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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 큰손'들의 한국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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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파란 눈 큰손'들의 한국 엑소더스

<손광식의 '1997 비망록'> (44) 달러의 철수행렬

***44. 달러의 철수행렬**

월요일과 화요일에 걸쳐 일어났던 '금융대란'은 조금씩 진정세를 보였다. 뉴욕증시의 회복을 기점으로 세계증시는 다시 반등세의 흐름을 보였다. 서울 증시도 500선을 하룻만에 회복했다. 그러나 환율은 여전히 치솟아 외환시장은 마비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급기야 정부는 금융종합 안정대책을 마련했다.

채권시장을 98년 1월부터 조기 개방하고 11월부터 현금차관 도입을 확대하며 1만달러 이상 외화를 살 때 실수요 증명제를 강화하는 등 달러 더 들여오고 덜 쓰게 하는 조치를 강구했다. 부총리 강경식은 이 대책을 발표하면서 별도 담화문을 통해 환투기 및 주식 뇌동매매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같은 금융대란 속에서 '증시 애사'가 재현되었다. 주식에 투자한 명퇴자는 퇴직금을 날리고 망연자실 했으며 주부는 이혼당하고 정신질환자가 급증하는가 하면 자살자도 나오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대기업 상무로 있다가 명퇴를 하게 되어 받은 2억5천만원중 1억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주가폭락으로 불과 몇 달 사이에 원전이 2천만원으로 줄어들어 허탈감에 빠진 사람의 얘기가 확대 보도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갈브레이스는 금융대란의 원인은 실물경제와는 동떨어져 움직여 온 금융흐름에 원인이 있다고 갈파했다. '부익부'가 난숙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함정'인 듯 했다.

경제흐름이 위기의 심각한 징후를 드러내는 가운데 기아문제의 해결에 '아킬레스 건'처럼 된 김선홍회장이 10월 29일 사퇴했다. 김회장은 이날 여의도에 있는 기아사옥에서 기아사태 발생 1백7일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미리 준비한 '기아정상화를 염원하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지난 여름 갑작스러운 부도유예협약의 된 서리를 맞은 이래 지금까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었다. 그동안 정부의 공평하지 못한 처사에 분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온갖 음해성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 모두가 본인의 부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아의 수레바퀴를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열정과 기업회생에 일생을 바친다는 각오로 만난을 헤쳐왔다.

신뢰와 대외이미지를 생명으로 하는 자동차 메이커에 법정관리가 부적절하다는 것은 확고한 소신이다. 정부는 약속한 지원조치를 하루 속히 현실로 옮겨 기아가 조속히 정상화의 궤도에 올라 설 수 있도록 부탁드리며 법정관리의 조기 해제로 기아의 활력을 옥죄는 멍에가 시원하게 벗겨지길 바란다.

기아 제3자 인수를 배제하고 전문경영인체제의 국민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기아 내부 경영자로 회사를 정상화 시킨다는 정부의 방침은 기아의 염원과 합치되는 것으로 이를 공식화해 준 정부의 배려에 감사한다. 자동차사업은 한시도 중단이 있어서는 안된다. 기아 노조원 여러분은 한시라도 빨리 작업현장에 복귀해 우리의 고객을 안심시키자. 기아는 내 인생의 전부이며 이 순간 기아가 나의 숙명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봉고신화로 기아를 회생시켜 한국의 아이아코카라고도 일컬어졌으며 40년을 한 직장에 몸담아 회장직에까지 올랐던 김선홍은 전문 경영자 시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인물. 개방 자율 시장시대에 그가 퇴진하게 되는 것은 묘한 뉘앙스를 주었다. 족벌주의 오너경영체제에 대한 전문경영인의 도전과 실패라는 측면은 그러나 언론에 의해 깊이 있는 분석과 의미를 끌어내지 못했다. 경제의 비상사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강추위의 기습으로 10월은 마감됐다. 첫 눈이 내렸고 기온은 빙점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급강하 현상을 보이고 있는 원화가치와 주식값은 '평년 기온'으로 회복될 아무런 징후도 나타내지 않았다. 환율은 한때 9백84원까지 치솟았고 잠시 반등하여 5백선을 회복하는 듯 싶던 주가는 다시 맥없이 5백선이 무너졌다. 급기야 정부는 외환시장 적극개입을 공표하고 해외여행자의 경비라도 출국 전 5일 이내에만 달러로 바꿀 수 있게 하는 등 '달러 가수요 억제조치'를 발표했다.

달러 값이 뛰자 인플레의 그림자가 시장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정유회사들은 11월부터 휘발유값을 리터 당 18원 올려 받겠다고 통상산업부에 신고했다. 막대한 환차손을 입고 있는 항공업계도 요금인상을 가지고 교통부와 협의에 들어갔다. 신문지면에는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인플레 경계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환투기에 가수요까지 겹치자 암달러상들이 '부활'했다. 외국 기업들과 외국인들은 주식을 던지고 달러를 챙기기에 바빴다.

최근 3개월 동안 외국인의 주식 순매도액은 1조2천억원이 된다는 것이 공식집계였다. 외국인의 주식투자액은 12조원 정도로 시가총액으로 하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13%수준. 외국인들이 외환시장에서 바꿔가는 달러는 매일 5천만~1억달러선에 육박했다. 가히 '파란 눈의 큰손들'이 일으키고 있는 대파란이라 할 만 했다.

재계 순위 24위의 해태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제과. 음료. 유통. 상사 등 주력 4개사에 대해 화의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는 한편 산업. 전자. 중공업등 3개 회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해태그룹의 금융권 여신은 은행권 1조4천8백76억원, 종금사등 제2금융권 1조8천8백억원등 총 3조3천6백76억원인데 이중으로 계상된 지급보증분을 빼면 2조9천8백70억원으로 집계되었다. 해태 바로 다음의 재벌 랭킹자리에 있는 뉴코아 그룹도 결국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화의를 신청했다. 얼마 전 채권은행단으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은 이 그룹은 자금지원으로 곧 회생이 될 것이란 판단을 받은 바 있는데,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위기에 몰린 것이다.

해태의 자료에서 나타났다 싶이 은행보다 제2금융권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과 이제까지 최대 재벌 지원세력이었던 금융이 철수함으로서 도산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 외적인 의미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은행의 목을 쥐고 흔들던 재벌이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금융단이 재벌들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입장변화이다.

정치 마당은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10월30일 YS는 이인제와 청와대 단독회동을 가졌지만 별다른 이벤트는 없었다. 이지사는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면서 신한국당을 이탈한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였다고 해명했다. 이인제는 이른바 YS와의 '정치적 부자관계'로 해서 야기될지도 모를 의혹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고, YS는 공개적인 후보회동이라는 것을 계산하여 신한국당 이탈을 질책하는 제스쳐를 쓰고 공명선거 집행을 다짐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징후가 감촉되는 일이 생겼다. YS의 정치적 동지 황명수 신한국당 중앙위 의장이 돌연 탈당을 해 버린 것이다. 서석재. 서청원등 '반 이회창'라인과는 달리 황씨는 이회창 총재를 지지해 왔던 민주계 원로였었다. 그의 정치행동은 불가분 YS의 의중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묘한 시간에 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신한국당 이탈에 이어 곧바로 서석재․김운한․한이헌의원등 이른바 PK 3의원이 탈당했고 다시 뒤를 이어 박범진․이용삼․김학원․원유철의원이 당을 떠났다.

정치계절에는 언행 자체가 정치적 해석을 유발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때로 구설수가 되기도 하고 특정세력 특정인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어 흐름 자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한 기도문이 표적이 되었다. 김추기경은 10월28일 명동 성당 안에 있는 성바오로수녀원에서 대학발전후원회 만찬 모임을 가졌다. 이 만찬회에는 후원회 회장인 이회창 총재, 운영위원장인 최병렬의원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김추기경은 만찬에 앞선 기도에서 "이회창 후보가 앞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빈다"고 했다.

뒤이어 이총재의 인사 후 봉두완이 일어나 "추기경은 평소 이총재가 구 정치의 구각을 깨뜨리고 새롭고 깨끗한 정치를 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안다"고 소개했다. 어떻게 보면 이날 모임의 또다른 뜻은 자연스럽게 김추기경이 이총재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였다. 추기경 비서실은 "그런 해석은 무리"라고 즉각 해명했지만 여기에 그냥 넘길 수 없는 얘기가 있었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바로 김추기경의 권고와 격려에 의해 결단되었다는 이총재 가족쪽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떤 결합점,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 DJ에 대한 십자포화로 결합될 지점을 향한 움직임인지 알수 없으나 김추기경의 '기도'와 더불어 몇가지 기류가 정치 외각에서 흐르고 있었다. 도하의 각 신문에는 이 즈음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5단 통광고가 실렸다. '어떻게 세우고 지켜온 나라인데...'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15대 대통령 선거 이대로 치를 수 없다'라는 부제를 달고 구국선언문과 결의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국선언문을 보면 보수우익의 광고라는 것이 분명했다.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이라는 광고주명의의 제일 머리에는 자유민주민족회의의 이철승이 나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결의문. 내용은 이랬다.

"친북좌익세력을 척결하여 완벽한 국가안보태세를 확립한다. 전국민이 단결하여 북한을 자유, 개혁, 개방시키는데 총진군한다. 역사바로세우기와 개혁의 이름으로 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사회 각게 각층에 친북 좌익세력이 침투. 암약하게 한 현 정권을 규탄하며 실종된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정치인의 정경유착, 부정축재, 탈세에 대해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하여 법과 질서와 도덕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국민대다수의 의사가 무시되고 국민단합이 파괴되는 결과를 막기 위해 결선투표제의 채택을 관철한다. 군을 효율적으로 통수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있는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친북적 후보는 배격한다."

YS정권을 비판하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지만 이 광고가 표적 삼는 인물은 비록 명기를 하지 않았지만 DJ였다. 이 광고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DJ는 광주에서 있은 TV토론에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자신의 생각을 개진했다. 그는 토론회에서 "우리가 집권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 사면하겠다"고 밝히고 한총련과 관련, "단체에 속했다는 것과 이적행위를 한 것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라며 "단체에 가입했다는 것만으로 탄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튿날 조간 톱 기사를 이 발언으로 올리고 검찰 안기부가 긴급대책회의를 하고 있다고 이슈화했다. 검찰은 긴급구수회의를 갖고 대응책을 협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으나 국민회의 측의 해명으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DJ의 광주발언은 어떻게 보면 그의 지성인적 면모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수 있겠지만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라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 나온, 반대쪽에서 볼 때는 오만한 정치적 발언일 수도 있었다. 특히 국민회의에는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을 비롯하여 과거 'DJ 대책 특수팀'의 팀장이었던 이부성, 안기부 제1특보 출신인 이병용 등이 입당 합류하여 '레드 컴플렉스'에 대해 이미 울타리를 쳐놓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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