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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총에는 충분한 자유를, 노조에는 온갖 규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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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총에는 충분한 자유를, 노조에는 온갖 규제를?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왜 노조에만 재갈을 물리려 하나

2016년 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삼성·현대차·SK·LG 등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해온 재벌그룹 총수들이 불려나왔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당시 벌어졌던 해프닝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 안민석 위원 : 지금 국민들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관련해서 광화문거리에서 6차에 걸친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여기 계신 증인들 중에서 그 촛불집회에 나가 보신 적이 있다,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 이승철 증인 (손을 듦)
■ 안민석 위원 : 당신은 재벌 아니잖아요. (웃음소리)

재벌도 아닌 분이 전경련 부회장?

이날 핵심 증인들은 대부분 재벌 회장들이었다. 안민석 의원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재벌이 공범임을 주장할 목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증인 중 한 명이 “재벌도 공범”이라 외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고 손을 들어버리니 안민석 의원도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손을 든 인물은 전경련 이승철 상근부회장이었다. 이재용·정몽구·최태원… 이런 '금수저'들과는 결이 다른 인물이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전경련 유관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에 몸을 담은 뒤, 30년 가까이 전경련에서 일해 온 경력의 소유자다.

안민석 의원 입장에선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촛불집회 나갔다고 손을 든 유일한 인물이 재벌 출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신은 재벌이 아니잖아요!”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이승철 부회장은 머쓱해져서 손을 내리게 된다.

이승철 부회장 입장에선 억울한 상황이었다. 안민석 의원 질문 내용은 '재벌' 중에서가 아니라 '증인' 중에서 촛불집회 참석자를 찾은 것 아니었나. 전국민에게 TV 생방송으로 중계된 이 해프닝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 주었다. "재벌 출신도 아닌데 재벌단체인 전경련에서 부회장이라는 임원을 맡을 수도 있구나!"

▲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참석한. 이승철 부회장(뒷줄 왼쪽). ⓒ연합뉴스

고위 공무원 출신 전경련·경총 부회장

내친 김에 <인사이드 경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홈페이지(http://www.fki.or.kr)에 들어가 회장단 면면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그만둔 2017년부터 권태신 상근부회장이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회장 1명, 부회장 13명, 상설·특별위원장 6명 중에서 현직 재벌 회장이 아닌 임원은 권태신 상근부회장과 정진행 국제협력위원장 뿐이었다.(아래 표)


그나마 정진행 위원장은 재벌순위 2위의 현대자동차 현직 CEO이다. 그러나 권태신 상근부회장은 청와대 비서관, 재경부 차관, 국무총리실 실장 등의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공무원 출신이다. 그런 분이 재벌단체의 부회장이라는 임원을 맡고 있다니 놀라운 사실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용자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김용근 상근부회장 역시 현직 CEO가 아니라 산업통상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공무원 출신이다. 경총의 회장 1명, 부회장 25명 중 기업의 현직 임원이 아닌 인물은 김용근 부회장이 유일하다. 그는 경총을 대표해 최근 탄력근로제 개악을 합의한 경사노위 관계자 중 1명이기도 하다.

왜 유독 노동조합에만 재갈을 물리나

2년 전 국정농단 청문회와 경총·전경련 임원 명단까지 살펴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직 CEO도 아니고 기업의 임원도 아닌 분들이 사용자단체 임원을 맡고 있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정부도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고, 노동조합이나 양 노총도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진 않는다.

그런데 정부와 사용자단체는 유독 노동조합에 대해서만은 문제를 제기하고 규제를 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ILO 협약 비준을 준비한다며 경사노위에 설치한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노개위)’에서 지난해 10월 공익위원들이 제출한 '의견 초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 해고자 및 실업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제한하는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 노동조합 임원의 자격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현실을 고려하여 노동조합의 규약으로 정하되, 기업별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재직 중인 근로자로 한정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지난 글에서 지적했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노동조합 임원은 "재직 중인 근로자로 한정하는 방향"이란 또 뭘까? 그런데 이 물음에 정부·여당이 답을 내놓았다. 작년 12월 28일, 국회 환경노동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한정애 의원이 공익위원 의견을 토대로 노조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 노조법 제2조 제4호 라목 삭제가 아니라 라목 단서조항 삭제
… 다음 각목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
라.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다만, 해고된 자가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경우에는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된다.
■ 노조법 제17조 제2항 단서 신설
“다만, 사업 또는 사업장에 조직된 노동조합의 대의원은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조합원 중에서 선출하여야 한다.”
■ 노조법 제23조 제1항 개정
"노동조합의 임원 자격은 규약으로 정한다. 다만, 사업 또는 사업장에 조직된 노동조합의 임원은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조합원 중에서 선출하여야 한다."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노조법 제2조 4호의 라목 전체를 삭제할 것을 한국 정부에 꾸준히 요구해왔다. 그런데 한정애 의원은 라목 전체가 아니라 라목의 단서조항만 삭제하자고 한다. 공익위원들이 말한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는 것은, 삭제하지 말고 꼬리표 하나만 떼어내라는 뜻이었나? 결국 노동조합에 대한 온갖 규제를 없애지 않겠다는 말이다.

공익위원 의견은 노동조합 임원에 관련한 것이었으나 한정애 의원은 이를 대의원에게까지 확장시켜 버렸다.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조합원"이 아니면 노동조합 임원도, 대의원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경총·전경련 등 사용자단체 임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제도, 제한도 하지 않으면서 왜 노동조합에 대해서만 재갈을 물리려 할까?

저렇게 쉬운 ILO 협약 원리도 못 지키나

지난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ILO 핵심협약의 하나인 제87호 협약은 결사의 자유에 대해 아주 쉽고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 노동자이건 사용자이건 차별 없이 결사의 자유를 누려야 하고, △ 만일 규제와 제한이 필요하다면 노동자단체·사용자단체 스스로 규약·규칙을 통해 정하도록 하며 △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래 87호 협약 내용 참조)

■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 공공기관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하여야 한다.

협약 내용이 그렇게 어렵나? 저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학위가 필요한가? 어떻게 된 게 법학박사이자 교수 타이틀을 갖고 계신 분들이 이렇게 한심한 논의를 하고 계신지, 그리고 정부·여당은 그 한심한 논의를 더 심난하게 꼬아놓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노조법 제2조 4호의 라목을 그냥 삭제하면 된다. 노동조합 임원과 대의원 선출에 대해서는 해당 노조의 규약으로 정하도록 하면 된다. 이미 노동조합들은 수십 년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규제가 있으면 규약을 통해 규제와 제한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채용상근자에 대해서도 조합원 자격을 부여하는 노동조합이 많다. 이런 내용은 모두 노동조합 규약·규칙에 정해놓는다. 또한 그들이 노동조합 임원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상근 직책을 사직하도록 규약에 정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 직책을 유지할 경우 임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고려 때문이다.

자본에겐 충분한 자유를, 노동조합엔 온갖 규제를?

"당신은 재벌이 아니잖아요"라는 소리를 들었던 전경련 이승철 전 부회장은, 노동조합으로 따지면 채용상근자 출신으로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경우다. 그게 가능한지 여부는 전경련 내부 규약이나 회칙으로 정하면 될 일이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임원·대의원 자격은 노동조합이 알아서 정하면 될 일인데, 왜 법까지 만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 말이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은 대부분 "노동자 및 사용자는",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으로 시작된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에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사용자단체에게도 온전한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경총·전경련 등 사용자단체에 충분한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정애 의원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한국 정부는 다시 한 번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제소될 가능성이 높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핵심 협약을 위배했다며 이를 시정하라는 권고 결정을 내릴 것임에 틀림없다.

ILO 창립 100주년에 맞춰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는 정부가 ILO에 제소된다? 문재인 정부는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투명하게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그 협약의 쉬운 원리대로 법을 개정하면 되는데, 굳이 애를 써가면서 욕을 먹으려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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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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