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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기다린 특수고용 노동자는 여전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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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기다린 특수고용 노동자는 여전히 운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노조 하기 쉬운 세상, ILO 협약 비준으로

"노동조합은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봤거나 도와준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하는 얘기이다. 노조 만드는 절차는 간소한데 만드는 순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사용자들이 노조 핵심을 콕 집어 해고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에겐 보복성 전환배치와 각종 불이익 폭탄을 안겨준다.

노동조합 지키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노동자들도 많다. 한국에서 노동조합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로 인정받는 관문부터 통과해야 한다. 이 나라 노동조합법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법 제2조에서 정의된 ‘근로자’ 구성요건을 모조리 다 채워야 노동조합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지만

그 관문에 서있는 이들 중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게 최소 200만에 달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화물트럭·레미콘·덤프트럭 기사, 대리운전·퀵서비스·택배 기사, 간병인, 학습지 교사, 보험모집인, 방과후 교사 등 멀쩡한 노동자들인데 오직 이들이 ‘근로계약’이 아니라 도급 또는 위탁계약을 체결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려시대 노비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며 난을 벌였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벌써 신분제 철폐를 내건 대규모 반란이 있었는데, 800년이 지난 지금은 자본가에 종속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노조도 못 하는 현실이다. 자본가가 되는 데에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데 노동자로 인정받으려면 온갖 허들을 다 뛰어넘으라는 거다.


이미 특수고용 문제는 20년 전인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 쟁점이 되어 왔다. 그 뒤 대선 때마다 주요 후보들은 200만에 달하는 표심을 잡기 위해 특수고용 관련 공약을 내걸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모두 대선에서 구체적으로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을 공약하고 당선된 바 있다.(위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

자본가를 위해 ILO 협약 위반도 감수?

그러나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는 20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대선 때마다 쟁점이 되어 공약을 걸고 당선되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약속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사항을 경사노위라는 기구에 외주 줘버렸다. 국민에게 약속한 내용을 이행하면 되지 그 이행 여부를 왜 다른 기구에 맡기나?

“단결권 관련 공익위원안은 국제노동기준 위반마저 감수하고 경영계 요구를 충분히 반영해 노동계 불만이 큰 상황 …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결성권을 보장하라는 국제노동기구 권고도 있었지만 경영계 요구로 공익위원안에 반영되지 않고 장기 과제가 됐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3월 18일, 경사노위에서 ILO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 의제를 다루는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의 공익위원 대표를 맡고 있는 이승욱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내뱉은 말이다. 얼마나 노골적인 얘기인가! 20년간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외쳐온 노조 할 권리라는 처절한 요구를, 그것도 자본가들 요구 때문에 외면하겠다는 것 아닌가.

즉, 경사노위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불이행을 배신이 아닌 것처럼 마사지 해주고 자본가들 요구에 맞게 국제노동기준을 깎아주고 그들의 소원수리를 해주는 기구에 다름 아님을 보여준다. 어떻게 "국제노동기준 위반마저 감수하고 경영계 요구를 충분히 반영"한다는 얘기를 공개적인 기자회견장에서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까?

▲화물업종 기사들은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린다. ⓒ공공운수노조

특수고용 노조 할 권리도 바겐세일?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가장 반색하는 쪽은 적폐세력 자유한국당이다. 박근혜가 추진했던 노동개악과 문재인 정권의 정책에 차이가 없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숨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2018년의 마지막날(12월 31일), 환노위 임이자 의원(자유한국당 간사)이 특수고용 관련 개악안을 발의하게 된다.

이 법안은 기본적으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노동자’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다만 노동자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은 인정되니 노동조합 비슷한 ‘단체’를 결성할 권리, 교섭 비슷하게 사업주를 상대로 계약조건을 ‘협의’할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단체가 파업, 즉 집단적으로 노무제공을 거부할 권리는 금지한다. 민·형사상 책임까지 명시해서 말이다.

이건 뭐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라는 비유도 아깝다. 장애인들이 타다가 사고로 수없이 목숨을 잃었던 리프트, 반층짜리 휠체어 리프트 수준이다.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아 노동조합도 금지되고, 노동조합과 유사한 권리 2개만 준다는 것이니 말이다. 교사·공무원은 그나마 노동자로 인정한 상태에서 기본권을 할인했다면, 특수고용은 아예 기본권을 바겐세일 해준 거다.
"결사의 자유 원칙에 의해 군인과 경찰만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는 스스로 선택한 단체를 설립하고 그런 단체에 가입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권리의 적용 대상을 정하는 기준은 고용관계 존재 여부에 기초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업노동자, 일반 자영업자(self-employed workers), 자유직 종사자의 경우에는 종종 고용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동자들도 단결권을 누려야 한다."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판정 해설집, para. 254)

임이자 입법안 역시 ILO 핵심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내용이다. ILO는 이미 3~4회에 걸쳐 한국 정부를 상대로 화물트럭기사를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를 제한 없이 인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위 내용처럼 ILO 협약 원리는 특수고용은 물론이고 일반 자영업자에게도 결사의 자유를 차별 없이 보장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입성 뒤 변심한 더불어민주당

그렇다면 ILO 협약 원리에 맞게 법안을 발의하면 되는 일 아닐까? 놀라지 마시라. 이미 그런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2017년 2월에 한정애 의원이 대표발의한 노동조합법 개정안이다. 특히 이 법안은 아예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하나만 콕 집어서 노조법 2조만 원포인트로 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 이 법안의 현재 상태는 어떠할까?


다시 한 번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접속해 보았다. 2017년 2월에 발의된 후 같은 해 9월에 환노위 전체회의에 상정까지만 이뤄진 채 정지되어 있다. 지난 글에서 다뤘던 홍영표 교원노조법 개정안과 똑같이 고용노동 법안소위에서는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은 채, 2년 넘게 그저 국회 안에서 잠자고 있다. 아니, 대체 2017년 2월 뒤에 무슨 일이?

그렇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당선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보장, 전교조 합법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청와대 입성 후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입을 싹~ 씻어버렸다. 대선 이전에 발의한 법안, 국제노동기준에 충실한 법안은 내팽개쳤다. 그 대신 자본에게 유리한 법안만 발의하고 자유한국당과 함께 밀어붙이고 있다.

ILO 권고 받는 부끄러움 반복할 건가

이명박 정부 시절에 화물트럭 기사, 덤프트럭 기사가 조합원으로 가입되어 있다는 이유로 전국건설노조와 전국운수노조를 불법화 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관련 노동조합들이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하자 ILO는 한국 정부에게 매년 아래와 같은 강력하고 구체적인 권고를 결정한 바 있다.

[2011년 권고 내용] 위원회는 화물차량 운전기사와 같은 자영 노동자(self-employed worker)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들 권익의 증진과 방어를 위해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조직을 통해, 그 어떤 사전적 승인 조치 없이 해당 조직의 규정에 따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연맹과 총연맹에 가입할 권리를 포함하여, 결사의 자유를 전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한국정부에 요구한다.

[2012년 권고 내용] (i) 대형화물트럭 운전기사들이 설립하였거나 가입한 조직이 그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그리고 해당 조직의 규정에 따라, 그 어떤 사전적 허가 없이 연맹과 총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ii) 전국건설노조와 전국운수노조에게 차량소유 운전기사들을 조합원에서 배제시킬 것을 요구한 권고를 철회하고, 노조법 시행령 제9조 제2항 하의 조항을 포함하여, 이들 연맹들에 대해 노조 조합원들을 각 노조가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그 어떤 조치도 삼갈 것.

노동조합 명칭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ILO가 "결사의 자유를 전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 "노조가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그 어떤 조치도 삼갈 것"이라는 표현까지 권고에 담았다는 것은 한국 정부 입장에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이다. 특수고용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어겨서 계속 부끄러운 권고를 받고 싶은 건가?

노조 하기 쉬운 세상 만들기

매년 저런 권고를 받고 있는데 자본가들 소원수리 해주느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보장을 늦춘다면 국제사회가 얼마나 비웃을까? 한국의 노동조합법은 해고자 실업자 구직자는 물론이고 특수고용 노동자가 단 한 명이라도 가입하면 노동조합 전체를 불법화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국제노동기준과 결사의 자유를 모두 씹어 먹는 내용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한국은 노동조합 하기가 참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노동자들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대통령에 당선되려고 너도 나도 특수고용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던 것 아닌가? 특수고용 문제는 무려 20년 묵은 과제이다. 이제는 풀고 가야 한다. ILO 기본협약을 당장 비준하고, 노동조합법 제2조의 ‘근로자’ 개념만 조금 확장하면 되는 일이다.

오는 4월 13일, 전국의 특수고용 노동자들 수만 명이 서울로 올라온다. 화물트럭·레미콘·덤프트럭 기사, 대리운전·퀵서비스·택배 기사, 간병인, 학습지 교사, 보험모집인, 방과후 교사 등 업종과 하는 일은 모두 다르지만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ILO 기본협약 비준과 노조법 2조 개정이 이들의 핵심 요구이다.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의 제2조 문항이다. 노조 할 권리에는 차별이 없어야 하며 사전 인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판정에 따르면, 결사의 자유는 일반 자영업자에게도 제한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한국의 특수고용과 같은 유형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너무 늦었다. 차별 없이, 사전 인가 없이, 특수고용에게 노조 할 권리를 즉각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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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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