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말까지 금융부실 문제를 해결할 개혁플랜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해온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일본 금융상 겸 경제재정상이 칼도 빼지 못하고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다.
민주, 자유, 사민, 공산당 등 일본 4개 야당은 24일 다케나카 금융상 겸 경제재정상에 대해 사직을 권고하는 문책 결의안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제출했다. 다케나카는 이미 23일로 예정된 '부실채권 처리문제 중간보고서' 발표를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반발로 이달말로 연기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야당으로부터 문책 압박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말 그대로 정치권의 융단 폭격이자, 조직적 저항이다.
***일본 기득권층의 '타도! 다케나카'**
다케나카가 이처럼 일본 정치권의 '공동의 적'이 된 것은 그가 마련한 금융개혁안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고이즈미 총리의 결재까지 마친 다케나카 장관의 보고서에는 건전성이 취약한 은행에 대한 국유화,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경영진 퇴진, 은행권에 대한 자산산정 방식 강화 등의 고강도 처방이 담겨져 있었다.
이 개혁안대로 금융개혁이 단행될 경우 일본 주요 시중은행의 절반 가량이 국유화되고, 이들 은행의 임직원이 무더기 해고되며, 이들 은행에서 돈을 빌어 연명해온 일본 부실기업과 야쿠자들의 연쇄도산이 예상됐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당연히 금융계와 재계, 정치권이 집단저항에 나섰다.
은행권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하면 양키들 배만 불려줄 것"이라고 반발했고, 이들 은행권의 로비를 받은 자민당 등 일본 국회의원들은 "과격하다" "디플레이션 대책부터 마련하라"며 저항했다. 야쿠자들 사이에서도 '타도! 다케나카'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다케나카는 고이즈미 총리의 결재까지 받은 뒤 23일로 예정했던 '부실채권 처리문제 중간보고서' 발표를 이달말로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실채권 처리문제가 또다시 표류할 움직임을 보이자 지난주 내내 상승세를 이어가던 닛케이 평균 주가도 다시 내림세로 반전, 24일 8천7백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케나카, 칼 뽑기도 전에 부러질 위기**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최신호(10.28자)에서 "다케나카의 공약은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그것과 흡사하다"면서 향후 전망을 어둡게 내다봤다.
불황이 본격화된 1992년 이래 일본은 10여차례 금융구제계획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집권당 정치인, 좀비 기업, 관료, 조직범죄단체 등으로 이루어진 부패세력들의 저항에 부딪쳐 번번히 무위에 돌아갔다.
특히 일본의 금융통계는 부실채권이 얼마인지 신뢰할 수 없기로 유명하다. 미국 주요 금융기관들이 일본지점을 통해 매입한 비교적 깨끗하다는 우량채권조차 그중 20%가 일본 야쿠자들과 연계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 하나의 예이다. 해당 금융기관 관계자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금융개혁을 단행할 경우 야쿠자 연계 채권은 전액 손실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부실채권 중 야쿠자와 연계되지 않은 것은 '좀비기업'들에 물려있다. 이들 기업들의 주가는 현재 대부분 1달러 미만이다. 이들 기업들은 주로 건설, 소매업, 부동산, 제조업 등에 집중되어 있다. 깨끗이 부실을 털어내자면 이들 기업 대부분과 수많은 중소기업들의 파산이 불가피하다. 일본금융성 부실채권 책임자인 스즈키 아키히사에 따르면 부실 기업들을 제대로 정리하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0%가 감소할 지경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의 3개 대형 은행과 1개 주요 증권사가 파산한 이후 일본의 금융계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일본 금융전문가들의 표현을 빌면 '말기암' 단계다. 고이즈미총리가 금융개혁에 저항하던 야나기사와 하쿠오 금융상을 해임하고 다케나카를 임명한 것은 더이상 현상황을 끌고나갈 수 없다는 극한적 위기감의 발로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부실채권 처리 문제를 놓고 현재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부실기업과 은행을 퇴출시킨다는 원칙을 관철하려는 다케나카 장관이 정치권의 저항에 끝내 굴복할 경우 일본의 경제개혁 세력 자체가 부실 판정을 받게 돼 국가신인도가 또 한차례 추락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사람 중 70% 이상이 다케나카가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개혁을 하기도 전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이들의 예상대로 다케나카의 칼이 뽑기도 전에 부러진다면, '일본발 금융공황'이 눈앞 현실로 나타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는 삼엄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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