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들은 종종 보건의료 체계 '바깥에' 존재한다. 예컨대 금융시장의 규제완화는 외환위기로 이어져 1990년대 후반 한국 자살률을 급증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2007-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 상황에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재정 긴축정책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국민 건강과 보건의료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가 적지 않다(☞참고 : 유럽의 금융 위기, 긴축과 건강).
그렇다면 사회적 보호를 촉진하는 정책들은 건강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까? 미국 하버드 대학과 영국 뉴캐슬 대학의 공동 연구진이 최근 국제학술지 <역학과 지역사회 보건 저널(Journal of Epidemiology and Community Health)>에 발표한 논문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연구팀은 본래 건강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고용을 증진하고 아동 돌봄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본래의 목표를 넘어 건강에도 긍정적 효과를 미칠 수 있는지, 특히 그러한 효과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고자 했다(☞논문 : 사회투자로부터 누가 이득을 보는가? 유럽에서 심혈관질환에 대한 가족과 고용정책의 젠더화된 효과).
연구팀은 2005~2010년 동안 유럽 13개국(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영국)의 사회정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심혈관질환에 대한 세계질병부담 연구> 자료를 이용하여 사회정책 지표가 25~64세 성인 남녀의 심혈관질환 이환(YLD, years lived with disability)과 사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연구팀이 심혈관 질환에 초점을 둔 것은 이들 국가에서 사망의 중요한 원인이자, 고용조건이나 근로환경과의 연관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안정 고용이나 직무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이 심혈관질환의 위험을 높인다는 이제 상식에 통한다. 또한 심혈관질환 문제에는 성별 차이가 있다. 남성이 심혈관질환에 더 많이 걸리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심혈관 질환 환자 수 자체는 여성이 더 많다. 또한 고소득국가에서 심혈관질환 발생율이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여성의 감소는 더딘 편이다. 여성의 경우 직무 요구도가 높고 돌봄 노동에서 전통적 젠더규범이 강한 경우, 일-가정 양립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미비한 경우에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높다.
분석에 포함된 사회 정책은 주로 고용과 가족 정책이며, 다음과 같은 여섯 개 지표를 활용했다. ①공적 고용서비스와 행정에 대한 정부 지출, ②민간 부문 고용 인센티브를 위한 정부 지출, ③직업 훈련에 대한 정부 지출, ④초기 아동 교육과 돌봄에 대한 정부 지출, ⑤유급 부모 휴가 주 수, ⑥유급 부모 휴가에 대한 정부 지출이 그것이다.
연구팀은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부모 휴가, 조기 아동 교육과 돌봄 정책은 남성보다 여성에서 심혈관질환 이환과 사망률 감소 효과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둘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성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타낼 것이다. 우선 고용 훈련 프로그램과 고용 보조금은 기존에 노동시장에서 불이익을 받던 여성들에게 상대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에 여성의 심혈관질환 감소에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반면 공적 고용과 행정 서비스(실업 센터, 구직 서비스)는 남성의 이용률이 높기 때문에 남성의 심혈관질환 감소에 보다 유익할 것이다.
분석 결과 심혈관질환 이환에 대해 고용 인센티브, 조기 아동교육과 돌봄, 부모 휴가 정책 등이 여성에게 보다 강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망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관찰되었다.
고용 훈련에 대한 정부지출 증가와 유급 휴가 주수는 여성의 심혈관질환 사망률 감소와 관련 있었고, 남성에서는 유의한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추정 모형에 따르면, 고용훈련에 대한 정부 지출이 1표준편차만큼 (국민 1인당 미화 65.07달러) 늘어나면 여성 사망률의 표준편차가 0.056 감소했다. 이는 10만 명 당 사망자 수 4.98명의 감소에 해당한다.
한편 공적 고용에 대한 정부 지출은 남성의 심혈관질환 사망률 감소에 효과가 있었으나 여성에게서는 유의하지 않았다. 남성의 경우, 공적 고용에 대한 정부 지출이 1표준편차(미화 36.81달러) 늘어날 때마다 사망자 수가 10만 명 당 6.14명 감소했다.
그리고 조기 아동 교육과 돌봄에 대한 정부지출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서 심혈관질환 사망률을 감소시켰다. 이를테면 정부지출이 1표준편차(1인당 미화 161.94달러) 늘어나면,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10만 명 당 사망 숫자가 남성은 9.25명, 여성은 8.27명 감소했다. 남녀 간의 차이는 유의하지 않았다.
유급 부모 휴가에 대한 정부 지출 증가는 남녀 모두에서 심혈관질환 사망률 감소와 관련 있었고, 그 효과는 여성에서 더욱 컸다. 예컨대 정부지출이 1표준편차(미화 110.4달러) 늘어나면,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10만 명당 사망자 수가 남성 23.75명, 여성 27.22명 감소했다.
종합하자면, 이러한 사회정책들은 심혈관질환 사망률을 감소시키는데 기여하며, 그 효과는 정책 내용에 따라 성별화된 효과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연구팀도 지적하고 있듯, 사회투자 형태의 '적극적' 복지정책, 노동자의 인적 자본을 강화하는 정책은 실업급여 같은 전통적 복지정책의 후퇴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복지 국가의 '재상품화'는 건강불평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 결과를 해석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복지지출 수준 자체가 워낙 낮기 때문에 '후퇴'나 '재상품화' 문제를 지적하기에도 좀 민망하다. 예컨대 2015년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사회지출 비율은 10.2%로 OECD 회원국 중 멕시코를 제외하고 가장 낮다. 하지만 오늘 소개한 연구결과가 보여주듯, 사회정책은 본래의 직접 목표를 넘어서 건강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정책, 젠더 형평성을 고려한 사회정책을 요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분명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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