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석달째 가파르게 평가절하된 달러화 가치가 15일(현지시간) 마침내 유로화 가치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잇따른 분식회계 사태로 신뢰를 잃은 '주식회사 미국'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15일 런던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가치는 1유로당 1.0089달러로 1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뉴욕 외환시장에서도 1.0027달러로 거래를 마감됐다.
유로화는 99년 1월4일 1.1885달러로 거래되기 시작했으나 곧 1달러 아래로 떨어졌으며 2000년 10월에는 최저점인 0.8225 달러까지 밀렸다. 이처럼 최초 거래후 21개월 만에 유로화 가치가 30.75%나 떨어진 것은 '강한 달러' 때문이었다.
그 후 유로화는 어렵게 90센트 선을 유지, 지난 4월29일까지만 해도 90.38센트에 거래돼 왔다. 그러나 미국의 분식회계 사태가 터지면서 달러가치가 급락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유로화가 급등하면서 마침내 달러대 유로 환율이 역전되기에 이른 것이다. 2000년 10월 0.8225 달러까지 하락했던 유로가 22%나 오른 것이며 최근 석달간에 무려 15%나 급등한 것이다.
***"달러화 약세 앞으로도 계속될 것"**
문제는 앞으로 환율 전망이다. 달러화 약세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바닥권에 들어섰는가이다.
분식회계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환율전문가들의 지배적 관측은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더라도 낙폭은 15%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5%가 폭락했다. 달러 약세 행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컨설팅업체 4캐스트의 외환투자전략가 폴 베드나치크는 15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증시가 침체에 빠져있고 막대한 자금이 계속 월가를 떠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 기간 미 증시는 맥을 추지 못할 것"이라면서 "달러화가 유로화에 대해 일시적으로 반등기미를 보인다고 해도 얼마 못갈 것"이라고 말했다.
올드 뮤추얼 자산운용의 이코노미스트 머빈 앤소니도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기업들이 제시한 숫자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투자가들은 미국의 자산을 보유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면서 "유로는 올해말에 1.05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연간 4천억달러가 넘는 미국의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의 '강한 달러'가 먹힐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말 미국의 자산을 사들이기 위해 해외투자가들이 달러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증시의 침체로 달러수요가 급감하자 달러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외환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게다가 이날 달러의 추락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 나온 직후 발생한 것이어서 한층 주목된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는 16일 "미국 기업들의 분식회계 사태로 투자가들의 실망감이 커져가는 가운데 부시가 '미국의 경제는 튼튼하다'고 강조했으나 달러 하락과 주가 하락을 막는 데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IHT는 대통령의 연설에도 불구하고 다우지수가 4백40포인트나 폭락했다가 막판에 '바겐세일'된 주식들을 사려는 사냥꾼들이 매수에 나서 반등하기는 했지만 45.43 포인트 떨어진 8,639.19로 거래를 마감했다며, 부시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날 막판 반등에 대해 윌리엄스 캐피털 그룹 주식팀장 스티븐 칼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틈에 돈 좀 벌어볼까 하고 나서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환투기 세력들도 준동하기 시작**
최근 달러 하락의 주요원인으로 지난주 미국의 소비자신뢰지수가 급락한 사실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영국의 FT는 15일 "외환딜러들은 유로가치가 상승할 뚜렷한 요인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지난 12일 미국의 소비자신뢰지수가 예상밖으로 폭락한 것이 달러 약세를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외환전문가들은 소비자신뢰지수의 예상밖 하락으로 미국 경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더욱 깊어졌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보스턴 소재 투자은행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리서치팀장 애비나시 퍼서드도 F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소비자들이 마침내 비관적 전망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분석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환투기 세력들의 준동도 목격되고 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 런던 본부의 외환투자전략가 데이비드 블룸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달러가치를 보호해온 옵션 장벽(options barriers)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환투기세력들이 운용하는 파생금융상품의 95%는 환율 연계 상품이다. 따라서 요즘처럼 국제환율이 요동치는 시점에 당연히 환투기 세력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준동하기 마련이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철저한 머니게임 전문가들인 이들 환투기세력이 뛰어듬으로써 예측못한 대형금융사고 발발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유럽경제, 동반침체 위험성 증폭**
유로가치가 오른 것에 대해 일단 유럽인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경계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FT는 "유로가치 상승은 유럽 경제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미국 경제와 기업 실적에 대한 투자가들의 회의적 시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FT는 "유로가치가 오를수록 유럽의 경제성장이 어려워진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면서 "이는 주로 유럽 수출업자들이 유로존을 벗어나서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유로존 총생산량에서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독일의 경우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0.6% 성장에 그쳤다. 유로의 약세로 경쟁력을 유지했던 수출증대가 아니었다면 이나마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00년에 유로존 총생산량이 3.4% 증가한 것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실적이었는데, 이 역시 유로가치 하락에 힘입은 바 크다.
영국 BBC 방송은 유로화 강세로 유럽을 찾는 미국 관광객들이 급감할 것을 우려했다. 유럽국가에서 관광은 주요한 수출품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타격도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유로가치가 10% 오를 때마다 유로존의 GDP는 1% 가량 감소한다. 유럽중앙은행이 추정한 장기 연평균 성장률이 2~2.5%라는 점에서 이러한 수치는 충격적이다.
유로강세가 유로존에 위안을 주는 것은 수입가격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해 실질 가계소득과 지출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내수 침체가 유로존 경제회복에 상당한 악영향을 주어왔다.
***그린스펀의 입을 지켜보자**
유로가치가 오른 것이 유럽경제가 좋아서가 아니라 미국이 죽을 쑤고 있는 탓이라는 점에서 향후 달러가치의 향방은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Fed) 의장이 16일(현지시간) 발표할 경제전망과 이번 주에 있을 2.4분기 실적 발표에 달렸다는 것이 외환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증시 전문가들은 "만약 그린스펀이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면 달러가치 하락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외환투자전략가 모니카 팬은 "그린스펀은 미국경제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역할과 증시 침체로 인한 악영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부담 사이에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라면서 "그러나 달러하락 요인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고 지적했다.
RBC 도미니언 증권의 외환투자전략가 제레미 스트레치도 "미국증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달러 하락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