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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갯벌 섬 <탄도>와 목포 근대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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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형의 갯벌 섬 <탄도>와 목포 근대 시간여행

2019년 5월 섬학교는 무안 <탄도> 걷기와 <목포 원도심> 탐방

*강의 마감됐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가장 핫한 도시는 단연 목포입니다! 목포에서도 그 중심은 원도심(原都心) 근대 역사거리입니다. 30년 넘게 정체되어 있던 원도심. 이제 ‘목포의 눈물’이 멈추게 될까요?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반신반의 하면서도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들 말고도 목포 원도심에는 300여 채 가까운 근대 가옥이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재개발로 도시의 원형이 사라져버렸지만 목포는 매립지인 외곽으로 신도심이 형성되면서 원도심은 그대로 방치됐습니다. 그것이 역으로 도시의 원형과 근대 건축물들을 보존시켰습니다. 이 나라에 100년 된 근대 도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은 곳이 또 있을까요? 목포가 유일합니다.

▲자동차 없는 섬인 탄도에서 걷기는 더없이 안전하다.Ⓒ섬학교

목포는 원래 무안 땅이었습니다. 무안군 목포리에서 시작되어 성장한 도시. 그래서 목포시와 무안군은 한 뿌리입니다. 무안군에서 섬들이 분리되어 ‘새로운 무안’이란 이름의 신안군이 생긴 후 무안에 남은 섬은 몇 되지 않습니다. 탄도(炭島)는 무안의 하나뿐인 유인도입니다. 시원의 갯벌이 살아 숨 쉬는 섬. 탄도는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는 청정의 섬이기도 합니다. 5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82강으로, 5월 4(토)-5(일)일, 1박2일 일정으로 목포와 무안 탄도를 찾아갑니다. 100년의 역사를 거슬러 가는 시간여행 <목포>와 ‘한반도의 허파’를 찾아 떠나는 갯벌 <탄도> 섬 여행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목포는 다도해 섬 왕국으로 진입하는 통로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의 답사지인 <원형의 갯벌 섬 탄도와 목포 근대 시간여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자동차 없는 섬-무안 탄도
신년이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일찍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일출 명소들을 찾아 떠난다.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이나 제주 성산 일출봉처럼 남해로 가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동해로 간다. 반면 송년의 일몰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인파가 서둘러 빠져나간 서해는 상대적으로 한적하다. 하지만 서해에서도 해는 뜬다. 그래서 오히려 붐비지 않고 한적하게 일출을 보기 좋은 곳이 서해다. 서해바다 무안의 하나뿐인 유인도, 탄도의 일출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갯벌에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망망한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과는 또 다른 묵직한 감동을 안겨 준다.

탄도는 빼어난 절경이 없는 평범한 섬이다. 하지만 탄도는 아주 특별한 섬이기도 하다. 29세대 54명이 살아가지만 섬에는 단 한대의 자동차도 없다. 요즘 육지의 어느 오지마을을 가도 자동차 없는 마을은 없다. 한두 가구가 사는 작은 섬에도 자동차가 있다. 사람 이동용이 아니더라도 화물 운반용으로라도 꼭 자동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탄도에는 자동차가 없다. 넋 놓고 생각에 잠겨 걸어도 안전하고 아이들이 길가에 나와 마음껏 뛰어놀아도 안전한 섬. 잠깐이라도 자동차 없는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면 탄도로 가라! 탄도야말로 느린 삶이 가능한 진짜 슬로시티다! 높은 산이 없는 탄도는 해안가를 지나 숲길로 이어지는 둘레길도 걷기에 더없이 편하다. 숲길 한가운데 주민들이 직접 만든 대숲 터널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용을 닮은 섬 탄도의 여의주, 야광주도Ⓒ섬학교

탄도(炭島)는 한자의 뜻처럼 숯이 많이 나서 탄도라 했다 한다. 옛날에 섬에 소나무가 많아 숯을 구워 팔았기에 탄도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면적 0.502㎢, 해안선 5㎞에 불과한 작은 섬에 나무가 많으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주민들의 땔감을 하기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숯을 구워 팔 수 있었을까.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들은 함부로 벨 수도 없었다. 국가에서 금송령으로 보호한 소나무로 숯을 굽다니 어불성설이다. 본래 탄도는 여울도였다. 여울이란 하천이나 바다가 급경사를 이루거나 폭이 좁고 얕아서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말한다. 여울의 물은 소리 내어 흐른다. 탄도 앞바다는 갯벌이 드넓다. 썰물 때면 물이 빠지면서 이 갯벌에 급하게 흐르는 물길이 생기는데 이것이 여울이다. 그래서 여울 섬이었다. 여울의 한자어는 탄(灘)이다. 하지만 여울 섬이 한자로 표기 되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실수로 여울 탄이 아니라 숯 탄(炭)으로 잘못 기재됐던 것이다. 여울 섬이 숯섬으로 와전된 것이다.

탄도로 가는 여객선 선착장은 무안군 망운면 조금나루다. 조금나루는 송학포구라고도 불렀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안 지방의 세곡을 모아서 영광의 목관으로 운송하는 주요 포구이기도 했다. 조금나루란 어떤 뜻일까? 바다는 달의 지배를 받는다. 달의 인력에 따라 바닷물은 차오르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달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의 들고 남에 따라 섬사람들의 생활이 좌우된다. 섬과 바다를 지배하는 달의 하수인은 물때다. 조금이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적은 시기다. 매달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 전후의 3~4일이 조금에 해당한다. 조금나루 설명 간판에는 “조금나루는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조금에도 나룻배를 탈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쓰여 있다. 생태지평, 무안군, 남해안 3개시도 관광협의회 등의 명의로 세워진 간판이다. 하지만 이 간판의 설명은 오류다. 탄도 이장님이 이름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신다.

갯벌 바다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적고 늘 물이 들어와 있는 조금에는 당연히 나룻배를 탈 수 있다. 조금에 나룻배를 타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조금나루라 했을까? 탄도와 망운반도 사이 갯벌에는 썰물 때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 다른 섬들처럼 돌을 놓아서 만든 징검다리인 노둣길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길이다. 탄도 갯벌은 푹푹 빠지는 펄갯벌이 아니라 모래가 섞인 혼합 갯벌이다. 더구나 이 길은 발이 빠지지 않는 자갈길이다. 그래서 걸어 건널 수 있었다. 이 갯벌의 길을 탄도 사람들은 열개라 불렀다.

사리 때 갯벌에 물이 쫙 빠지고 열개가 생기면 갯고랑의 여울 물도 무릎까지밖에 안 잠길 정도로 얕아진다. 그때 탄도 사람들은 이 열개 길을 걸어서 뭍으로 건너 다녔다. 그래서 사리 때는 달리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물이 빠지지 않는 조금 때면 이 길은 다닐 수 없었다. 뭍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배밖에 없었다. 그래서 탄도 사람들은 사리 때는 열개를 걸어서 건너니 나룻배를 타지 않았다. 반면 조금 때는 나룻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조금 때 이용하던 나루, 조금나루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때문이다. ‘조금에도 배를 탈 수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 때만’ 이용하던 나루라 해서 조금나루가 된 것이다.

▲탄도 갯벌을 물들이는 장엄한 일출Ⓒ섬학교

탄도의 광활한 갯벌은 감동적이다. 매립과 간척으로 갯벌이 사라져가는 시대, 탄도 갯벌은 그 자체로 귀한 보물이다. 탄도 갯벌에서는 날마다 모세의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난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쯤은 기적 축에도 끼지 못한다. 날마다 바다가 통째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는 갯벌. 기적이 일상인 섬. 탄도에는 집앞에뻘, 뒷뻘, 머시리뻘, 밥뻘, 작은뻘, 숭치뻘 등이 있는데 이 뻘에서 낙지와 감태, 석화, 농게 등이 난다. 탄도 갯벌은 1960년대까지 김장용 굴의 주산지였다. 수하식 굴양식이 보급되면서 탄도 갯벌의 토종 굴은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굴은 여전히 낙지, 감태와 함께 탄도 주민들의 주 소득원 중 하나다.

탄도에는 낙지 주낙배가 7-8척 정도고 맨손 낙지잡이는 10가구 정도다. 하지만 근래 들어 탄도 갯벌에서는 낙지도 잘 잡히지 않고 감태도 잘 자라지 않는다고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낙지가 안 잡히고 감태가 자라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전라남도는 탄도만 해역인 조금나루 남측 등 4개 구역을 ‘전남도 보호수면 제1호’로 지정하여 산란 시기인 매년 5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낙지잡이를 금지시키고 있다. 갯벌 낙지의 남획을 예방하고 지속적인 자원관리 및 회복을 위해 보호수면 지정과 낙지 치어 방류 사업 등을 지속하고 있지만 낙지 개체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에 따라 탄도 주민들의 주소득원인 낙지잡이 수입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3개월 간 낙지잡이가 금지되는 보호수면 외의 탄도 바다는 6월21일부터 7월 20일까지 금어기로 지정되어 낙지잡이가 금지된다. 탄도 주민들은 낙지자원 고갈의 원인 중 하나로 금어기 문제를 지적한다. 낙지는 6월초부터 본격적인 산란기가 시작되니 금어기를 6월 1일부터 설정했어야 맞지만 6월 21일부터 금어기로 지정한 것이 문제란 이야기다. 지속가능한 낙지잡이가 가능해야 탄도 주민들이 살 수 있다. 금어기 설정 문제를 재검토해서 낙지 자원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민들은 주장한다. 탄도 주민들은 또 육식성 어류인 감성돔의 탄도만 방류 사업이 낙지 자원의 고갈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성돔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낙지 치어들을 다 잡아 먹기 때문이란 것이다. 어족 자원 개체 수 증가를 위한 어류 방류 사업도 필요하지만 낙지 보호 구역까지 설정한 바다에 감성돔 방류 사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 효율적인 정책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탄도 갯벌에서 그 흔하던 감태가 점점 사라져 가는 원인은 무얼까. 탄도 주변 바다의 김 양식장 때문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의견이다. 김 양식장에서 잡태나 파래 제거를 위해 사용하는 염산이나 유기산이 문제라는 거다. 감태는 산에 쉽게 녹아버린다. 파래 같은 해초가 섞이면 김 가공업자들이 물김 값을 낮게 쳐주니 김 양식 어민들은 산을 써서 제거하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 양식 때문에 감태가 사라지는 것은 탄도 갯벌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탄도 갯벌은 감태로 명성이 드높았다. 탄도 감태가 유명한 것은 갯벌이 기름져서다. 특히 탄도 갯벌의 찰감태는 무안 장에서도 최고로 쳤다. 탄도 갯벌에는 두 종류의 감태가 자라는데 하나는 찰감태, 또 하나는 그냥 감태다. 흔히 감태는 매생이보다 식감이 거칠지만 찰감태는 매생이처럼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일반 감태는 곧게 뻗어서 자란다 해서 뻐드래기라고도 한다. 식감도 약간 뻣뻣하다. 반면에 찰감태는 약간 꼬불꼬불하게 자라면서 봄이 되면 잎이 파래처럼 넓어진다. 하지만 부드러운 맛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탄도 사람들은 찰감태를 선호한다. “뻐드래기가 보리밥이라면 찰감태는 쌀밥”이라고 한다. 비단처럼 부드럽다고도 한다.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나오는 찰감태를 최상품으로 친다. 이 때 나오는 감태가 새순이라 더 부드럽다. 다른 지역에서는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해 감태를 기계로 세척하지만 탄도 사람들은 아직도 그 찬 물에 손을 담가 뻘물을 빼낸다. 기계로 씻으면 감태 고유의 향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탄도 감태 무침은 그 짙은 바다 향이 살아 있다.

▲탄도 마늘밭. 화학비료보다 퇴비를 많이 쓰는 탄도의 농작물은 씨알이 굵다.Ⓒ섬학교

작은 섬이지만 탄도는 땅이 비옥하고 농작물이 실하다. 탄도에서 생산되는 마늘이나 양파는 그 씨알도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크다. 무슨 특별한 토양도 아니고 옥토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땅에서 어찌 그런 수확이 가능할까. 탄도 이장님은 “큰 배가 다니기 어려워 비료 같은 것도 뭍에서 들여오기가 쉽지 않아 비료도 많이 못주는데도 작물이 잘 자라는 것이 신기하다”고 하신다. 땅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고 추정하실 뿐이다. 비료가 들어오기 어렵다는 말에 순간 딱 드는 생각. 바로 그게 아닐까. 화학 비료를 쓰지 않은 것이 작물을 잘 되게 한 원인이 아닐까. 화학 비료를 많이 쓰면 토양이 황폐화된다. 그런데 비료를 잘 안 쓰니 퇴비를 많이 썼을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땅을 살리고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농작물을 잘 되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탄도는 생김새가 용 모양이라 한다. 그래서 탄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들도 여럿이다. 용머리해안도 있고 용샘이란 이름의 둠벙도 있다. 용머리해안 앞에는 여의주도 있다. 용머리 앞 동그랗게 보이는 작은 무인도의 이름이 야광주도(夜光珠島)다. 탄도와 야광주도 사이에도 물이 빠지면 걸을 수 있는 길이 생기는데 이 길을 닻줄이라 부른다. 야광주란 암흑 속에서도 빛을 낸다는 기석이다. 밤에도 빛나는 구슬. 야광주도는 그래서 여의주가 아니겠는가? 최근 탄도에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이제 용이 여의주까지 물었으니 탄도는 승천할 일만 남았다.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목포
목포는 통로다. 내륙과 다도해 2천여 개 섬들을 이어주는 허브. 호남선 종착지인 목포는 끊어진 남북 철도가 다시 이어지면 유라시아 대륙횡단열차의 출발지가 된다. 목포는 대양과 대륙을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목포는 또 시간여행자의 통로다. 목포 원도심(原都心)에 있는 수많은 일제 강점기 근대 건축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길은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까지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담이 전하는 유달산 노적봉과 장군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며 전함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군량미를 비축했던 목포의 섬 고하도(高下島)가 거기 있다. 근대도시로 알려진 목포지만 실상 목포의 역사는 근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항장 목포의 근대성에만 집중하다보니 사람들은 목포의 유장한 역사를 잊곤 한다. 하지만 목포는 이순신 장군이 풍전등화 위기의 조선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준 구국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은 ktx열차를 타면 서울에서 목포까지도 2시간 남짓이면 족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목포는 이미 수도권 지역과 반나절 생활권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목포를 멀게만 느낀다. 심리적 거리감 때문이다. 이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묘책은 무엇일까. 일단 떠나고 보는 것이다.

▲영락없이 갓을 쓴 사람 같다. 목포 갓바위Ⓒ섬학교

목포의 한자어는 나무 목(木)에 개 포(浦)다. 그래서 나무가 많은 포구라 목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산이 많지 않은 지역이니 별 근거 없는 소리다. 또 황해 바다와 영산강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포구라 목포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또한 부족한 해석이다. 그보다는 목포의 지형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봐야 옳을 듯하다. 목포는 영산강과 황해 바다가 만나는 지점, 기다란 목처럼 돌출된 무안반도 끝자락에 있는 포구다. 목처럼 생긴 지형의 끝에 있는 포구여서 목포라 했을 것이다. 목포의 옛 이름이 목개인 것이 그 증거다. 목포와 한몸 같은 남도의 젓줄, 영산강에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황해 바다를 항해 하던 배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나주의 영산포까지 흑산도 홍어배가 오고 갔다. 1977년 영산강 하구언 제방공사를 시작하며 영산강 뱃길은 영영 끊기고 말았다. 현재는 제방으로 인해 강물도 썩어가고 있다. 영산강 하구언 제방을 트고 다시 뱃길을 연다면 목포 또한 융성했던 옛날의 영화를 되찾게 되리라.

목포 역사의 뿌리를 알려주는 유적은 만호동의 목포진(전남문화재자료 제137호)이다. 세종대왕 때인 1439년 설치된 목포 수군진은 수군만호(萬戶)가 다스렸다 해서 만호진이라고도 한다. 목포진 성은 1500년(연산군6년)에 건설을 시작해 1502년에 완성되었고, 1895년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영될 때 함께 폐진되었다. 목포진은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무안감리서·일본영사관·해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진지 주변은 영국영사관 부지로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이제 목포진의 성이나 유적은 간데없고 ‘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비석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 관아 건물은 근래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조선시대 무안 땅에 속했던 목포는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주목을 받다가 1897년 10월 1일 개항했다. 개항 후 목포에는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먼저 개항이 됐던 부산의 기술자와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의 흔적이 유달산 기슭 온금동 뒷산 장사바위에 새겨진 ‘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라 쓰여진 암각 비문이다. 경상도 이주민들이 야유회를 한 후 새긴 것이다. 이런 흔적은 또 있다. 목포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쑥굴래 또한 본산지는 경상도 밀양이다. 밀양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가져온 음식이 목포 음식이 된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생각보다 가깝고 한 뿌리로 이어져 있다. 전남 하의도가 고향인 김대중 대통령의 본관은 경상도 김해다. 전남 보길도가 고향인 나그네의 시조 또한 경상도 진주 사람이다. 정치 모리배들이 조장하지만 않았다면 지역감정이란 괴물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본래 우리는 섞이고 섞여 한 뿌리로 엉켜서 살았던 것이다.

▲침략의 상징인 사적 제289호 (구)일본영사관 건물은 현재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섬학교

일제 강점기 목포는 호남지방의 미곡과 면화, 소금 등의 수탈 통로였다. 목포가 몸집을 불린 것은 식민지 수탈 과정에서였다. 1930-40년대에 목포는 전국 3대 무역항이자 전국 6대 도시가 됐다. 하지만 해방 후 야당도시로 각인되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었으며 내내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교통 운송 시설의 발달로 무역항 기능마저 약화된 데다 목포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한 축이었던 다도해 섬 지역의 인구들이 대도시로 유출되면서 목포의 쇠락은 더욱 가속화됐다. 그래서 목포 원도심의 풍경은 삼사십년 전의 그 시간대에 멈춰버린 듯하다. 목포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시간여행을 온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랜 시간 정체되어 쇠락한 소읍 같은 곳이지만 그 덕에 목포역과 목포항 사이 원도심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고 있다. 원도심에는 문화재급 근대건축들만 30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도시는 100년 전부터 자라난 역사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낡을 대로 낡아서 더 아름다운 목포. 또 근대 건축물만큼이나 소중한 목포의 자산은 토속 음식들이다. 목포의 고유한 맛을 보존하고 있는 식당들은 대부분 원도심에 모여 있다. 목포 대표음식인 민어 횟집거리와 싸고 푸짐하고 맛깔스런 백반 집들도 다 여기 모여 있다. 홍어 횟집들과 깊은 맛의 장어탕, 꽃게살 비빔밥집, 겨울 별미 삼치횟집들도 이곳에 있다.

게다가 원도심의 여객선 터미널 부근에는 수협 위판장도 있는데 어선들이 들어오는 시간이면 바다에서 갓 잡아온 갈치와 조기, 삼치, 병어 같은 온갖 수산물들이 산처럼 쌓인다. 경매가 시작되면 조금이라도 싼 값에 좋은 물건을 사려는 상인들로 위판장은 떠들썩하다. 이방의 여행자들 눈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도심 한복판 선창가에 이런 위판장이 있다는 것은 관광 상품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이런 관광 코스는 수백억 예산을 들여도 결코 만들 수 없는 목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조만간 이 위판장이 이전되고 대신 수변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공원과 위판장, 어느 것이 보다 큰 관광자원일까? 어느 것이 관광객들에게 목포다운 감동을 더 많이 주게 될까. 목포가 원도심에서 이 소중한 자원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목포 원도심의 토속적인 맛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바로 이 위판장의 존재 덕이다. 바로 옆의 위판장에서 값싸고 질 좋은 수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손님이 많지 않아도 원도심의 식당들이 원재료의 맛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벽 위판장의 경매를 구경한 뒤 근처 식당에서 먹는 속풀이 장어탕이나 복국의 맛은 목포 원도심만이 줄 수 있는 허기진 생에 대한 위로이자 크나큰 선물이다.

목포를 상징하는 풍경은 이순신 장군과 노적봉 전설이 서린 유달산(228m)과 영산강, 삼학도, 갓바위 등이다. 홍어와 낙지, 민어 등 먹거리들도 목포의 상징이다. 유달산은 노령산맥이 바닷가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이다. 노량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니 그 의미는 사뭇 깊다. 유달산은 '영달산'이라고도 하는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달산이란 이름처럼 유달산 곳곳은 전설의 고향이다. 유달산 제일봉인 일등바위는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하여 육도바위라고도 한다. 또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는 이등바위도 있다. 전망 좋은 곳마다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소요정 등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들과 완만한 유달산 능선에서 다도해 전경을 감상하면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과연 영달산이다!

유달산 초입의 노적봉은 해발 60미터의 바위산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 뜨물처럼 보이게 했다는 설화와 일맥상통한다. 노적봉 전설은 목포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산재해 전승되고 있는 장수의 지략담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비봉산(飛鳳山)의 노적봉 전설도 유달산 노적봉과 같은데 삼한 시대 소문국왕이 적에게 포위를 당해 식량이 떨어지자 짚으로 산봉우리를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변협은 경기도 덕소에, 권율은 행주산성에 노적봉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삼학도 또한 목포의 상징이다. 삼학도란 나란히 있는 대, 중, 소, 삼학도 세 개의 섬을 일컫는다. 삼학도가 목포의 상징이 된 것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삼학도는 본래 무인도였다. 조선시대 목포진이 설치된 후 삼학도는 목포진에서 사용할 땔나무 공급지가 됐다. 관방의 부속지가 된 후 삼학도에는 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1895년 국유지인 삼학도 전체가 목포진 관리였던 김득추에 의해 일본인 삽곡용량에게 불법 매매됐다. 조선정부에서는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한일합병이 되면서 그대로 일본인 소유가 돼버렸다. 삼학도 암매 사건은 일제에 의한 목포 토지수탈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965년 세 섬 사이가 매립되면서 삼학도는 섬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2000년부터 삼학도 공원화 사업이 시작되어 15년의 공사와 1000억의 예산이 들어간 끝에 삼학도는 다시 섬의 모양을 갖추게 됐다.

삼학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세 처녀와 수도승 간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다. 전설은 이렇다. 유달산에 잘 생긴 수도승이 있었는데 섬에 사는 세 처녀가 그를 흠모했다. 마침내 처녀들이 수도승을 찾아와 사랑을 애걸했으나 수도승은 거절했다. 그래서 세 처녀는 배를 타고 각자 자신의 고향 섬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수도에 방해될 것을 염려한 수도승이 활을 쏘아 배들을 가라앉혀버렸다. 그 자리에서 세 개의 섬이 솟아났는데 그것이 삼학도다. 실상 수도승이 맞춘 과녁은 세 처녀가 아니라 자신의 내재된 욕망이었을 것이다.

목포 원도심은 근대 건축유산의 보고다. 근대 건축물 300여 채가 온전히 남아 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재개발로 원형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목포는 매립지인 외곽으로 신도심이 형성되면서 원도심은 그대로 방치됐다. 그것이 역으로 도시의 원형과 근대 건축물들을 보존시켰다. 이 나라에 100년 된 근대 도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은 곳이 또 있을까? 목포가 유일할 것이다. 게다가 목포 원도심에는 이미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등록된 건축물들도 허다하다.

사적 제289호인 (구)일본영사관 건물은 현재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 중인데 유달산 노적봉 바로 아래에 있다. 일제가 호남 지방의 미곡, 면화, 소금 등 식민지 수탈의 총지휘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르네상스식 건물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견고하고 아름답다. 1900년 건립된 이후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되다가 목포부청사,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을 거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벽난로와 당시 사용하던 거울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목포의 역사와 식민지 침탈의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뒤편에는 암반을 파내 만든 방공호가 참혹한 시대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노예노동으로 만든 것이다.

(구)일본영사관 인근에는 근대역사관 별관으로 사용 중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도 남아 있다. 동척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농산물 등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착취기관이다. 척식(拓殖)은 ‘식민지 개척’이란 뜻인데 네덜란드나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비슷한 성격이다. 일제는 1908년 경성에 동척 본점을 세우고, 부산·목포·평양·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는데 전국 9곳의 동척 본·지점 중 현재는 부산과 목포 지점만 건물이 남아 있다. 두 건물 다 수탈의 상징물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한 뒤 근대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목포 지점 건물은 영산포에 있던 동척 지점이 목포로 옮겨오면서 1920년경에 건축되었다. 식민지시대의 뼈아픈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인근에는 또 등록문화재 30호인 심상소학교 강당 건물도 남아 있다. 1929년 건립된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인데 일제가 일본인 아동들만을 교육시키기 위해 목포에 처음 설립한 소학교의 강당이다. 목포역 인근 오거리에는 등록문화재 340호인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도 있다. 언뜻 보면 마치 일본의 절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지붕 형태가 일본스럽다.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쓰이는데 본래는 일본 사찰 건물이었다. 세간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일본식 사찰은 군산의 동국사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목포에만 일본식 사찰 건물이 3곳이나 남아있고 그중 원도심의 정광정혜원과 약사사는 아직도 사찰로 활용되고 있다.

동본원사 건물은 2004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등록 예고까지 했었지만 목포시가 주차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면서 철거 위기에 몰렸었다. 하지만 시민단체의 철거반대 운동으로 건물은 지켜졌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본에 본부가 있는 동본원사는 구한말 부산에 별원을 설치한 뒤 각 개항장에 별원을 설치했는데, 인천에는 1884년, 목포에는 1898년에 세웠으며 포교 외에 개항장 내 일본인 자녀를 교육하는 소학교와 복지시설도 운영했다. 현재의 석조건물은 193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957년 목포중앙교회에서 이 건물을 인수해 한동안 교회로 사용했었다. 일본 불교사찰의 지붕에 십자가가 걸렸을 당시 풍경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참으로 독특한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건물이다.

목포에서 또 하나 빼먹지 말고 둘러봐야 할 곳은 등록문화재 제114호인 양동교회다. 양동교회는 1919년 3월 21일에 일어난 목포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양동교회 교인 서상술과 박상봉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20년 뒤에는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기도 했다. 이 건물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유진벨이 1911년 건립한 목포 지역 최초의 교회 본당 건물이다. 민간정원인 이훈동정원도 놓치기 아까운 공간이다. 1930년대 일본인이 만든 정원을 조선내화 창립자 (고)이훈동 회장이 매입해 가꾸어 왔다. 2천여 평이나 되는 대형 정원에는 다양한 석탑들과 113종 400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한 때 목포 신랑신부들의 웨딩 촬영장소로 유명했다. 매주 토요일 단 2시간만 개방된다. 이훈동 회장이 생전에 수집한 추사, 대원군, 소치, 남농, 이응로 화백 등의 진귀한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성옥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는 원도심의 명소다.

▲목포 앞바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일제시대 유산인 원도심을 돌아보고 목포대교를 건너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성지 고하도(高下島)에 이르게 된다.Ⓒ섬학교

일제시대 유산인 원도심을 돌아보고 목포대교를 건너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성지 고하도(高下島)에 이르게 된다. 목포가 항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앞에서 파도를 막아주는 고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하도는 목포의 방파제다. 고하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서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함대는 명량해전 승리 직후 서둘러 몸을 숨겨야 했다. 아직도 건재한 수백 척의 왜군 함대가 다시 공격해 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피신해 있던 이순신 함대는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들어와 진을 친다. 섬의 서북쪽이 병풍처럼 솟아있어 배를 감추기에 적합한데다 호남평야의 곡식들을 싣고 영산강을 따라 내려오는 운반선들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전쟁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먹고 살아야 군함도 만들고 무기도 만들고 전투도 할 수 있다. 고하도는 군량미 비축에 최적지였던 것이다. 고하도에는 18세기에 건립된 이충무공 유허비가 하나 있는데 이 비문에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이 섬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바다의 길목에 위치하여 오른편으로 영남에 연하고 왼편으로 한양으로 연결된다. 가깝게는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어 승리를 기약함이요.”

고하도는 1598년 2월 17일 완도의 고금도로 옮겨갈 때까지 107일간 조선수군의 총사령부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순신 장군은 소멸되다시피 한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해 무기와 전함을 만들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장군은 이곳에 남·서 길이 1㎞, 높이 2m, 폭 1m의 석성을 쌓아 적선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오가는 배들에게 1∼3석의 식량을 내어 놓고 통행첩을 받아가도록 했는데 불과 열흘 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모았다. 단기간에 그토록 많은 군량미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영산강 수로로 이어지는 고하도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현재의 무기상들처럼 과거에도 상인들에게는 전쟁이 돈벌이의 기회일 뿐이었다. 상인들에게 통행세로 받은 곡식이 있으니 전함도 만들고 군사들도 모았다. 고하도 주둔 기간 동안 이순신 장군은 전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군사 2천여 명을 모집해 훈련시켰다. 목포의 섬, 고하도 덕에 조선 수군이 재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하도가 호국의 성지인 것은 그 때문이다.

▲맛의 도시 목포의 해물 밥상Ⓒ섬학교

조선시대 나주목에 속했던 고하도는 보화도(寶和島), 비노도(悲露島), 고하도(孤下島)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해서 고하도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목포에서는 고하도를 흔히 ‘용섬’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형상의 용머리해안 때문일 것이다. 이순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하도에는 ‘원마을’ ‘아래쪽마을’ ‘섭드러지’ ‘큰덕골’ ‘뒷도랑’ ‘가장골’ 등의 작은 자연부락들이 있었는데 가장 큰 마을은 선착장 부근의 원마을이다. 이 일대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모충각’이 있고, 모충각 안에 이충무공유허비가 있다. 모충각 주변 고하도의 큰산인 뫼봉산 정상에 이순신 장군이 조성한 고하도진성의 흔적이 있다. 모충각을 비롯한 이들 유적들이 통칭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이다.

유적지 근처 큰덕골은 성안골이라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함을 건조하던 조선장(造船場)이 있었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사라지고 없다. 다리가 놓아지기 전까지는 원마을 선착장과 목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있었지만 이제 어선들만 정박해 있다. 고하도 모충각에서는 아직도 통영 충렬사처럼 장군의 탄신일과 순국일에 제를 올린다. 조선시대 내내 고하도는 이순신 장군의 사적지로 존중받았고 고하도 사람들은 구국의 섬이란 자부심이 넘쳤다. 1904년 일제가 고하도를 점유하기 위해 허가를 구했을 때 무안감리(목포시장의 전신)가 “고하도는 조선의 충신 이순신의 사적지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점유를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 함대가 주둔했던 기억은 고하도의 민속놀이인 <고하도 강강술래>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충무강강 고하술래
임진왜란 칠년동안 강강술래
백전백승 하시고도 강강술래
슬프도다 충무공님 강강술래
고하도에 충무비는 강강술래
남해왜적 처부술때 강강술래
고하도서 실어다가 강강술래
우리군사 길렀다네 강강술래”

고하도가 다리로 목포와 연결되기 전에는 여객선이나 유람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고하도를 찾았다. 하지만 다리로 이어지면서 뱃길이 끊기자 고하도는 오히려 목포와 단절이 깊어졌다. 고하도가 그저 지나가는 통로가 돼버린 것이다. 목포항과 고하도간의 뱃길을 복원시켜야 한다. 목포를 찾는 사람들이 일제의 유산들만 돌아보고 가게 하는 것은 일본팔이에 불과하다. 왜적에 맞서 싸워 이겼던 승리의 기억도 함께 가져가게 해야 한다. 그 기억의 저장고가 바로 고하도다. 고하도의 역사야말로 목포 역사의 완성이다.

▲목포 내항, 조기잡이 어선의 작업광경은 그대로 어화다.Ⓒ섬학교

5월 섬학교 제82강 <무안 탄도 걷기와 목포 원도심 탐방>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4일(토)>
07:00 서울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2강 여는 모임
-무안 망운 도착
-점심식사(망운에서 남도밥상)
-조금나루 출발
-탄도 도착
-탄도 걷기(4km)
탄도항-마을회관-용머리해안-데크길-팔각정-마을회관
-조금나루 도착
-고하도 충무공 사적지 탐방
-저녁식사 겸 뒤풀이(민어회와 각종 해산물 밥상)
20:00 자유시간 후 취침(목포 <해운모텔> 다인실)

<5월 5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남도밥상)
-목포 원도심 오전 탐방(3km)
목포진-근대역사관2관-성옥기념관-근대역사관1관-노적봉-동본원사-(구)호남은행-(구)화신백화점-나무숲-창성장앞
-점심식사(목포)
-목포 원도심 오후 탐방 및 장보기
수협위판장-연희네슈퍼동굴-보리마당-조선내화공장
15:00 서울 향발. 제82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무안 탄도 걷기와 목포 원도심 탐방> 답사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5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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