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김대중 이사(理事)기자가 발령후 첫 칼럼을 보내왔다.
25일자 조선일보 30면에 실린 칼럼 제목은 '배신감'. 지금 미국 현지의 반한(反韓) 감정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강조한 칼럼이다.
***'점령군의 진주'를 저주하고 떠난 김대중**
김 기자가 과연 미국에서 어떤 칼럼을 보내올지는 상당한 관심사였다. 그는 출국전 편집인 자격으로 마지막 쓴 '점령군의 진주?'라는 칼럼에서 노무현 당선자측과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국민들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붓고 나갔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지금 이 땅의 분위기는 선거에서 이긴 측이 '점령군'이 되어 사회 곳곳에 진주하는 양상이다. 이런 양상은 서로의 위치에 따라 한쪽에는 통쾌한 것일 수 있고 다른 한쪽에는 통한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을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일상화돼야 하는 정권교체의 범주를 크게 일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한 사람 갈렸다고 세상이 이렇게 싹 갈리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가 싶을 정도다. 한쪽에서는 축제 만난듯 기뻐 난리이다 못해 기고만장의 분위기가 역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초상 난듯이 침울하고 거의 패닉상태에서 이민을 들먹이는 상황? 이것이 대선을 끝낸 이 시점의 대한민국 실정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상황으로는 승리한 쪽이 화합과 중용을 얘기하고 진족이 승복과 관망을 거론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잘해 보겠다'와 '지켜 보겠다'가 정권교체의 의례적인 화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세대로 갈리고 지역으로 갈려 '늙은 세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치 패잔병처럼 밀려나는 수모와 패배감에 어쩔 줄 몰라하고 '젊은 세대'는 인터넷 파워를 자랑하며 윗세대를 '변화를 모르는 수구', '현실과 타협해온 무사안일 계층'으로 몰아간다. 지역적으로도 어느 지역은 TV는 물론 신문도 안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악담을 퍼붓고 워싱턴에서 '기자'로서 글을 쓰겠다며 떠난 그이기에 과연 그가 워싱턴에서 어떤 글을 보내올지는 당연한 관심사였다.
***김대중 기자가 전한 '미국민의 배신감'**
그의 글은 일반의 예상을 뒤엎지 않았다. 김대중 기자가 쓸 글에 대한 일반의 예상은 '워싱턴발(發) 노무현 두들기기'였다. 특히 '워싱턴'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미국 보수우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공산이 농후하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제목부터가 그러했다. '배신감'. 미국인들이 지금 한국인들의 배은망덕에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가를 김 기자는 일방적으로 중계하고 있다.
김 기자는 자신이 독점취재한(?) 한 가지 '팩트'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2월과 올 1월초에 걸쳐 한국내의 반미시위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 당국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깊은 우려'와 함게 사태악화에 따라서는 '철군 불가피성'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소식통은 한 번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게, 두번째는 외교경로를 통해, 그리고 또 한번은 청와대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마도 노무현 당선자가 집중적으로 외국 기업인들과의 모임을 만들고, 미군부대를 방문하며 미국특사를 특별히 만난 것은 그 무렵 이후인 것으로 보아 우리측도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감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편 주장의 진실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당시 미국의 일부 보수논객들이 뉴욕 타임스(NYT)등 일부 미국언론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론을 편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과연 미국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철군 불가피성을 통고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기자도 노 당선자의 신속한 대응으로 "한국내의 반미 기운이 약간 소강상태에 들어서는 듯하더니 한때 긴박했던 한-미관계에 관한 예각적 관측들이 따라서 잠잠해지는 양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내 분위기는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번져나오는 한국에 대한 언급은 한국의 소강과는 달리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최근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알렌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한국정부의 '중재자 역할' 제안에 대해 '심각한 배신'이라고 극단적 용어를 썼다. 최근 미국 정계와 관계를 돌아보고 온 한 정치인은 미국 지도층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배신감을 깊이 느끼고 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의회 주변에는 한 중진 상원의원이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맨 뒤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고 의원들은 저마다 철군을 요구하는 지역주민과 미군들의 진정서를 수십통씩 받았다고 하는 말들이 공공연하다고 했다."
그는 이같이 자못 심각한 미국내 반한감정을 전한 뒤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흔히들 한국의 식자들은 미국이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이상,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미국은 비록 자신들의 결정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경우라도 여론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한 나라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신뢰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미국인들이 제일로 치는 사람은 '신념있는 사람'이다. 여간해서 '배신'을 거론하지 않지만 일단 배신을 거론하면 그 결과는 지극히 감정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코 미군철수 또는 동맹의 철회에 머물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 그 결과는 경제적 철수일 수 있으며 거래의 단절일 수 있다. 오늘의 반미와 철군 사태가 단순히 감정의 대립에 머물지 않고 한국 경제의 고립과 파국으로까지 확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떨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나라당 최병렬 의원 주장과 '붕어빵'**
김대중 기자의 이같은 글을 보면 얼핏 그가 '대단한 취재력'을 발휘해 쓴 것처럼 보인다. 워싱턴 정가의 심층부 곳곳을 탐지한 뒤 쓴 기사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어디선가 접한 내용들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름아닌 한나라당의 최병렬 의원이 김대중 기자가 칼럼을 쓰기 일주일 전인 지난 17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기 때문이다.
당시 최병렬 의원은 한나라당 단독으로 방미단을 구성해 워싱턴을 다녀온 직후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대다수 사례는 한나라당의 방미 조사결과서에도 적시된 예들이다.
"최근 미국 신문에 주한미군 관련 기사가 단골 메뉴가 됐다. 뉴욕타임스에는 주한미군들이 그동안 어떤 모멸을 겪었는지에 대해 한 페이지 반이나 났다. 물건 사러 갔다가 쫒겨난 얘기, 지나가는데 침 뱉은 얘기 등 아주 모욕적인 얘기, 성조기 불태운 얘기들이다. 신문 칼럼으로 나간 것 외에도 한국에서의 반미 감정이 TV, 라디오 토크쇼 단골 메뉴다.
또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국내 모 호텔에 묶었는데, 그 사람이 체크아웃을 하러 갔더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체크아웃을 다 할때까지 세워두고 맨 마지막으로 처리해줬다고 한다. 본인은 그것을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고 그 문제를 미국에 가서 얘기를 한 모양이다. 상원의원까지 이런 대접을 했다는 것이 미국 의회에 퍼져있다고 한다.
교포들도 불안해하고 있다. 대미수출 업체들도 혹여 불매운동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의회에도 편지가 많이 쏟아진다고 한다.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보고 왜 그런 나라에 우리 병사들을 주둔시켜야 하냐,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워싱턴에서 우리나라 여야 의원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관계 세미나가 있었다. 참석한 우리당 의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세미나 중 상하 양원 외교위원회 보좌관들과 만난 시간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쪽 보좌관들의 반응이 너무나 시니컬해서 진지한 대화가 안될 정도였다고 한다. 주한미군 철수를 원하면 언제든지 철수시킬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주한미군이 중국의 세계전략을 견제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대 아시아 전략에서 필리핀이 얼마나 중요한 기지였는데 필리핀 사람들이 나가라 그래서 하루아침에 빼지 않았느냐. 원하면 얘기하라' 이런 투의 얘기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우리 대표단이 보고 온 바를 종합해 보면 당장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정도로 급박한 위기라고 보지는 않는 듯 하다. 그러나 상황이 자칫 잘못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의회가 주한미군 철수를 통과시켜 실제로 철수하면 우리 안보만 문제가 되겠나. 경제는 또 어떻게 되겠나. 국익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반미 구호를 외치는 사람 중에 대부분은 우리가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진짜로 주한미군이 철수하겠냐는 생각을 마음속에 깔고 있을 것이다. 주한미군이 미국의 세계전략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나.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병렬 의원의 인터뷰 내용과 김대중 기자의 칼럼 내용은 '붕어빵' 바로 그것인 것이다.
김대중 기자가 자신의 칼럼에서 '최근 미국 정계와 관계를 돌아보고 온 한 정치인'은 다름아닌 최병렬의원이었고, 그가 취재한 워싱턴의 분위기란 다름아닌 최의원의 전언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최병렬 의원이 조선일보 출신이라는 점은 이같은 추정을 한층 뒷받침해주고 있기도 하다.
김대중 기자는 워싱턴에 가서는 한나라당과의 연계를 계속 갖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기자, 한나라당 '당보 기자'인가**
김대중 기자가 직접 취재를 하고 쓴 것인지, 한나라당 얘기를 전해 듣고 쓴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가 직접취재를 하든, 간접취재를 하든 진실만 전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가 특정정당의 조사결과에 기초해 어떤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에 기초해 특정정당과 동일한 주장을 편다는 것은 기자의 직업윤리상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특정정당의 '당보 기자'들이나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김대중 기자의 글은 북핵해법을 둘러싼 미국내 여러 목소리 가운데 주로 미국 공화당내 보수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공화당 당보기자'가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낳게 한다.
***조선일보, '변화' 말할 자격 있나**
김대중 기자는 자신의 칼럼을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끝맺었다.
"새 정부의 지도층은 자신감과 자긍심이 강한 사람들인 것 같다. 자긍심을 살리는 외교와 안보는 아주 이상적이다. 어려운 것은 두 가지가 상충할 때다. 우리에게는 북핵도 중요하지만 한-미 관계의 바람직한 복원이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
노 당선자와 새 정부의 책임자들은 과거 미국과 세계화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졌었든지 구애받지 말고 오늘의 관점에서 한국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할 각오로 한-미 관계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노 당선자가 방미할 때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미국의 북핵 해법에 따르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김대중 기자가 국내에서 칼럼을 쓸 때도 수없이 드러냈던 '사대주의적 발상'의 리바이벌이다.
조선일보는 지금 자신들이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류근일 주필 등 문제의 논객들도 금명간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주축이 돼 '새 조선일보'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대중 기자가 쓴 25일자 첫 워싱턴 칼럼을 보면 '조선일보는 여전히 조선일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조선일보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김대중 기자가 글을 쓰는 기간은 앞으로 1년밖에 안될 것"이라며 김대중 기자는 이미 사내 숙정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조선일보 내부사정이 어떻든 간에 과연 이같은 글이 계속 신문지면에 실릴 때 조선일보에게는 과연 '변화'를 말할 자격이 있을까. 조선일보 스스로가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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