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노동3권이니 1~2개쯤은 깎아줘도 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노동3권이니 1~2개쯤은 깎아줘도 돼?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청와대 입성 전과 후가 다르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놓고 쟁점이 되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하철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 문제이다. 당장 설치하라는 장애인들 요구와 비용·예산상 문제 때문에 어렵다는 정부 입장이 부딪힌다.

"양쪽 모두 한발씩 양보해서 타협점을 찾아갑시다."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 누군가 중재에 나서기 시작한다. "50 : 50으로 타협 봅시다.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자는 장애인 측 요구를 수용하되, 비용·예산 문제가 있으니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민규

기본권 할인? 기본권 제로!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목적지인 지하철 지상 역사의 50%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지상 역사 끝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이동할 권리’는 절대 보장되지 않는다. 50 : 50으로 타협점을 찾아 기본권을 50% 할인해준 결과, 장애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임금 교섭이라면 얼마든지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노동조합의 요구가 100이라 해서 끝까지 100을 고집하진 않는다. 70~80선에서 타협하기도 하고 심지어 20~30 수준에서 합의가 이뤄지기도 한다. 수치로 계량이 가능한 노동조건들, 이를테면 노동시간이나 유급휴가 일수 같은 것도 다양한 수준에서 타협이 가능하다.

하지만 권리, 특히 장애인의 이동권과 같은 ‘기본권’은 할인하거나 깎아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 투표권을 다른 사람에겐 1표만 주면서 홍길동에게만 2표를 주는 할증도 불가능하다. 기본권은 글자 그대로 ‘도 아니면 모’다. 200%도 50%도 아닌 딱 100%를 보장하거나 아니면 보장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지 그 사이 타협점은 없다.

노동 3권이니 1~2개쯤 깎아줘?

물론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 적은 없다. 하지만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유독 '노동기본권'에서만큼은 곳곳에서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왔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 부르기도 하니 3개의 권리 중에 1~2개 정도는 더러 할인해도 되는 게 아니냐는 식이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교사·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이다. 교원노조법(1999.1 제정)과 공무원노조법(2005.1 제정)은 각각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률들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교사·공무원을 제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보장하되 단체행동권은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그래도 노동 3권 중에 2권을 주었으니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보장한 것 아니냐?" 정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국제사회에 이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ILO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답변은 명확했다. 그것은 명백한 국제노동기준 위반이라는 것. ILO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수차례 교사·공무원의 단체행동권 보장을 권고하고 촉구해왔다.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노동기본권을 구성하는 3개의 원리이며, 3개 중 어느 하나라도 보장되지 않으면 노동기본권을 통째로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섭과 단체행동을 위해서는 단결권이 전제되어야 하고, 교섭·단체행동이 부정된 단결권은 결사의 자유를 무력화시킨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한다며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를 만들어버린 꼴이다.

반층짜리 엘리베이터 만드는 한정애 법안

ILO 협약은 노동기본권은 물론이고 정치활동의 자유도 결사의 자유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선언한다. 지난 2월 8일 'ILO 협약·권고 적용에 관한 전문가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사·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하는 한국의 국가공무원법 65조가 정치적 견해에 기초를 둔 차별을 금지하는 ILO 111호 협약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단체행동권 박탈을 시정하라는 권고에 이어 정치활동의 자유를 가로막지 말라는 권고까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위상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태이다. 게다가 전문가위원회가 문제 삼은 111호 협약은 1998년에 이미 한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이다. 이런 상태에서 여전히 ILO 핵심협약조차 비준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ILO 전문가위원회 보고서가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월 21일,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환경노동위 여당 간사)이 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하게 된다. 아, 드디어 집권여당이 정신을 차리고 국제노동기준을 지키려나? 하지만 기대는 한순간이었을 뿐, 내용을 확인하고 나선 실망과 한숨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정애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들은 퇴직 교원과 퇴직 공무원들의 노조 가입여부는 노조 규약으로 정하도록 하는 수준의 개정안이다. ILO가 수차례 권고해온 단체행동권과 정치활동의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면서 법안 발의 목적에는 버젓이 "노동기본권 확대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국제 수준에 맞도록 단결권을 보장하려는 것"이라 적어놓다니.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약속을 어겼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문재인 정부는 교사·공무원의 단체행동권, 정치활동의 자유는 고사하고 '전교조 합법화' 문제 하나 해결하지 않고 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전교조 합법화는 기본 중의 기본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핑계, 저런 구실로 지금 이 순간까지 전교조에 가해진 족쇄를 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계만이 아니라 참여연대·민변을 비롯한 시민사회까지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고 나서자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직접 나섰다. 작년 11월 22일,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전교조 문제와 탄력근로제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정부 방침을 소개한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이 전교조 합법화 관련 문재인 정부의 방침을 소개하며 링크한 <오마이뉴스> 기사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같은 날(11월 22일) 전교조 합법화를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교원노조법 개정안을 최대한 정기국회 내에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브리핑한 내용이다. 그들이 언급한 교원노조법 개정안은 무엇이었을까?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법안들

2016년 당시 국회 환노위원장 홍영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법안을 말한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회에 계류 중인 홍영표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교조 합법화는 해결된다고 얘기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교조는 법외노조 상태인 걸 보면 홍영표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적폐세력인 자유한국당이 훼방이라도 놓은 걸까?


<인사이드 경제>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에 접속해 홍영표 개정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2016년 11월에 발의된 후 2017년 2월에 상임위 전체회의에 ‘상정’ 절차를 밟은 후 정지 상태이다. 실질적인 법안 논의가 이뤄지는 고용노동 법안소위에는 회부된 적도, 심의된 적도 없다.

2017년 2월에 환노위 상정 뒤에도 무려 1년 3개월 동안 국회 환노위원장 직을 유지했다. 그 사이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미명 아래 휴일 중복할증을 폐지한 근로기준법 개악, 온갖 수당과 상여금을 다 최저임금에 포함시킨 산입범위 확대 등을 주도한 인물이 홍영표 의원이었다. 2016년에 본인이 직접 발의한 법안은 심의조차 하지 않고 온갖 악법만 통과시킨 것이다.

환노위원장을 그만 둔 뒤에도 홍영표 의원은 여당의 원내대표를 맡고 있다.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상임위 상정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의도 안 되고 있는 상태이다. 결과적으로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도, 조국 민정수석도 사기를 친 꼴이 되었다. 도대체 뭘 봐서 정기국회 통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인가!

청와대 입성 Before & After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직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에 발의된 홍영표 개정안, 그리고 문재인 청와대 입성 후에 발의된 한정애 개정안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ILO가 수차례 권고해온 교사 노동자의 단체행동권 보장 여부이다. 내친 김에 지난 2월에 발의된 한정애 개정안과의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홍영표 개정안은 쟁의행위 금지 및 처벌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인 반면, 한정애 개정안은 여전히 단체행동권을 금지한다. 물론 홍영표 개정안은 교원의 업무를 공익사업으로 규정해 노조법상 필수업무 유지의 규제를 받긴 하지만, 한정애 개정안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게다가 한정애 개정안은 기존 법에 없던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까지 끌어왔다. 노동계가 대표적인 악법으로 규정해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창구 단일화를 교원노조법에까지 적용함으로써, 교사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에 이중 삼중의 올가미를 씌워놓은 꼴이다.

조합원 자격 부분에서 2개의 개정안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개정안 취지를 설명한 대목은 분명히 다르다. 한정애 개정안은 건조하게 퇴직 교원의 노조 가입을 규약으로 정하도록 한다고 설명할 뿐이다. 반면 홍영표 개정안은 조합원 자격 확대를 통해 △해직 교사 △기간제 교사 △구직 중인 교원자격 소지자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다시말해 홍영표 개정안은 교원의 업무를 ‘공익사업’으로 규정한 부분만 빼면 그동안 노동계가 요구해온 내용, ILO가 권고해온 국제노동기준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한정애 개정안은 ILO 권고조차 무시하며 단체행동권을 금지하고 창구단일화 규제까지 덧붙이며 기본권을 할인하는 반층짜리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버렸다. 청와대 들어가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