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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협약, 이것도 비준 못한다면 '노동탄압국'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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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협약, 이것도 비준 못한다면 '노동탄압국' 맞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그냥 한번 읽어보자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의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러니까 1919년 3월 1일에 나온 ‘독립선언문’이다. 애초에 한자가 많이 섞여 있는 문장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약 2000 글자 안팎의 선언문 일부분만 인용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넘치고 절도가 있다. 그리고 글만 읽을 줄 안다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과 ILO 제87호 협약

3.1 독립선언문이 발표되던 같은 해에 국제노동기구(ILO)가 결성되었다. ILO는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 국제노동기준으로 189개의 협약(Convention)을 만들어 왔다. 그 협약들 중 핵심 중의 핵심이 바로 ‘결사의 자유 협약’이라 불리는 87호와 98호 협약이다.

그 중 먼저 만들어진 것이 제87호 협약인데 1948년 6월 17일에 의결되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인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바 있다. 그리고 제정 헌법에는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하였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한 달 터울을 두고 태어난 대한민국 헌법과 ILO 제87호 협약은 ‘결사의 자유’를 담았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한글로 바꿨을 때 1000글자밖에 되지 않는 제87호 협약은 3.1 독립선언문처럼 쉽고 간명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넘치고, 초등학교 교육만 마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져와 봤다. <인사이드 경제> 독자들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말이다. A4 용지로 따지면 1페이지 안에 쏙 들어온다. 별도의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쉽다. 부록이나 부속 협정서가 있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간단한 '전문'이 있을 뿐 아래 내용이 ILO 제87호 협약 내용의 전부이다.


너무 쉬워서 이해가 안 된다. 왜 비준 못해?

87호 협약이 만들어진지 꼭 1년 뒤인 1949년에는 ‘단체교섭 협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98호 협약이 만들어진다. 98호 협약의 내용 역시 매우 쉽고 간명하며, 심지어 87호 협약보다도 짧다. 87호, 98호 협약 2개를 합쳐도 3.1 독립선언문보다 분량이 길지 않다. 마찬가지로 98호 협약 역시 <인사이드 경제>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한글 번역본을 가져와 보았다.


사실 87호와 98호 협약 중에서도 핵심 원리를 담은 조항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훨씬 짧은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있다.

△ 노동조합 설립과 운영, 계획 수립과 활동, 지도부 선출 등은 노동조합 스스로의 규약으로 정할 문제이다. △ 국가기관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국가기관은 이들 단체의 활동에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더더구나 해산시켜서도 안 된다. △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되며, 정부는 노사 간 자발적 교섭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쉽고 상식적인 원리들조차 비준하지 못한다면 ‘노동탄압국’의 멍에를 벗기 어렵다. 아니, 과연 문명국가라고 말할 수 있기나 할까?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비상식적 적폐정권을 1700만 촛불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등장한 정부 아니던가.

이토록 쉽고 간명한 원리를 비준하지 못한다? 그럼 문재인 정부는 노동조합 설립은 허가제로, 노조활동은 물론이고 각종 임원 선거에 모조리 개입하고, 정부 입맛에 안 맞는 짓을 하면 해산명령도 불사하며, 노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자가 조합원에게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주는 짓을 방치하겠다는 말인가?

ⓒ청와대

ILO 협약 읽기 운동, 전사회적으로 펼쳐보자

그래서 <인사이드 경제>는 독자들에게 이런 걸 제안해보고 싶다. 189개에 달하는 모든 협약까지는 욕심 내지 말고, 핵심 중의 핵심만 간추린 ILO 제87호와 98호 협약을 널리 퍼뜨리자고 말이다. 2개 협약을 합해서 2000자를 넘지 않으며, A4 용지로 인쇄하면 양면으로 한 장 안에 모두 들어간다.

각급 노동조합은 이걸 A4 한 장짜리로 인쇄해서 조합원들에게 나눠주자. 아니, 굳이 조합원들로 한정할 이유도 없다. 비조합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 아닌가. 아직 노조를 갖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나눠주자. 일터의 모든 노동자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지지할 만한 내용이니까.

노동기본권을 부당하게 박탈당하고 있는 교사 여러분도 이 운동에 참여하자. ILO 협약의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 아닌가. 국어 선생님들이라면 학생들과 함께 읽을 좋은 지문이 되어줄 수 있다. 원문인 영문도 정말 힘이 넘친다. 영어 선생님들도 학생들과 함께 영어로 읽어보자. 한국사와 세계사 선생님들이라면 3.1 운동 100주년과 함께 ILO 100주년을 토론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런 좋은 소재라면 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될 수도 있다. 게다가 올해는 둘 다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 해가 아니던가. 아차, 수능이라는 제도 자체가 갖는 문제점이 있으니 우리가 이걸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ILO 역사와 협약 내용이 교과서에는 실려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노동권에 대한 제도교육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공무원들도 할 수 있다. ILO 협약을 포스터로 만들어 전국 관공서 곳곳에 부착하자. 이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 그리고 미래 노동자인 청년들이 감명 깊게 읽어볼 것이다. ILO가 문재인 대통령을 100주년 총회에 초청까지 한 상태인데, 공무원들이 ILO 협약을 붙여놓는다고 상급자들이 뭐라 하진 못할 것이다.

교사·공무원들이 나서서 학교와 관공서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ILO 협약을 인쇄해서 나눠주고 함께 읽는다면 이것만큼 뜻 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결사의 자유를 함께 토론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장면이 또 있을까?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나눠주는 손피켓, 한번 쓰고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면에는 구호를 적고, 나머지 한 면에는 ILO 협약(87호이건 98호이건)을 인쇄한다면 어떨까? 간직하고 싶은 손피켓이 될 수도 있다. 혹여 버려지더라도 누군가는 주워서 주의 깊게 읽어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부채에 협약을 인쇄해서 나눠주는 것도 좋겠다.

조금만 응용하면 더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다.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은 예쁘게 대자보로 편집해 철도·지하철 역사마다 ILO 협약을 부착해 보자. 그렇다면 현수막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수막에 협약 내용을 모두 담는 것은 넌센스이니, 협약의 핵심 문구 하나씩을 넣고 이렇게 적어서 내걸어보자.

"노동자는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단체에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ILO 제87호 협약 제2조)

촛불 정부가 이렇게 상식적인 협약 하나 비준 못 하나요?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 노조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ILO 제98호 협약 제1조)
문재인 정부는 이렇게 쉬운 ILO 협약도 비준 못 하나요?
'국격’이니 ‘글로벌 스탠다드’니 떠들어대던 정치인들이 ILO 협약 비준을 반대한다면, 그런 정치인들은 1년 뒤로 다가온 총선 ‘데스 노트’에 올려야 한다.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협약 하나 비준하지 못해 국제적 망신을 사는 부끄러운 상황을 더 이상 지속해선 안 된다. 100년 전 선조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3.1 운동에 나서던 순간 독립선언문에 적었던 글귀를 다시 읽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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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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