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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와 열차 타고 '황국신민'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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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와 열차 타고 '황국신민'으로 가는 길

[기고] 조선 땅의 일본육군훈련소를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방의 전위지대인 조선에 지원병제가 시행되어 지원병 훈련소에서 용감무쌍한 인적 자원을 육성하게 되자 전 조선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혈서로 지원병이 되기를 원하는 충정 넘치는 미담과 이미 성전에 참가하여 장렬하게 호국의 혼이 된 용사들도 탄생하니 이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 인용문은 1940년 일본 잡지 <모던일본> 조선판에 실린 지원병 훈련소 방문기의 첫 문장이다.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공한다. 1938년에는 '이등 국민'인 조선인에게도 천황과 대일본제국에 충성할 기회를 주겠다며 조선 지원병제도를 운영한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충당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1930년대 중반은 일본이 조선 통치에 대한 자신감을 갖던 시기였다. 1919년 3월 항쟁 이후 불꽃처럼 타올랐던 반일 투쟁의 기세가 수그러졌다고 판단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안정적 지배 기반을 토대로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노골화했다. 조선의 지도층이라 불린 사람들은 독립을 허무맹랑한 이상으로 치부했다. 정재계에서 문화예술계까지 한때 '반일'을 이야기하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일본에 투항했다.

독립의 가능성을 1919년 3월 항쟁에서 찾은 '3.1 키즈'들의 상당수는 만주와 시베리아, 상해와 모스크바까지 오가며 힘을 쏟았으나 조선에서의 기반은 점점 위축되었다. 그 대신 일본의 집요한 점령 정책은 점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 특히 청년들은 내지가 아닌 반도 출신의 한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 1940년 모던일본 조선판에 실린 기자의 조선지원병훈련소 탐방기사

일제가 장악한 교육 과정은 조선의 열등한 역사를 한탄하고 일본의 지배가 당위이자 행운이라는 약육강식의 이론을 내면화 시켰다. 조선은 2등 국민이라는 근원적 한계가 있지만 차라리 일본에 붙는 게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메꾸는 현명한 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군대와 경찰, 언론과 문학, 미술과 영화까지 총동원된 결과였다.

3.1항쟁 때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갓난 아기였던 1940년대의 젊은이들이 통과한 시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조성된 시간이었다. 굶주림을 면하고 더 나아가 출세라도 할라치면 일제가 조선에 용인한 제도권의 밑바닥이라도 차지해야 했다.

많은 조선 젊은이 들은 일제가 열어준 그 작은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조선인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모집 정원보다 몇 배나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1940년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한 기자에게 훈련소 주임교수인 우미다 대령은 3000명 모집에 8만 3000명의 지원자가 쇄도했다며 훈련소 중축 계획까지 말할 정도였다.

야욕에 불탔던 사범학교 출신 한 조선 젊은이는 학교 교사직을 때려치우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혈서를 만주군관학교 지원서에 함께 넣기까지 했다. 조선인 지원병은 일본군으로서 목숨을 거는 대신에 특혜도 보장받았다. 비로소 조선인보다는 내지인에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도록 참정권 등 내지인만이 누리는 시민권의 일부가 당근으로 제시되었다.

비루한 식민지 백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일본군이 된다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지원병이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라고 부추기는 일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분위기 메이커들은 쟁쟁한 조선의 문인, 학자, 재계 인물들이었다.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이 같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2300만 명이 모조리 통과해야 할 필연, 당연의 과정인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천황께 바쳐서 쓸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목소리 높인 이는 1939년 <모던일본사>가 만든 제1회 조선예술상 수상자 춘원 이광수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는 말의 원작자는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이광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까지 일본은 거침없는 질주를 하던 시기였다. 조선의 해방 같은 일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출세의 시대였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고난의 시대요 조선 백성들에겐 암흑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제 지원병 훈련소를 찾아가 보자. 성동역에서 <모던일본> 기자는 지원병 생활을 그린 영화 <승리의 정원> 마지막 촬영에 나선 영화감독 방한준과 함께 열차를 탔고 또 우연히 일본에서 돌아오던 중이던 훈련소 주임교수 우미다 대령을 만났다. 성동역은 1939년 7월 25일 사설철도로 개통된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성동역은 지금의 제기동 한약방 거리 입구 쪽에 있었다. 성동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연촌-퇴계원-마석-청평-가평-춘천으로 이어진 철길을 달렸다. 또 이들 역 사이에 작은 간이역들을 설치했는데 이용자가 많은 경성에 가까울수록 촘촘했다.
▲간이역 묵동역으로 시작했던 신공덕역 사진 - 개발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던일본>기자 일행을 태운 열차는 성동역을 출발해 고성전, 월곡을 지나 묵동역에 도착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훈련소는 묵동역 남쪽 10정 정도 앞쪽 낮은 언덕 위에 위치했다고 한다. 10정이면 약 1.1킬로미터 거리의 길이다. 당시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북덕리이고, 현재 주소는 서울시 노원구 화랑로 574, 지번 주소로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 230-30이다. 이 주소는 바로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이다.

공릉동은 공덕리와 태릉의 이름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묵동역은 일제말기 신공덕역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용산에서 이어지는 경의선에 공덕리역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지원병 정원이 400명에서 600명으로 1940년에는 3000명으로 늘었다가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42년에는 4500명, 1943년에는 5000명으로 늘었다. 전세가 불리할수록 조선지원병 정원은 확대되었고 묵동역 훈련소로 향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늘어만 갔다.

광적인 선전은 조선 청년들의 등을 떠밀어 사지로 내모는데 한몫했다. "징병제는 내선 관계에 가장 중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며, 드디어 양 민족의 운명이 좋게 접하는 것이다. 장차 많은 동포가 천황폐하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치는 일을 기다릴 것도 없이, 조국이라는 뜨거운 핏줄 속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조광> 1942년 7월호에 실린 소설가 이석훈의 글이다.

시인 노천명은 <조광> 1942년 3월호에 '승전의 날',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등의 시로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내모는 응원단이 되었다. 이 같은 광기의 백미는 미당 서정주가 1944년 발표한 시 '오장(하사) 마쓰이 송가'였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의 둘째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

<모던일본> 1940년 조선판 첫머리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기자의 대담이 실려 있다. 기자를 앞에 둔 총독의 육성을 들어보자.

"이제 조선은 우리 일본의 대륙을 향한 전진 병참기지라네. 이를 설명하자면 두 가지 요소가 있어. 첫째는 인적자원의 배양과 육성, 반도 민중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 두 번째는 국방 생산력의 획득 촉진이지."

미나미 총독은 대담 시작부터 지원병제도야말로 조선의 일본화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라고 기자에게 자랑했다.

묵동의 조선 지원병 훈련소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된다. 1946년 6월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1948년 9월에는 육군사관학교로 다시 바뀐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다짐했던 자리에서 해방된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젊은 정예 장교를 양성했다.

해방 이후의 한반도는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없는 가난의 땅이었다. 당장 군대를 꾸려도 번듯한 막사 하나 갖출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일본이 버리고 간 군사시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 땅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을 주도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만주군이나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훈련도 일본식이었고 군가도 일본 곡조에 가사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장교들끼리는 일본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반도에서 군대와 경찰은 친일을 세탁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반공의 깃발은 적과 우리 편을 나누는 가장 선명한 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질곡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더욱 깊어졌고 70년을 넘게 달려왔다.
▲조선지원병 훈련소 선전영화 <승리의 뜰> 광고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로 상징화된 이념 대결을 뛰어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고 선언했다. 친일 잔재의 청산과 이념 대결의 극복은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도, 일본의 책임 있는 사과를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수 십 년간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에 친일 잔재는 유형으로 무형으로 도처에 남아있다. 만약 민족정기란 것이 존재하고 제대로 발현되었다면 일본군 조선인 훈련병이 아침마다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쳤던 땅에서, 해방된 조국의 젊은이들이 조국 수호를 다짐하는 일이 이토록 오랜 시간 지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태릉의 육군사관학교를 옮기자는 말이 아니다.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는 것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과업이라면 조선 땅의 일본 육군훈련소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은 발굴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잘못을 교정해 나가는 것이 후세를 사는 자들의 자세가 아닐까.

▲징병이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던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사는 청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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