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버큰헤이드號를 아시나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버큰헤이드號를 아시나요?

'책 읽어주는 부행장'의 주말이야기<15>

김종욱 우리은행 수석부행장이 이번에 보내준 글은 월드컵 폐막후 '6월에 방출됐던 온 국민의 하나됨의 경험을 어떻게 승화시켜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삼성경제연구소 지식경영실의 이용규 과장이 발견한 글이라고 밝혔다.

이 과장은 이 글을 김 수석부행장에게 보내며 "영국의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는 훌륭한 전통이 위기때마다 영국민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켜왔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도 이번 월드컵에서 만든 6월의 신화를 떠올리며 '2002년 6월을 기억하라'는 전통을 만들어 불같은 열정과 에너지, 그리고 냉철한 질서가 융합된 멋진 유전자를 만들어 나가길 기원해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내드린 버큰헤이드호 이야기의 경우 특별히 누구의 글인가라기보다는 영국에서 내려오는 일반적인 이야기인 것 같다"며, 이 글의 출처를 명시한 홈페이지는 http://nongae.gsnu.ac.kr/~bkkim/won/won_38.html라고 밝혔다. 편집자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

영국에는 국민 모두가 긍지를 가지고 지켜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버큰헤이드호(號)를 기억하라"는 말이다.
항해중에 재난을 만나면 선원들이나 승객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다. 일찍이 인류가 만든 많은 전통 가운데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또 이처럼 고귀한 전통도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실로 인간으로서는 최대한의 자제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8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해군의 자랑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사병들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백30명으로, 1백30명이 부녀자였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새벽 2시. 승객들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담박에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부서진 판자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그 사이를 벌벌 기어 갑판으로 나가려는 사람, 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 때 파도가 밀려 배가 다시 한 번 세게 바위에 부딪쳤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침몰되어가고,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뱃꼬리(船尾)쪽으로 피신했다. 이들 모두의 생명은 이제 문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선상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되는 장교들도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사관들이었다. 남아 있는 구조선은 3척밖에 없었는데 1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백8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이 해역은 사나운 상어가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반토막이 난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 속으로 가라앉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더 심해 갔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승객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이제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승객들은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는 훈련시처럼 민첩하게 집합하여 열을 정돈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한쪽 편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관병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옮겨 타 일단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머리도 모두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얼마 후에 몇 사람이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용케 물속에서 활대나 나무 판자를 잡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날 오후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4백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 중의 하나인 91연대 소속의 존 우라이트 대위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모든 장병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바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라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들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이전까지는 배가 해상에서 조난될 경우 저마다 제 목숨부터 구하려고 큰 소동을 벌이곤 했다. 즉, 힘센 자들이 구명정을 먼저 타고 연약한 어린이와 아녀자들이 남아 죽어야 했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 이 '버큰헤이드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후로는 죽음 앞에서도 명예롭고 의연하게 혼란을 축소함으로써 여자와 어린이는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려낸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