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완화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퍼즐 풀기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지난 한 달여간 회담 결렬의 이유와 사정을 놓고 회담 당사자와 내외 전문가 사이에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이들은 양측 협상 카드 구성의 불균형에서 문제점을 찾기도 하고 혹은 톱다운 협상 방식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특이한 협상 기술이나 미국의 국내정치적 변수를 문제 삼기도 했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것처럼, 회담 결과에 대한 전문가 사이의 여러 분석과 해석도 확실한 공감대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은 회담 결렬책임을 상대에게 넘기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편을 갈라 한 쪽이 먼저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과 북한은 물론 주변 분석가들도 어느 누구 하나 협상을 깨자고 하는 측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미국과 북한은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협상 재개를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의 조기 재개를 염원하면서 하노이에서 양측이 동시에 범했다고 생각하는 실수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바로 대북제재 문제를 양측이 모두 협상 의제화했다는 점이다.
제재를 부과하거나 해제하는 문제는 성격상 일방적 조치로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대북 제재는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해야 풀 수 있으며,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한다면 그 진도에 맞추어 완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비핵화의 선행 조치가 먼저 있어야 한다.
뒤집어 생각해서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하면 대북 제재는 북한이 요구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해제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대북 제재를 유지할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없다.
현실 경제의 절박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이 대북 제재 완화 요구를 뜻대로 관철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대북 제재 문제를 미국에게 추가 협상카드로 안겨준 셈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는 대신 얻고자 하는 것이 겨우 대북 제재 해제라고 한다면 핵 개발에 쓸데없이 공을 들인 꼴이 된다.
북한이 비핵화의 대가로 얻고자 하는 것은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보장이다. 비핵화의 대가는 북한이 비핵화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 협상의 대상이기 때문에 완전한 비핵화 조치 이전에라도 일정한 선불을 요구할 수 있다.
제재 해제나 완화는 비핵화가 되면 당연히 따라오는 비핵화의 결과로 북한이 핵포기 대신에 협상을 통해 얻어야 하는 비핵화의 대가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미국이 대북제재 완화를 협상카드화 한다면 이 역시 안보리 권한 침해에 해당할 수 있으며 적절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독자적인 대북제재라면 카드로 쓸 수도 있다. 과거 리비아나 이란의 대미협상에서도 제재 해제의 내용이나 수준을 구체적으로 협상문에 담지 않았으며, 미국도 유엔안보리에 제재 해제를 건의한다고 언급했을 뿐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게 안보와 체제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비핵화의 대응물은 어디까지나 안보와 체제보장이다.
대북 제재는 비핵화가 이행된다면 상황에 따라 당연하게 완화되거나 또는 해제되는 문제로 북한이 미국에 매달릴 문제가 아니다. 또한 북한의 요구와 같이 비핵화 이행 정도에 맞춘 단계별 제재 해제란 수학 공식처럼 되는 일도 아니다.
만약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에 나선 후, 따라오게 될 제재 완화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협상 분위기 차원에서 거론할 수는 있어도, 협상 의제로 하는 것은 상대측에 카드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결과만 되는 셈이다.
비핵화 조치 이전에도 북한에 경제지원을 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유엔대북제재의 예외조치로서 가능한 것이지, 비핵화 이전에 제재해제를 취하면서까지 할 것은 아니다. 북한은 비핵화에 대응하여 미국에 요구할 그림을 크게 그려야 한다.
협상 상대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하노이로부터 빈손으로 귀국할 때 가졌을 낭패감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항간에는 협상팀이 문책당할 것이라거나 내부단속을 강화하고 대미협상과 관련해서 부여했던 주민들의 과도한 기대를 통제하며 '새로운 길'의 모색에 주력할 것이라는 등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다.
북한은 이처럼 하노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 추스르기를 하면서 미국을 다시 보고 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강의 지도자인 것은 트럼프 개인이 위대해서라기 보다 미국 자체가 세계 최강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도 국내정치에서는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재선을 원한다면 국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공산국가나 독재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를 상대할 때 북한이 겪는 어려움일 것이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만 초점을 맞추어 협상을 한다면 앞으로도 제2의 하노이는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
미국은 대통령의 생각에 실무진이 무조건 승복하지도 않고 국민 여론은 더더군다나 대통령의 조치를 뒤집을 수도 있는 체제다. 따라서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어깨 너머에 있는 미국 자체와 협상을 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미국 여론의 신뢰는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낮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미관계에서 만족할 성과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
대북 인식에 있어서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회의적이고 보수적인 미국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을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입증해야 한다.
이런 시기에 북한은 14기 최고인민회의를 새로 구성했다. 그리고 곧 제1차 회의를 소집한다. 중요한 시기에 열리는 중요한 행사다.
이번 회의가 내부 몸 추스르기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하노이에서 놓친 김정은 위원장의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북한도 비핵화 의지를 김정은 위원장의 수준이 아니라 북한 주민 전체의 총의로 국제사회에 보여주길 요청한다.
싱가포르의 역사적 성과물은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으로 만들었다.
하노이에서 완성하지 못한 성과를 수확하기 위해 이번에는 북한 주민의 결단으로, 다시 말해서 최고인민회의의 결정으로, 비핵화 실천 의지를 명백하게 함으로써 김정은 위원장의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를 다시 살리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싱가포르 회담으로 모처럼 얻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다.
제14기 최고인민회의는 헌법 개정을 통해 기존헌법 전문에 애매하게 표현된 핵무장 관련 언급을 완전히 삭제하고, 2013년 제13기 최고인민회의가 채택한 법령('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을 폐지하여 국제사회에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하노이 회담은 끝나지 않았으며 이를 한반도 평화노력의 실패사례로 남겨둘 수는 없다.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과 같은 날 열리는 제1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하노이 회담을 교훈 삼고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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