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이 문제다. 이라크전만 발발하지 않는다면 당장 금리를 올릴 텐데..."
한국은행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지난 주 미국에서 열린 국제금융회의에 다녀왔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금융전문가들이 참석한 세미나였다. 세미나 주제는 요즘 세계적 관심사인 과잉유동성과 이에 따른 자산 거품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회의에 모인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전 발발여부였다.
"두사람 이상 모이기만 해도 서로 하는 얘기가 과연 부시가 이라크를 칠 것인가였다. 대부분의 관측은 아무리 국제사회가 이라크전에 반대한다 할지라도 부시의 성격상 미국 혼자서라도 이라크를 칠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발발하면 주가 등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었다. 이라크전이 발발하면 아프간전때와는 달리 장기전이 되면서, 국내경제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클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의 전언대로 지금 미국은 이라크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수순밟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매일같이 이라크에 대한 폭격을 하고 있으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캐나다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미국을 겨냥한 테러 위협을 경고하고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며 "유일한 길은 테러 위협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 뿐"이라고 강조했다. 12일에는 UN총회 연설에서 이라크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할 예정이기도 하다.
***걸프전 당시, 미국경제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
이라크전이 발발하면 과연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같은 궁금증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자 한은 정책담당자는 한 편의 글을 참조해보라고 소개해줬다. 지난해 10월8일 미국-아프간 전쟁 발발직후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연구원이 <LG주간경제> 10월17일자에 발표한 '전쟁과 경제'라는 분석 보고서였다.
20세기에 발발한 전쟁과 경제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보고서의 요지는 "경기상황이 좋았던 시기에 시작된 전쟁은 단기적으로 경기와 고용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나, 경기가 하강기에 진입했을 때는 전쟁의 부정적 효과가 경기침체의 폭을 확대시킨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미국과 이라크가 최초로 격돌했던 걸프전(90.8.2~91.2.28) 당시의 상황이었다.
전쟁의 상대방이 이라크였던 점이나, 당시 미국의 경기가 침체기였고 대통령선거라는 정치일정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지금과 대단히 흡사한 때문이다.
"경기하강기에 시작된 전쟁은 경기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걸프전(90.8.2~91.2.28)의 경우 88년에 4.2%를 기록했던 미국 경제성장률이 89년 3.5%, 90년 2.4분기에는 0.9%로 급락하는 등 경기가 본격적인 하강기에 들어설 때 발생하여,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90.8.2)한 3.4분기부터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같은 당시 상황은 지금 미국경제가 처한 상황과 흡사하다. 90년대 장기호황을 누렸던 미국은 2000년 3월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과잉투자, IT(정보통신)경기 침체, 부동산 버블, 쌍둥이 적자, 분식회계 등 숨겨진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면서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있다. 이런 마당에 이라크전이 발발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 불황을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지배적 전망이다.
***유가급등에 따른 스테그플레이션 위협**
송태정 연구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쟁발발시 유가급등과 이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속 저성장)에 빠질 위험성도 경고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이번 전쟁(아프간전)이 제4차 중동전(10월 전쟁, 73.10.6~73.10.24)이나 걸프전과 같이 국제유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유가의 급등은 경제의 성장추세를 바꿀 수 있는 공급측면에서의 충격이기 때문에 경기의 흐름마저 반전시킬 정도의 파괴력이 있다.
미국이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73년중 경제성장률 5.8%의 호황을 누리던 미국경제가 74~75년 연속 마이너스로 추락하고 경기침체 속에 물가상승이라는 초유의 스테그플레이션에 빠진 것도 바로 중동전에 따른 유가상승의 결과였다."
이같은 분석은 특히 지금 중동의 반미감정이 사상최고 수준으로 고양돼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한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지금 부시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지배적 반대, 특히 중동지역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을 감행하려 하고 있다"며 "아프간전때 이미 악화된 중동지역 여론이 이라크전 발발시 더욱 악화되면서 유가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미 국제유가는 배럴당 30달러를 넘나들 정도로 이라크전 임박에 따른 영향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화환율이 강세를 보이면서 유가급등에 따른 충격이 완충되곤 있으나, 유가급등이 장기화할 경우 세계경제 동반침체에 따른 수출위축 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경기침체기의 전쟁은 주가에 '독약'**
이라크전이 발발하면 금융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송 연구원은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전쟁은 심리위축이라는 경로를 통해 전쟁초기 일시적으로 경기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예상하지 못한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향후 경제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져 소비와 투자 심리가 위축되기 때문이다.
걸프전 당시 생산자심리 지표는 46.6(90년 7월)에서 39.2(91년 1월)로, 소비자심리지표(미시간대학)는 88.2(90년 7월)에서 63.9(90년 10월)까지 급락했다가 그후 서서히 회복됐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경제주체들의 심리위축은 금융시장에서 주가하락으로 즉시 나타난다. 또한 전쟁중에는 일반적으로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나타나면서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채권에 대한 수요가 늘어 채권가격이 상승한다."
그의 분석에서도 알 수 있듯, 경기침체기의 전쟁은 주가에 '독약'이다.
걸프전 당시의 경우만 보아도 전쟁발발전 2천8백선이던 다우지수는 전쟁이 터지자 2천4백선까지 폭락했다가 원래 수준인 2천8백선을 회복하는 데에는 1년이 걸렸다.
걸프전 당시보다 지금 사정은 더욱 나쁘다.
걸프전 당시 미 연준은 경기부양 차원에서 전쟁발발전 8.0%였던 금리를 91년 2월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1.75%포인트를 낮춰 6.25%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지금 미 연준 금리는 지난해 9.11테러후 두차례 금리를 인하한 결과 39년만에 최저수준이다. 따라서 미 연준에게는 금리를 추가인하할 여력이 거의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전이 발발하면 속수무책으로 경기침체를 바라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발발 계획은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한 다분히 국내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논리'에 의해 세계경제의 생명선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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