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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한 반문명 위에 서 있는 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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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징글징글'한 반문명 위에 서 있는 자유한국당

[민교협의 시선] "자유한국당의 반복되는 반인륜성, 거룩한 분노가 필요하다."

지난 2월 8일 자유한국당이 개최한 이른바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가 늦겨울의 한국사회를 정치적 대결국면으로 몰고 갔다. 주지하는 것처럼, 김순례와 이종명 의원의 발언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김순례 의원은 "종북좌파들이 지금 판치면서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면서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 5·18 유공자, 그 헛되게 돼 있는 모든 국민의 피땀 어린 혈세를 가지고 그들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5·18 유공자를 다시 한 번 색출해야 한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종명 의원은 "5·18을 정치적, 이념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폭동이 민주화운동이 됐다. 그렇게 될 때까지 10년, 20년 밖에 안 걸렸는데 5·18 폭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다. 그럼 다시 한 번 뒤집을 수 있는 때가 됐다. 국회를 토론의 장으로 5·18 때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것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그런 역할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외쳤다.

반역사적이고 반사실적인 이들의 언어행위는 즉각 여론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자유한국당은 내부 징계를 약속했지만 예상대로 그것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수사에 그치고 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그와 같은 반윤리성과 왜곡주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5주기에 대한 발언에서 한층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유한국당의 차명진 전의원은 유가족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의 언어는 야만성 그 자체였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쩌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유가족은 자식의 죽음을 팔아 돈을 챙기는 욕망의 화신으로, 박근혜와 황교안을 포함, '무고한 사람들'에게 책임과 죄의식을 전가하는 파렴치한으로 묘사되었다. 그에 더해 같은 당 정진석 의원은 "세월호 그만 우려 먹으라 하세요...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죠...이제 징글징글해요"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받은 메시지라고 했지만 그건 무의미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한 학회에서 '제8회 국회를 빛낸 바른정치언어상'에 참석해 '품격언어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차명진 의원 페이스북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자유한국당의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5·18 희생자들을 괴물로 묘사한 김순례 의원이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국가적 보상의 과도함을 주장하면서 '시체장사'라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언어폭력을 자행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나아가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40여 일 동안 단식한 유가족 앞에서 피자, 치킨을 먹으면서 그를 조롱한 극우집단의 민낯이 자유한국당이 자행한 정치적 야만성의 전조였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과 한국의 극단적 보수들의 참을 수 없는 혐오발언의 잔인성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안을 단순히 일회적인 에피소드로 넘길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e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그들의 기념비적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치의 반문명적 만행의 근본 원인을 통찰했다. 두 사람은 '이디오진크라지'(idiosincrasy)라는 개념을 통해 집단적 광기를 진단했다. "개념적 질서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합목적적인 것으로 정화될 수 없는 자연, 예를 들어 석판 위에서 조각칼이 내는 날카로운 소리, 똥이나 부식물을 연상시키는 퇴폐 취미, 근면한 일꾼의 이마에 돋아 있는 땀방울 같은 것"(<계몽의 변증법>, 한국어판, 270)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이 이디오진크라지다.

그러니까 이디오진크라지는 이질적인 것, 다른 것에 대한 거부이자 동일화를 향한 욕망이다. 동일화되지 못하는 또는 동일화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혐오적 반응으로서 이디오진크라지는 이질적인 것들을 동일성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점에서, 그 이질적인 것들이 동일화에 저항하면 그것들을 부정하고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만약 이디오진크라지의 주체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동일화를 향한 물리적 폭력이 난무할 것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질적인 것들을 부인하고 비존재로 만들려는 언어적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히틀러에게서 이디오진크라지의 궁극적 대상은 유대인들이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존재를 언어적으로 철저히 부정해왔고, 권력을 장악하고 나선 물리력으로 그들을 절멸하려 했다.

유대인들을 향한 히틀러의 혐오주의 속에서 우리는 독일 나치즘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지향의 본질을 만난다. 유대인들에 대한 본능적 거부와 폭력은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이 혈통주의와 종족우월주의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적 혐오는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이데올로기 신봉자라는, 미래와 진보에 맞선 퇴행적 존재라는 선언이었다.
한국의 극단적 보수가 드러내고 있는 이디오진크라지의 대표적인 대상이 5·18 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사라는 사실을 그들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김순례 의원은 5·18을 언급하면서 "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논리는 결국 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다면 5·18 민주와운동과 세월초 참사 희생자들이 단순히 언어적으로 부정되는 데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케 한다. 우리는 이미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그와 같은 비극적 상황의 단초를 보았다.

5·18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부인하고, 죽은 자들의 성스러운 희생을 오염으로 물들이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인륜을 저버린 존재들로 격하하는 그들의 태도는 한국의 극우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자양분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5·18 민주화운동의 본질은 군사력을 동원해 국가권력을 탈취하고자 했던 반헌정주의,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었다.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존엄성 부정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한 정치적, 인간적 신성함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들이 반민주주의, 정치적 부정의, 극단적 야만, 반휴머니즘을 숭배하는 자라는 자기고백이다. 또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을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철면피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그들의 언어는 자신들이 반문명의 가치 위에 서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의 생존과 필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근대 계약론적 민주주의 위기를 본질로 한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혐오적 태도는 한국의 극단적 보수가 정치적 근대성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철학자 뉴이(Glen Newey)는 정치적 관용의 실천을 위해 서로의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테두리로서 '울타리'(murality)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그 웉타리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과 존중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다. 자유한국당의 이디오진크라지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울타리 안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폭력적이고 혐오주의적인 언어가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우리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관용을 위한 울타리의 경계 짓기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자유한국당과 한국 극우의 이러한 혐오주의를 정치적 관용의 이름으로 언제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존재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관용의 원리가 그러한 그 원칙을 지키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가?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관용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용으로 맞설 것을 그는 역설했다. 마르쿠제는 퇴행적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가하는 폭력과 그들에 대한 거부와 저항으로서의 폭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의 것은 부당하고 뒤의 것은 정당하다. 역사적 진보와 보편적 인륜성을 거부하는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하다. 그것은 권력을 빼앗긴 이들의 정치적 박탈감에 기인하는 병리적 분노와는 다른 '거룩한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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