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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농민 주도로 39일간 전개된 횃불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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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농민 주도로 39일간 전개된 횃불만세운동

전의면에 이수욱 등 독립열사 생가만 12곳

▲세종시 전의면 신정리 음달말길에 전의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윤상원 열사의 손자 윤혁중(67)씨가 사진 속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1919년 세종지역의 만세운동은 타 지역과 달리 농민이 주축이 돼 동시다발적인 횃불만세운동으로 39일 간 지속됐다.

서울의 3·1운동과 직접 연계되지 않았지만 지역민들이 상경해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해 준비과정을 거쳐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만세운동이 활발한 지역 대부분은 명망 있는 유학자나 근대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 학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세종은 농민이 그 역할을 했다.

주도 계층에는 전통적인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이수욱, 홍일섭, 맹의섭, 김재형 등과 같은 인사도 있었다. 하지만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횃불만세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인사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전개 방법에 있어서도 활발한 횃불만세운동을 벌였다. 7회에 걸쳐 태극기를 이용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지만 3월23일 조치원읍, 북면, 남면, 서면에서부터 시작해 13회에 걸쳐 횃불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지역 각 마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했다는 점과 충남의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연합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돼 도계와 군면계를 넘어 몇 개의 마을이 사전 연락을 취해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타 지역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꼽힌다.

대부분 만세운동은 시장이나 마을, 면 단위 같은 일정한 지역의 한 장소에 모인 집단에 의해 전개됐지만 3월23일 조치원읍, 북면, 남면, 서면의 횃불만세운동은 청주 강서, 강외면과 연합해 전개됐고, 3월26일 동면 응암리 횃불만세운동은 사전에 청주 강내면 사곡리 주민과, 3월27일 동면 노송리, 송룡리 횃불만세운동도 청주 강내면민과 연락해 전개한 연합독립만세운동이었다.
▲세종 첫 독립만세운동인 전의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수욱 열사의 생가. 100년 전에 놓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계단과 은행나무만 그대로 남아 있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또한 주도적 인사들이 같은 날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31일 남면 방축리와 보통리에서 주민들이 황우산과 마을 뒷산에 올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할 때 진의리의 이덕민 집에서는 김봉식·임영복·조의순·임덕문이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했다.

이들은 양화리 임덕화를 앞세워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아울산에 올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이어 진의리와 송담리로 행진해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주민들과 함께 합세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비록 같은 면내에서 이뤄진 독립운동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사례로 꼽힌다.

이와 함께 연기청년회 등 지방 단체에 의한 조직적 독립만세운동도 있었다. 연기청년회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해인 1918년 조치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맹의섭 등 이 단체의 간부와 회원들은 고종 국장의 참례를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 3·1운동을 보고 귀향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홍일섭을 대표로 추대해 3월30일 조치원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사회단체가 중심이 돼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라 할 수 있다.

3월13일 전의와 3월30일 조치원 독립만세운동과 같이 사전에 지역 인사들 간의 협의를 거쳐 주도 세력을 결집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계획적인 준비를 통해 전개한 독립만세운동도 있었다.

당시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유적지를 찾아봤다. 현재 그 모습은 바뀌었지만 농민들이 중심이 돼 민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해 독립의지를 표명하고 동참했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다.
▲윤상원 열사의 손자 윤혁중씨가 신정리에 12명 이상의 독립열사의 자택과 집터가 남아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현재 세종지역 첫 3·1운동이 전개된 전의면에는 가장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전의장터 만세운동이 사전 모의된 신정리 음달말길에는 이수욱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윤상원 열사의 손자 윤혁중(67)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울산에 살고 있다가 요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홀로 이곳에 남아 생활하고 있었다.

윤씨에 따르면 옆집인 이수욱 열사 자택 맞은편으로 할아버지 윤상원 열사의 자택 두 채가 보인다.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으로 남아있다.

그 주변으로 윤상은, 윤자훈, 윤자벽, 박성교, 윤자명 열사의 자택과 집터가 한데 모여 있다.

맞은 편 동네 양달말길에는 추경춘, 추득천, 이광희, 이장희 열사의 자택 등 고속철도로 마을이 없어진 윤상억 열사까지 포함하면 신정리에는 12명 이상의 독립열사 자택과 독립유공애국지사 이광희, 추득천 기념비가 있다.
▲윤혁중(가운데)씨가 정면에 보이는 자주빛 지붕 두 채가 할아버지 윤상원 열사의 자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주변으로 윤상은, 윤자훈, 윤자벽, 박성교, 윤자명 열사의 자택과 집터가 남아있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이외에도 이수욱이 1919년 3월13일 전의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당일 장터에 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 주었던 장소인 ‘갈정리 고개’를 들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신정1리에 해당되며, 고속철도와 산업단지 조성으로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확연히 달라진 상태다.

전의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전의면 ‘신정리 이수욱 열사의 자택’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3월12일 장터에서 군중들에게 나눠 줄 목적으로 목판을 사용해 태극기 150본을 직접 제작했던 곳이다. 이와 함께 세종 첫 만세운동지인 ‘전의시장’이 있다.

‘금남면 대평리시장’에서는 임헌규, 임병주, 이덕주, 임순철, 김봉식, 임헌빈이 1919년 3월23일 대평리 시장 장날을 이용해 시장 군중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벌였다. 1919년 4월2일에도 이들이 주도해 대평리 시장 장날 군중 300여 명과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 일경에 의해 8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남면 양화리 아월산’은 현재 양화리 마을 뒤 전월산으로 추정된다. 임덕화, 김봉식,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이 1919년 3월31일 오후 9시부터 대한국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임덕화를 선동해 마을 뒤편 아월산 꼭대기에서 주민 100여 명과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져 있다.

‘연기면 소재 이덕민의 집’에서는 김봉식,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이 모여 1919년 3월31일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조치원읍의 중심이며 재래시장의 중심인 ‘조치원시장’은 당시에는 헌병분견소와 우시장이 있었던 큰 장터였다. 청주의 강서면 주민들까지 이 시장을 이용했을 정도로 장의 규모가 컸다.

홍일섭이 1919년 3월30일 정오경,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장터를 뛰어다니며 장꾼들을 선동, 수백 명의 집단이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 안을 누비고 다녀 치안을 방해했다.
▲세종시 전의면 양달말길에 위치한 독립유공애국지사 추득천 묘비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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