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랩(Living Lab)이 인기 폭발이다. 당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3년에 '사회문제 해결형 기술개발사업'을 도입한 이래,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퉁부와 같은 중앙정부 부처 그리고 여러 지자체와 공공기관 등에서 '리빙랩'이라는 이름을 단 사업이나 그것을 포함시킨 사업 계획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예컨대 2018년 8월에는 행정안전부는 희망제작소와 함께 '국민해결 2018' 사업을 진행하면서, 춘천 시민들의 '시민정원 분양을 통한 공공하천 관리' 등, 총 30개 지역에서 '소셜리빙랩'을 지원하였다. 또한 국토교통부도 작년에 '스마트시티'와 관련된 대형 공모사업에 리빙랩을 포함시킬 것으로 요구했다. 지원하려는 기업 관계자들이 대체 리빙랩이 뭐냐며 논문과 전문가를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지역의 한 언론기관은 '공동체 실험공간, 리빙랩'이라는 주제로 5회에 걸쳐 기획 보도를 진행하면서, "동네문제부터 사회변혁까지"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정부 혁신 과제'의 하나인 리빙랩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리빙랩 길잡이'를 발간하였다.
그럼 리빙랩이란게 무엇일까.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제해결을 위해 시민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Living)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를 진행하는 실험실(Lab)"(2018년 4월 18일 보도자료).
외떨어진 연구실이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이루어 연구개발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살아 있는 실험실', '우리 마을의 실험실'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개발이 시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성찰이 담긴 것이다. 기업들의 투자를 제외하고도 국가연구개발비만 20조 원이 넘는 연구개발 활동이 고령화, 미세먼지, 기후변화, 식품안전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절하게 기여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 끝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리빙랩'인 것이다.
하지만 단지 연구자들이 연구실을 벗어나 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 시장, 공원, 거리, 복지시설 등에 나온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은 아니다. 리빙랩의 원조라고 평가되는 미국 MIT의 연구팀은 실제 거주하는 아파트에 설치한 센서 및 ICT 기술을 이용해 거주민의 움직임을 관찰하였다.
이때 리빙랩은 "전문가가 사용자를 관찰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거주민은 리빙랩에서 수동적인 존재이며 관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실험실의 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논의와 실행은 리빙랩을 테스트 베드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리빙랩 참여자들은 제품 사용 후기를 제공하는 정도에 머물곤 한다. 특히 연구자/기업이 주도하는 경우에.
유럽으로 건너간 리빙랩은 "사용자 참여와 혁신공동체 구성을 지향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되었다. 이제 기술의 최종 수용자가 수동적인 관찰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혁신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며 따라서 어떤 것을 연구개발해야 하는지에서부터, 연구개발과 평가까지 전 과정에 걸쳐 기술의 사용자/수용자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참여한다는 이상을 품고 있다. 리빙랩의 참여자들은 기후변화와 같은 지속가능성 문제의 해결을 염원하는 이들로서 사회적 변화를 추동할 지혜와 힘을 가진 이들로 간주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리빙랩의 목표가 단순한 단위 기술/제품의 개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미세먼지를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실외 공기청정기를 개발할 것인지 아니면 교통시스템을 개편할 것인지 등 해결 방향을 설정하고, 또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연구개발 진행하는데 시민들이 참여하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최종 사용자와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개방형 연구개발 추진 체제"라는 리빙랩 정의가 보다 바림직할 수 있다.
게다가 리빙랩은 단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그 제품이 시장에서 살아남고 확산될 수 있을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전환이론'의 여러 연구들은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시스템적인 문제이며, 한 두 개의 기술적 요소의 교체만으로 해결되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혁신적인 기술이 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사회 제도, 규범, 문화, 인프라 등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리빙랩은 단순히 사용자의 행동패턴이나 선호를 관찰하도록 허용하는 것도 아니며, 제품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능동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넘어서서 스스로 사회 규범과 문화를 바꾸고 제도와 인프라의 변화를 촉구하는 거대한 시스템 변화의 발화점이 되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에서도 리빙랩은 중요한 역할을 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 전환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적 방향이라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변화를 이뤄 내는 데는 여러 장애물이 놓여 있다. 예컨대 에너지 효율적인 제품이나 재생에너지 기술이 생각보다 빠르게 확산되지 않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최종 구매자/소비자의 입장에서 이 제품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어떤 구매 장벽을 느끼고 있는지를 분석하는데 리빙랩을 활용해볼 수 있다. 에너지기술평가원의 지원으로 서울 성대골 에너지자립마을에서 2016~2017년에 진행했던 '도시지역 미니태양광 리빙랩' 활동을 통해서 이미 성공적인 선례가 만들어진 바 있다.
이 리빙랩의 연구책임자로서 여러 배움이 있었다. 핵심적인 두 가지. 하나는 전문가의 세계와 시민/주민들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외계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단층이 놓여 있으며, 이를 간과해서는 원하는 목표를 달서할 수 없다. 리빙랩의 성공은 이들 사이에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내는데 달려 있다. 사실 이것을 쉽게 해결하기 힘드니, 연구자들은 사용자/주민들을 그저 관찰대상으로만 참여시키고 마는 것이다. 리빙랩 수행자들은 '주민조직가'와 같은 자질을 갖추고 또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둘째, 국지적으로 이루어진 리빙랩 활동은 일종의 '전환 실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성공적인 리빙랩에서 얻어진 성과물(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 개선이 필요한 제도, 변화되어야 할 문화와 규범 등)은 해당 지역 혹은 공동체를 넘어서,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소위 스케일-업).
그러나 성대골 리빙랩에서 나온 두 가지 혁신적인 상품과 금융 서비스('미니태양광 DIY 상품'과 '우리집 쏠라론')은 제도 장벽과 관련 기관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성대골 지역에서만 활용될 뿐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전환 실험의 성과를 평가하고 학습하여 확산하기 위한 기제에 대해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간한 '리빙랩 길잡이'에서 정부부처와 연구지원기관이 해야 할 일로서 강조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한다.
성대골 리빙랩도 진화중이다. 리빙랩 경험은 지역 내에서 다음 전환 실험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리빙랩에 참여한 '마을연구원'들의 일부는 성대시장 에너지 자립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좌충우돌의 실험은 일부 성공도 있었지만 여러 실패도 경험했다. 그러나 진화를 거듭하면서, 에너지 전환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발전소 사업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성대골 에너지협동조합'을 결성하고 한국에너지공단이 지원하는 '동작 가상발전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기업들과 주민들의 '외계어'를 상호 통역해가면서 학습하고 협력을 일구고 있다. 동작구 건물과 옥상에 태양광 발전설비와 ESS 설치 장소를 섭외하고 십시일반 자본을 모으는 중이다.
딱히 리빙랩이라는 이름을 걸지 않았지만, 성대골 주민들은 리빙랩을 일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내면화하면서 에너지 전환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험, 성공과 실패 등이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정부와 지자체들이 해야 할이다. 분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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