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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종교계가 보여준 초라한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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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종교계가 보여준 초라한 풍광

<데스크 칼럼> "두달만 더 계셨으면 '좋은 일' 보셨을 텐데"

정치계절에는 언행 자체가 정치적 해석을 유발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때로 구설수가 되기도 하고 특정세력 특정인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어 흐름 자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한 기도문이 표적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1997년 10월28일 명동 성당 안에 있는 성바오로 수녀원에서 대학발전후원회 만찬 모임을 가졌다. 이 만찬회에는 후원회 회장인 이회창 총재, 운영위원장인 최병렬의원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김추기경은 만찬에 앞선 기도에서 "이회창 후보가 앞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빈다"고 했다.

뒤이어 이총재의 인사 후 봉두완이 일어나 "추기경은 평소 이총재가 구 정치의 구각을 깨뜨리고 새롭고 깨끗한 정치를 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안다"고 소개했다. 어떻게 보면 이날 모임의 또다른 뜻은 자연스럽게 김추기경이 이총재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였다.

추기경 비서실은 "그런 해석은 무리"라고 즉각 해명했지만 여기에 그냥 넘길 수 없는 얘기가 있었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바로 김추기경의 권고와 격려에 의해 결단되었다는 이총재 가족쪽에서 나온 말이었다.

손광식 본지고문이 본지에 매일같이 연재중인 '손광식의 1997 비망록'에 나오는 1997년 대선 직전의 한 풍속도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또다시 비슷한 풍광이 목격되고 있다.

***"좋은 시기에 탁..."**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확실히 '독보적인' 대목이 있다.

지난주말 부친상을 당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대통령은 문상후 "상가집에선 소주 한 잔을 해야 한다"며 이 후보와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일순간 주위를 당혹케 하는 발언을 했다.

"아버님께서 중요한 시기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것 같다. 좋은 시기에 탁…"

그의 직설적이면서도 단순무비한 이 말은 '엄숙한 상가'에서 하기엔 적합치 않은 말이었다는 일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문정치'의 본질을 날카롭게 적시했다는 점에서 "과연 전두환답다"는 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전두환 전대통령의 이 말이 한국 주류집단의 '빅히트 유행어'가 됐다.

상을 치른 이회창 후보는 조문객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5일 전직 대통령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예방했다.

이 후보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에 이어 연희동 자택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찾았다. 노 전 대통령은 "돌아가신 분께는 서운한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이번에 돌아가신 것이 이 후보에게나 나라에 좋은 일이 있게 하기 위해서란 얘기가 있다"며 "모든 게 좋게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영원한 2인자"라는 세간의 평가가 새삼스레 확인되는 자리였다.

***김수환 추기경, "아버님이 가시며 '큰 일'을 하신 것 같다"**

이 후보는 지방일정이 잡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건강이 좋지 않은 최규하 전 대통령은 다음에 방문하기로 하고, 종교지도자들을 찾았다.

이회창 후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이 후보 선친의 장례미사도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집전했을 정도로 이후보와 김추기경간 친분이 두텁기는 예로부터 유명하다.

이 후보를 맞은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은 "이번에 아버님이 가시면서 '큰 일'을 하신 것 같다"면서 "사람들이 많이 당신께로 모이도록 하셨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평소 말을 아끼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김 추기경의 발언을 한나라당은 더없이 '직설적인 지원사격'으로 받아들이며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희대의 정치보복이 난무할 것"이라던 스님이 "두달만 더 계셨으면"**

하지만 이날 한나라당을 가장 흐뭇하게 만든 이는 조계종의 정대 총무원장이었다.

조계종의 정대 총무원장은 이회창 후보를 맞아 "(부친이) 두 달만 더 계셨으면 '좋은 일'을 보셨을 텐데 아쉽다"며 "큰 일이 있기 전에 어려운 일이 많은데 어려움을 싹 가져가신 것 같다. 좋은 세상이 오면 후보께서 모든 일을 용서해 동서와 계층을 화합시켜 달라"고 말했다.

정대 총무원장의 발언은 그 누구의 발언보다도 '직설적'이었다. '좋은 일'이란 표현을 통해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정대 총무원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대목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대 총무원장은 지난해 1월19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집권하면 희대의 정치보복이 난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문제의 '1.19 발언'으로 세간을 크게 뒤흔들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회창 후보와 불교계는 지난 97년부터 사이가 소원했다. 당시 한나라당의 말실수 때문이었다. 지난 97년말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의원이 당내 경선에 불복, 탈당했다. 이때 흥분한 한나라당은 이인제 의원을 비난하면서 '파계승'이란 표현을 썼다. 당연히 불교계가 발끈했고, 선거패배후 한나라당은 불교계와의 마찰을 패배의 한 요인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후 이회창 후보는 불교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대한불교협회 소속 25개 종단 5천8백여 사찰 가운데 주요사찰 1천여곳에 이후보 또는 한나라당 이름으로 적어도 한차례씩은 방문했을 정도다. 올 1월에는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불교계 각 종단의 주요인사 1천여명을 초청한 가운데 신년법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걸림돌이 노골적으로 반(反)이회창 입장을 공개리에 천명해온 정대 총무원장이었다. 이러던 차에 정대 총무원장이 노골적인 이회창 지지 및 화해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니, 한나라당으로서는 안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제는 불교표까지도 완전히 건졌다"며 연말 대선에서의 승리를 자신했다.

***종교는 종교다와야**

종교는 탈세속을 지향한다. 하지만 종교의 역사는 동시에 정치의 역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예민한 안테나'를 무조건적으로 탓할 일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종교다와야 한다. 현실정치의 일선에, 그것도 대단히 미묘한 시점에 종교지도자들이 출현하는 모습은 종교적이지 못하다. 비록 종교의 본질이 정치라 할지라도 말이다.

2002년 한국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초라한 풍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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