한강의 거센 물살에 주춤하며 그 모래가 쌓여 난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난지도는 난(蘭)과 지초(芝草)가 자라던 아름다운 섬이라 해서 난지도라 불렀고 섬의 모양이 오리가 물 위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오리섬 또는 압도(鴨島)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웠던 난지도에 1977년 제방이 만들어지고 1978년부터는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섬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산업폐기물과 서울시민들이 배출한 쓰레기를 15년간이나 버린 양이 8.5톤 트럭 1300만 대 분량에 이르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거대한 두 개의 산봉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1991년 새로이 김포에 쓰레기 매립지가 생기면서 1993년부터 난지도의 쓰레기 반입은 중단되었으나 쓰레기에서 배출되는 많은 공해물질로 몸살을 앓아오다가 다행히 지금은 자연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동쪽의 봉우리는 하늘공원이란 이름을 얻어 억새밭이 되었고, 서쪽 봉우리는 골프장을 개장했다가 어려 문제가 발생하자 지금은 잔디를 활용한 가족 캠핑장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노을공원이란 이름으로 시민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궁산에서 바라본 한강과 삼각산Ⓒ서울학교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양천고을
양천고을은 한강 남쪽에 위치하면서 강변의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선상시회(船上詩會)도 즐기고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또한 관악산과 어깨를 기대고 있는 삼성산(三聖山)에서 발원하여 의왕에 있는 백운산(白雲山)에서 흘러내린 학의천(鶴儀川)과 군포의 수리산에서 흘러내린 산본천(山本川)이, 안양시 석수동에서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소금창고가 있던 염창나루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안양천이 주위의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삼성산의 안양사(安養寺)에서 발원하였다 하여 안양천이라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대천(大川) 또는 기탄(岐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다녔던 양화진에는 양화대교가 놓였고 그 양화대교 남단을 양평이라 하였는데, 양평(揚坪)이란 지명은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양화진의 ‘양(楊)’자와 벌판을 뜻하는 ‘평(坪)’자를 합쳐진 것으로 지금은 양평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양평동은 인접한 당산동, 도림동과 함께 1960년대부터 섬유와 식품을 중심으로 한 노동집약적 소규모 공장이 발달된 곳입니다. 특히 양평동은 먹을 것이 귀했던 1960년대에 맛있는 과자를 생산했던 해태제과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공장은 허물어지고 그곳에 새로운 대규모 빌딩을 지으려다가 해태제과의 몰락으로 공사는 중단된 채 철골 구조물만 6, 7년째 을씨년스럽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가 최근에 주상복합 건물이 새롭게 들어섰습니다.

선유봉은 모래밭인 선유도에 솟아 있던 두 개의 암봉
양천고을에 지금껏 남아 있는 한강변의 산봉우리는 상류로부터 선유봉(괭이봉), 쥐봉, 증미산, 탑산, 궁산, 개화산이 있는데, 예전의 아름다웠던 풍광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모두 파헤쳐져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산봉우리들도 옛 모습을 거의 잃어버리고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모래밭인 선유도(仙遊島)에 솟아 있던 해발 40여m의 두 개의 암봉(岩峰)으로 그 절벽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고 봉우리의 모양이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괭이봉이라고도 하였는데 선유봉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암벽에 ‘지주(砥柱)’라는 글자를 새겨 지주봉(砥柱峯)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선유도와 인접했던 양평 동쪽 양화도(楊花渡)나루 사이에 백사장이 많고 수심도 낮아, 건기(乾期) 때는 걸어서 건널 수 있었고 마포와의 사이엔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하여 강상(江上)에 취흥을 돋우는 배를 띄우곤 하였습니다. 특히 왕위를 세종에게 양보하고 명산대천의 자연풍광을 즐겨 찾았던 양녕대군은 말년에 여기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 하며, 겸재 정선은 1741년경에 선유봉을 배경으로 <양화환도(楊花喚渡)> <금성평사(錦城平沙)> <소악후월(小岳後月)> 등 3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 섬에는 30여 가구가 살며 주로 농사를 짓고 양화나루 터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이어 갔으나 1925년 을축(乙丑) 대홍수 때 많은 피해를 입어 이주가 시작되었고 1930년대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치루기 위해 김포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이곳에 채석장을 열었으며 미군정 시기에도 비행장 건설과 도로 개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석재를 채취하였고 박정희 정권 때는 한강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강변북로 사업에 필요한 모래를 선유도에서 마구잡이로 채취하여 아름다운 선유봉은 본래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조그마한 섬으로 전락하여 영등포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정수장이 쥐봉 아래로 옮겨감에 따라 그곳은 선유도생태공원으로 거듭났습니다.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쥐봉
쥐봉은 안양천(安養川)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으며 괭이봉(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으로 먹이를 앞에 두고 있던 쥐가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 같은 모양을 하였다고 쥐봉이라 불렀습니다. 조선 숙종 때 첨중추부사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함으로써 진주 강씨의 묘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쥐봉의 남쪽 기슭에는 인공폭포를 조성하여 지금도 여름이면 장쾌한 물줄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월드컵대교 공사로 인공폭포를 없애고 쥐봉의 산자락을 원형복구하고 있습니다.

증미산(甑美山)은 염창동 끝자락에 솟아 있는 시루같이 생긴 돌산으로 달리 군자봉이라고도 합니다. 서쪽의 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양동과 동쪽의 쥐봉을 중심으로 형성된 염창동을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하며 서해 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天日鹽)을 한양에 공급하기 위하여 배로 싣고 올라와 도성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보관하던 창고인 염창(鹽倉)이 있었던 곳으로 염창동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탑산 아래 구멍바위[孔岩]는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서울학교

탑산, 양천 허씨의 발상지
탑산(塔山)은 양화나루(楊花津)보다 더 하류에 있는 공암나루[孔岩津]에 있는 산으로, 나루에 있는 산이라 진산(津山)이라고도 부르며 산에 오래된 탑이 있어 탑산이라고 합니다만 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탑산 아래에는 자연동굴처럼 생긴 구멍 뚫린 바위가 있는데 ‘구멍 난 바위’라고 구멍바위[孔岩]라고도 하고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허가(許哥)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설화 때문에 이곳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부르기도 합니다.

공암나루[孔岩津]라는 지명도 ‘구멍 뚫린 바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탑산 바로 옆 강물 속에 서 있는 두 개의 바위는 경기도 광주(廣州) 땅에 있었던 것이 큰 홍수로 떠 내려와 공암나루 근처에 걸려 지금에 이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광주바위로서 달리 광제바위[廣濟岩]라고도 부르는데 그 뜻을 새겨보면 한강변에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가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보입니다.

허준의 파격적인 승진과 <동의보감>
허준은 양천 허씨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서얼(庶孼)이라는 출신 성분을 극복하며 출세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된 것은 조선시대에 개인의 일기로는 가장 방대하며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은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저술한 선조 때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의 만남 때문입니다.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허준이 치료하여 완치되자 이때부터 허준을 신임한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천거하여 내의원 의원이 되었습니다. 2년 후에는 종4품의 내의원 첨정(僉正)이 되었고 당시 의과를 장원급제하면 종8품의 관직이 주어졌다고 하니 서자 출신의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당시 왕자였던 광해군의 두창(痘瘡 천연두)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의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임진왜란 중에 다시 광해군의 병을 고쳐 양반 중에 문관을 뜻하는 동반(東班)에 올라 명실상부한 양반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 한 호종공신(扈從功臣) 열일곱 명 중의 하나인 허준에게 다시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습니다만 대간들의 반대 상소로 보류하였다가 죽은 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습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선조의 지나친 총애에 시기를 하던 신료들이 책임 어의(御醫)로서 그 죄를 물어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으며 이때 많은 의서(醫書)들을 집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東醫寶鑑)>입니다.

1610년에 완성된 <동의보감>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의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국내에서는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습니다.

그리고 허준은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임원준(任元濬)의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전염병을 구료하기 위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 1권과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였으며 <맥결집성(脈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도 남겼습니다.

이러한 허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탑산 아래 그의 호를 딴 구암공원을 조성하고 허준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천향교Ⓒ서울학교

궁산에 있는 양천향교
궁산(宮山)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鎭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이 담당한 다양한 역할 때문에 여러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궁산(宮山)은 공자(孔子)를 배향(配享)하는 양천향교가 있는 곳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의미로 궁산이라 했습니다. 파산(巴山)은 삼국시대 이곳의 지명이 제차파의(齋次巴衣)라서 파산이라 했는데 제차(齊次)는 갯가, 파의(巴衣)는 바위로 ‘갯가에 바위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양천고을의 옛 이름을 파릉(巴陵)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성산(城山)은 산 위에 삼국시대에 쌓은 옛 성터가 남아 있어 성산이라 했고 이 산성은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 파주의 오두산성(烏頭山城)과 함께 삼국시대에 한강 하구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 건너 고구려의 행주산성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던 한성백제의 산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행주산성으로 옮겨서 행주대첩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제 때 김포비행장 개설공사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이 주둔하여 궁산은 원형이 철저하게 훼손되어 옛 성터의 흔적인 적심석(積心石)과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약간의 석재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산(關山)은 한강을 지키는 빗장의 역할을 했다고 ‘빗장 관(關)’자를 써서 관산이라 했고 진산(鎭山)은 양천고을의 읍치구역으로 관치시설들이 들어 서 있었기 때문에 진산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준 명칭은 궁산이라고 합니다.

서울의 유일한 향교
궁산 아래 있었던 읍치구역(邑治區域)에는 관아 터가 남아 있고 궁산에 기대어 양천향교가 복원되어 있는데 양천향교는 전국 234개 향교 중에서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입니다. 조선 태종 12년(1411)에 창건된 것을 지난 81년에 전면 복원하여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과 부속건물 등 8동이 전해지고 있으며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궁산에는 한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정자가 지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중국 동정호(洞庭湖)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버금간다고 붙여진 악양루라는 정자가 제일 유명하였습니다. 영조 때 이유(李楡)는 악양루 옛 터에 ‘다시 지은 작은 악양루’라는 뜻의 소악루(小岳樓)를 짓고 명사들과 풍류를 즐겼고 겸재 정선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자주 이곳에 올라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작품이 <한수주유(漢水舟遊)>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소악루(小岳樓)의 유래
특히 소악루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岳樓淸風]은 양화강의 고기잡이 불[楊江漁火], 목멱산의 해돋이[木覓朝暾], 계양산의 낙조[桂陽落照], 행주로 돌아오는 고깃배[幸州歸帆], 개화산의 저녁 봉화[開花夕烽], 겨울 저녁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寒山暮鐘],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二水鷗眠] 등과 더불어 파릉팔경(巴陵八景) 즉 양천고을의 팔경 중의 하나였습니다.

겸재 정선은 조선의 고유한 특성을 마음껏 드러낸 문화절정기인 진경시대에 우리 고유화법을 창안하여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완성자입니다.

진경시대는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는 125년간의 기간으로 조선이 개국이념으로 삼은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거듭나는 시기로서 이때에 중국의 문화를 추종하던 관례를 깨고 조선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는데 회화에서는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 글씨에서는 ‘동국진체(東國眞體)’ 시문에서는 정조의 문체반정을 불러온 ‘신체문(新體文)’이 유행하게 됩니다.

한강의 풍광 많이 남긴 정선
정선은 1740년 양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진경시(眞景詩)의 태두 이병연(李秉淵)의 시문(詩文)과 자신의 그림을 바꿔 보자고 약속하고 한강 주변의 많은 풍광들을 그렸습니다. 이병연은 목멱산의 아침 해돋이를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에 대한 화답으로 시를 짓고 안산의 봉화대를 바라보고 있을 정선을 생각하며 <안현석봉(鞍峴夕烽)>이라는 시도 짓습니다. 정선과 이병연은 진경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료이기도 합니다.

정선이 남긴 진경산수에는 북쪽으로는 함흥, 남쪽으로는 포항까지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방방곡곡의 절승(絶勝)과 명소가 두루 담겨 있는데 정선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선생은 정선의 진경산수를 지역에 따라 크게 다섯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금강산(金剛山)과 옹천, 총석정, 통천 등 동해 바다 주변을 그린 동해승경(東海勝景), 한강가에 배를 띄우고 바라 본 풍경들을 그린 한수주유(漢水舟遊), 인왕산 등 한양의 명승을 담은 한양탐승(漢陽探勝), 한양 바깥의 명승지를 그린 경외가경(京外佳景) 등이 그것입니다.

정선은 백악 아래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주변인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집안은 그를 후원했으며,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씨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습니다.

또한 정선은 안동 김씨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도 받았는데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정선의 관직 진출은 40대 이후로, 1721년(경종 1)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간 근무한 후 1726년(영조 2) 임기를 마쳤는데 이때의 작품으로는 성주관아(星州官衙)의 정자(亭子)를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가 전합니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仁王谷)으로 이사를 하여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입니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습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영조 대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이 증명해 주고 있는데 1729년 처음으로 영조의 부름을 받아 한성부 주부가 되었고, 1733년에는 청하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린 그림으로는 <청하성읍도(淸河城邑圖)>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이 있습니다.

정선의 나이 65세부터 70세까지인 1740년부터 1745년까지는 지금은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후 10여 년 동안은 관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의 명작을 남겼고 79세인 1754년에 종4품인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거쳐 1756년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니 관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산(開花山)은 달리 주룡산(駐龍山)으로도 부르는데 그 모양이 코끼리를 닮아 강 건너에 있는 사자 모양인 덕양산(행주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류에 포진하여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양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의 산세라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 온 봉수를 받아 목멱산(木覓山)의 경봉수(京烽燧)에 전달하는 봉수대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을 닦느라 그 터마저 흔적 없이 사라졌고 지금껏 군사시설이 산 정상에 들어서 있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6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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