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악몽 몇 가지 중 하나에 개가 있다. 골목에서 개가 나를 구석으로 몰아 위협하는 장면. 그만큼 내게 동물은 두려운, 그래서 조심스러운 존재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이나 애정을 호소하며 동물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나올 때면 오히려 멈칫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동물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동물의 권리에 대한 고민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최근 깨닫게 되었다.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1월 '케어' 내부고발자의 제보로 수백 마리의 동물이 '안락사'를 당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는 공언이 거짓으로 탄로나자 '케어' 박소연 대표는 인도적인 이유로 불가피한 안락사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동물을 사랑하므로 힘겹게 내린 선택인 것처럼 말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락사 자체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논점을 흐렸다. 동물의 권리가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처럼 말이다.
안락사가 동물에게 더 나은 선택인 경우들이 분명히 있다. 몸이 너무나 망가졌는데 회복 가능성 없는 채로 견뎌야 하거나, 치료와 회복을 위한 돌봄을 제공하는 게 불가능한 경우 등 때로는 동물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동물을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이런 판단을 돕기 위한 지침도 있다. '케어'는 어땠나.
어떤 동물이 생명을 지속하는 것보다 죽음을 맞도록 돕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려면 적어도 그 동물에게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케어'는 그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조 대상인 또 다른 동물을 위해서 죽음을 강요했다. 동물을 위한다며 동물을 구조하고, 바로 그 동물 구조를 위해 동물을 죽였으며, 동물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속였다.
제대로 돌볼 수도 없는 환경으로 동물을 옮기는 것에 '구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부적절하거니와, 또 다른 동물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느라 먼저 들어온 동물을 자의적으로 안락사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은 살처분에 다름 아니다. 개 농장이 개를 식용으로 팔기 위해서든 '케어'가 모금을 지속하기 위해서든 인간을 위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 누구를 위해, 어떻게 죽음을 맞는가는 그 안에서 따질 문제일 뿐, 어느 것도 동물을 위한 것일 수 없다.
동물을 위한다며 동물을 저버리다
동물의 '권리'는 동물이 무엇을 원하는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을 안고 있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면 동물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일 텐데, 동물의 권리는 사람을 통해 주장될 수밖에 없다. 누가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동물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이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인 것처럼 얘기된다. '사랑하므로 내가 가장 잘 안다!' 그가 가장 잘 알 수도 있으며 그것이 동물 역시 원하는 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러느냐고 수긍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인간의 자기결정권도 '혼자 결정할 권리' 이상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그 결정을 함께 책임질 수 있는 관계와 구조를 필요로 한다. 장애인 거주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나는 여기에서 계속 살겠다'고 할 때, 시설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지원도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존중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누구나 여러 기회를 놓고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사회가 마련할 때에 자기결정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개 농장의 열악한 환경에서 죽음을 대기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잔혹한 방식으로 죽어야 하는 개들이 더 나은 기회를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케어'가 만약 동물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려고 했다면, 자신이 구원자를 자처하며 후원금을 모으기보다 사회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말해야 했다. 어쩌면 '케어'는 이번 사태를 겪으며 그런 기회를 얻은 셈이기도 하다. 단체 활동가들이 먼저 나서서 기회를 만들었다. '케어'의 일부 활동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책임을 묻고 박소연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3월 31일 열린 총회에는 해임안도 상정되지 못했고 박 대표는 단체를 더욱 자신의 손 안에 움켜쥐었다.
대표의 이름으로 추진한 안락사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 동물의 권리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의 가능성은 없는지 찾아보자는 활동가들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케어'는 '후원금 감소로 인원감축이 불가피하다'며 권고사직을 종요하기도 했다. 개를 보호할 공간이 부족하다고 죽인 모습과 겹치는 것이 우연이기만 할까. 동물만 보아서는 동물도 볼 수 없다. '케어'는 동물을 구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위치 지으며, 동물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강변함으로써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 지반을 오히려 무너뜨렸다. '케어'는 동물도 인간도 케어하지 못했다.
동물권운동이 열고 있는 지평
인권은 인간중심적이라 동물의 권리를 배제하고 대립하는 것처럼 말해지곤 한다. 그러나 동물학대를 하지 않으려면 학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동물에게도 유익하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동물의 권리'가 전하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인간에게도 유익하다. '동물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대립하기보다 인간의 권리를 확장시킬 수 있다.
동물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수백 마리의 동물을 구덩이에 묻기도 했던 구제역 살처분은 동물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던 노동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도 견디기 쉽지 않으므로 이주노동자에게 떠넘겨지기도 하고 죽임을 수행해야 했던 이들의 트라우마는 기억되지 않는다. 동물의 권리가 다루는 문제들은 인간과 타자의 관계 맺기에 관한 문제다.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수많은 존재들의 내력을 아는 만큼 우리가 만들어갈 세계를 더욱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동물권운동이 건네는 이야기는 타자와 관계 맺는 인간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이다.
물론 동물권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인간'이라는 종이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말하는 담론처럼 다가오는 탓이다. 육식을 하면 안 되고 동물실험을 하면 안 되고 야생동물을 가두면 안 되고 … 동물의 권리가 개개인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처럼 여겨져 마뜩찮은 것이다. '권리'라는 인간 사회의 개념이 가진 난점도 있다. 권리의 주체 자리에 동물을 넣을 때 발생하는 곤란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동물이 학대당할 때 분노하는 사람이, 동물이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살해'당한다는 점에는 초연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 따지기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데서 초래되는 곤란함이 있다.
그러나 곤란함을 잠시 껴안고 동물권운동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동물의 권리 주장이 개인에게 바로 특정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처럼 미리 거부할 필요도 없다. 고통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 각성의 계기가 될지는 모르나 권리가 훼손되는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기 쉽다. 권리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 동물을 내가 먹어도 되는가 거부해야 되는가의 문제를, 누구든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 동물을 먹지 않아도 되려면 정부나 지자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바꿔보면 어떨까.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퇴할 때
2018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의 비율이 23.7%, 약 511만 가구로 추정된다. 동물과 더불어 산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에도 동물보호 조항이 들어갈 정도가 됐지만, 동물의 권리나 복지에 대한 인식의 지평도 넓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려동물이 늘어나는 만큼 유기동물도 많아지는 현실이 그 증거일 것이다. '불쌍한 동물'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하자는 관점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물권 운동이 '케어' 사태로 싸잡아 폄훼될까 걱정이다.
동물의 권리를 통해 세계를 조명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 동물을 핑계 삼아 잇속을 챙기는 개인과 단체와 산업도 있겠지만 동물로부터 변화의 방향을 찾아내는 이들도 있다. 동물이 권리를 가지냐 아니냐를 놓고 토론하는 것과 별개로 '만약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게 되는가' 질문해보자. 동물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지가 막연하더라도 동물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출발선에는 함께 설 수 있을 것이다.
'케어' 사태로 당장 동물권단체들의 후원금이 확 줄어들었다는 소식도 안타깝지만, '케어'가 여전히 자신을 동물권의 역사를 써나가는 대표적인 단체로 내세우고 있다는 소식은 참담하다. 그것이 단체 활동가들의 권리를 제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도 더욱 조명되어야 한다. 인간의 권리도 동물의 권리도 해치고 만 박 대표의 사퇴가 동물을 위해서든 인간을 위해서든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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