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공장의 불빛은 꺼지고**
중앙일보에 이어 조선일보도 국민신당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12월17일자 1면 톱에 "이회창-김대중 선두 각축"의 타이틀로 기사가 나가자 16일밤 국민신당의 항의 데모데가 이 신문을 공격했다. 이 기사가 특정후보를 밀어주기 위한 '의도적인 제작'이라고 규정한 이인제 국민신당 캠프는 당원들을 동원, 조선일보 사옥을 봉쇄하고 이 신문의 지방판 인쇄를 대행하고 있는 부산, 대구, 창원의 지방 신문사에 몰려와 인쇄중단을 요구하고 신문 발송을 저지했다.
조선일보는 서울 일원에 배달되는 시내판 신문에 이 사실을 보도하고 "선관위의 유권해석을 받은 기사에 대한 언론자유 침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표면적으로 보아서는 객관적 보도로 볼 수 있는 신문 기사에 시비를 걸고 나선 국민신당의 태도는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보여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국민신당으로 볼 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거 막바지에서 각 후보의 선거 캠프와 언론계는 10%내지 20%에 달하는 부동표가 당락을 좌우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하고 있던 터였다. 특히 이회창-김대중 후보가 박빙의 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부동표를 어디로 몰아가게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2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에게는 '두 후보로의 압축'은 유리해질 수가 있다. 더욱이 이회창후보는 3위로 뒤떨어져 있다가 다시 2위로 급부상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 흐름의 연결 양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지막 스파트를 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보도에 흥분을 한 것은 3위를 달리고 있던 이인제 신당이었다. 1위가 아니면 끝나는 게임에서 2위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보도가 왜 3위를 흥분시키고 '언론조작'으로 매도 되었는가. 국민신당은 2위였던 이인제후보가 이회창후보에게 추월당한 것은 언론의 편들기 탓이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인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막판 당락을 좌우한다는 부동표에 심리적 최면을 걸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 부동표는 대부분이 '반 DJ표'로 이회창 과 이인제 두 후보로 갈리는 표라는 것이 대부분의 선거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기권율이 높으면 'DJ 당선'이 틀림없다는 공식이고 이들이 투표에 참가, 푸표율이 높아지면 그 공식이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보아왔다.
2위 이회창후보와 3위 이인제후보의 격차가 오차 범위 이내에서 접전중일 경우 따라서 이들 표가 누구를 지지하게 되느냐는 2위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당락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일단 이회창과 오차 범위 안에서 접전중이라고 보고 있었던 이인제 캠프는 조선일보식의 보도가 나갈 경우, 표는 이회창으로 몰려가도록 하는 암시작용을 할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의 부동층 유권자들은 '기완이면 유리한 쪽을 민다'는 성향에 이 분석은 기초하고 있었다.
3위에서 2위로 그리고 이제는 박빙의 차로 "김대중-이회창"의 순열이 아닌 "이회창-김대중 선도 각축"으로 유권자들에게 '대대적인 선전'을 하고 있는 기사는 결국 누구에게 표를 돌리라는 암시냐는 것이다. 이들이 '반DJ' 세력이라는 전제를 놓고 볼 때 찍을 사람은 '될 가능성'이 높은 이회창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상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이때 여론조사에서 이인제후보가 파고들고 있었던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32%의 유권자가 막판까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문제의 기사를 이런 상황공식에 대입시켜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하루 전 같은 사안으로 중앙일보가 '언론 공작'의 혐의를 받은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방향의 대선 흐름을 전파한 것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신당은 이인제 후보가 '뜨고 있을 때' 이회창 후보가 스스로 용퇴의 결단을 내리라고 주장한 칼럼을 조선일보가 내보냈을 때는 이 신문에 박수를 쳐 준 바 있었다.
이 사건을 끝으로 하고 일단 선거운동은 막을 내리고 투표일을 맞았다.
1997년 12월18일 목요일.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하였다. 이날 총 유권자의 80.5%인 2천5백96만9천5백62명이 투표권을 행사했다. 개표는 처음부터 김대중-이회창후보의 시소로 나타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는 '피를 말리는' 개표결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다. 그는 1천32만6천2백75표{40.2%)를 얻었고 이회창 후보는 9백93만5천7백18표(38.7%)를 획득했다. 불과 39만여표의 차이였다. 이인제후보도 4백92만표를 얻어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주었다.
대권 도전 4수 만에 DJ는 성공했다. 하루 아침에 그는 국가, 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전 매스컴은 그의 지난 정치행로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목숨 건 반(反)독재투쟁"
"3전4기의 집념"
"마침내 꽃 핀 인동초"
.......
그의 승리의 진정한 의미는 50년 헌정사에 처음으로 진짜 정권교체를 이룬 데 있다고 평가했다. 당선이 확정된 날 아침 DJ는 "지금 이 나라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활착하는 시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언론들은 그의 당선 요인은 DJT 연합, IMF 쇼크로 드러난 경제위기에 대한 집권당 비판, 정권교체의 요구 등이 복합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복합 요인들을 뭉쳐 이끈 것은 역시 지역세력이었다. 그는 호남에서 95%라는 몰표를 얻어냈다. 물론 반 DJ의 TK-PK지역이 그에게 등을 돌린 현상은 여전했다. 이른바 지역 감정이 이 선거에서도 결정적 흐름이었다. 지지율을 나타내는 지도는 '서 대중-동 회창'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그래픽을 보여 주었다.
그의 반대편에서 투표를 했던 사람들과 반대 지역의 정서는 결코 환영 일색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DJ는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운기를 잡는 행운을 얻었다. 바로 국가경제 위난의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맡아도 어려운 시대이며 결코 난국을 헤쳐나가기 힘든 시기라는 일반적 평가여서 그 역시 곧바로 YS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위기는 정치적 반대 세력의 비판과 공격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코 그와 친화적이라고 할 수 없었던 조선일보는 그가 당선되던 날 사회면 전면을 통 컷으로 터 "새 대통령에 힘 모아줘야"라고 국민단합과 지지를 호소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을 통해 "당선자에게 힘을 밀어주자"고 했다. 이것은 한국 언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국가주의가 발동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하는 쪽 역시 바로 그 다음날부터 국가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DJ의 당선으로 전 사회가 들뜨고 탄식하던 날 한 정치인의 실루엣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스쳐 갔다. 연합 함대를 만들어 그를 대권에 성공하도록 만든 JP였다. 이날 그는 로맨티스트의 면모가 풍겨나는 글을 띄워 보냈다.
"그에게 있어 대통령 당선은 파란만장한 40년 정치역정의 또다른 출발이자 마지막 종착점이다. 출발인 이상 새로움으로 국민에 기대에 부응할 것이며 종착인 이상 후회를 남기지 않는 마무리가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과오는 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도 마찬가지다. 말을 바꾸기도 하고 약속을 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 보지 말자.
정치인은 집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온전하게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여러 일들은 이제 접어두자. 김대통령 당선자는 편견의 희생자며 그에게는 애증이 심하게 엇갈려 있다. 그에 대한 격렬한 호오나 애증은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경영하는 데 귀중한 교훈이 되고 귀감이 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밑고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그의 국가경영을 지켜보며 성원할 것은 성원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국민의 주권의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으로까지 매도됐던 집념의 대통령 예비자였다. 그만큼 준비는 완벽하다. 한 번 기대해 보자.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고 공동정권의 한 축으로서 동반의 길을 나섰다.
김대통령 당선자는 부끄러움이 많고 겁이 많은 자기자신을 오직 신념을 갖고 극복했고 이것을 겁많은 자의 용기라고 스스로 평하고 있다. 김대중을 사랑해야 한다. 김대중의 인내와 극복, 집념과 승리를 사랑하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다.
나는 김대통령 당선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 단일후보 결정과정에서도 이 큰 빚을 갚는다는 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위로도 있었음이 사실이다. 후보 단일화문제를 마지막 정리한 지난 10월27일 밤 서울 신당동 나의 집을 방문한 김대중 총재는 말했다.
"나나 김종필 총재는 다같이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으로서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사람이다. 진정으로 민주발전을 이룩하고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자손손 어떻게 되겠는가. 나를 믿어달라."
나는 그의 진실과 진정을 믿는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목격하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다짐했을 것이다. 김대통령의 실패는 독선과 위선과 무지의 정치, 가신들에게 둘러싸인 부패한 파당의 정치에 있다. 그는 이같은 잘못은 결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김대통령 당선자의 영광은 집권에 있지 않고 나라에 대한 헌신과 국민에 대한 봉사에 있다. 두 번의 사형선고를 포함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굳건히 일어선 그의 의지와 신념은 오늘의 국가위기를 이겨내는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는 이제 길고 험했던 그 인고의 세월을 조국을 위한 마지막 헌신으로 후회없이 끝맺음 할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으로서 그가 이뤄낼 정치의 실체는 말과 약속이 아니라 행동이며 실천이다.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과 신념을 갖고 현실을 뚫으며 고집스럽게 전진해야 한다. 그런 의지와 결단이 김대통령 당선자에게는 있다. "인자불우(忍者不憂). 지자불혹(知者不惑). 용자불구(勇者不懼)"라고 논어는 말하고 있다. 걱정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의 일생을 일관했던 집념과 의지는 반드시 국난을 극복하고 조국의 영광을 다시 이룩해 낼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상처뿐인 DJ의 정치적 승리는 새로운 고난의 시대를 앞두고 시작되었다. 미증유의 경제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그는 정권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1천5백억달러가 넘는 외채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까발겨지고 IMF를 위시한 대규모의 구제금융, 그리고 그에 따른 무자비한 채권자들의 요구조건들은 핵 폭탄에 비유될만한 경제 낙진을 뿌려 놓았다.
화려했던 경제 현장의 불빛은 석유위기와 석유대란을 소설로 엮어냈던 폴 애드멘이 묘사한 것 처럼 "하나 둘씩 꺼져갔다". 지난 1년 세미 코마 상태에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코마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는 위기 신호가 곳곳에서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햄릿의 독백을 떠올렸다.
"투 비 오어 낫 투비. 뎃스어 퀫션(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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