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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최후 보루이자 신라가 당을 물리친 기벌포전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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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제의 최후 보루이자 신라가 당을 물리친 기벌포전투의 현장

2019년 3월 고을학교는 <서천고을>

봄이 활짝! 3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5강은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으며 한반도에서 당을 물리친 기벌포전투의 현장인 <서천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른 봄 활짝 피는 마량리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서천군의 명소다. 멀리 동남방에 기벌포전투 현장이 위치한다.Ⓒ서천군

고을학교 제65강은 2019년 3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5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동서천IC-한산읍(한산읍성/건지산성/한산향교/봉서사)-한산모시관-한산소곡주갤러리-이상재생가-이하복고택-서천읍(점심식사 겸 뒤풀이/서천읍성/서천향교/남산성)-장항읍(장암진성/기벌포해전전망대)-비인읍(비인읍성/비인향교)-춘장대IC-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서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5강 답사지인 <서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웅진백제·사비백제의 요충지로 ‘약속의 땅’
서천고을은 충남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부여, 북쪽은 보령,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북 군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해 있습니다.

서천의 산줄기는 금북정맥의 지맥이 흐르는데 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겹침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현산에서 한남정맥은 북서향하여 김포 문수산에서 서해로 숨어들고, 금북정맥은 청양과 보령 사이의 일월산에서 본 줄기는 북서향하여 태안반도에서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작은 산줄기는 남서향하여 서천지역의 장항에서 금강으로 숨어듭니다.

서천의 물줄기는 장수읍 수분리에서 발원한 금강이 무주, 영동, 장수, 옥천, 금산의 물을 합하여 부강(芙江)을 이루고, 다시 진천에서 발원한 미호천(美澔川)의 물을 합하며 다시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서 군산과 장항 사이에서 서해로 합류합니다.

서천은 웅진백제와 사비백제의 군사상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서천지역은 지금의 장항지역인 기벌포를 포함하여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임과 동시에 곡창지역으로, 평상시에는 광활한 옥토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고,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논산의 득안성과 함께 군사상 최후저지선 역할을 당당히 해낸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금강하구둑의 철새도래지Ⓒ서천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건지산성·남산성·불당곡산성·관적곡산성·장암진성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천지역에는 백제 때 산성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했던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추정되고 있는 한산의 건지산성, 서천의 남산성, 비인의 불당곡산성, 관적곡산성, 장항의 장암진성 등입니다.

건지산성은 금강 하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건지산의 정상 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으로,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으며 내성은 흙으로 쌓았고 외성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쌓았습니다. 이러한 2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말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터의 흔적은 동문지와 서문지가 있으며, 성안에는 봉서사라는 절이 있으며 봉서사 서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에서 불탄 쌀과 백제의 토기조각이 출토되었습니다.

최근 발굴조사에 의하면 건지산성은 고려말기에 금강하구에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하여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왕조가 읍성을 축조하기 이전에 산성을 읍성 대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중종 때 한산읍성이 축조되자 산성은 읍성 후방의 농성을 위한 산성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영모리산성은 건지산성에 딸린 부속성으로 방어를 위한 보루로 볼 수 있는데 건지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 있습니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지산성이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 고려시대 산성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반해 영모리산성은 건지산성과는 시기가 다른 백제시기의 산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남산성은 서해 움직임과 금강 입구를 감시할 수 있는 군사요충지였다.Ⓒ서천군

남산성은 서해의 움직임과 금강 입구를 감시할 수 있어, 백제 때부터 변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역인 남산 정상부를 자연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습니다. 남문 터와 서문 터가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성벽을 따라 6∼9m의 통로가 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가 1,545척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1개 있었으며, 세종 때 지세가 좋지 못하여 읍성을 옮겼다고 하니 세종 때까지는 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쪽 능선의 정상부에는 운은산 봉수대가 있고, 남사면 하단에는 봉남리석탑이 있으며, 영취산과 운은산 중간지점에 성황당이 있습니다.

관적곡산성은 성에 오르면 동북쪽의 구릉지대와 서북쪽의 서해바다가 안면도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서해의 서남부까지 조망되어 한눈에 보아도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월명산(289m)은 비인면의 명산으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가까이로 비인면 일대가 한눈에 보이고 서천 리아스식 해안과 어우러지는 서해바다의 거침없는 풍광이 서남에서 서북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장암진성(長巖鎭城)은 1514년(중종 9)에 후망산(後望山 90.1m)에 축성한 진성으로 산성보다는 평지성에 가깝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서천포영성, 서천포진성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성벽은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으며 성벽의 둘레는 640m로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성내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벽은 일제강점기에 석축을 헐어 장항제련소 공장 부지를 조성하는데 사용되어 형태가 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헌서원은 고려말의 목은 이색과 가정 이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서천군

삼한시대 마한 54국 중 아람국, 치리국국, 비미국 위치
서천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아림국이었으며 아림국의 위치는 서천읍 남산부근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마한 54개국 중 서천지역은 아림국, 한산지역은 치리국국, 비인지역은 비미국으로 마한의 연맹체의 일원으로 결속관계를 성립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으로 성장해 오다가 백제에 복속되었습니다.

백제가 마한을 통합한 후 서천지역은 설림군, 한산지역은 마산현, 비인지역은 비중현 등 1군 2현으로 나뉘어졌는데 특히, 백제시대에 크게 발전한 곳은 한산이었습니다. 이곳의 건지산성(周留城))은 백제의 서쪽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백제 멸망 뒤에도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3년간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신라는 756년(경덕왕 15)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설림군을 서림군, 마산현은 그대로 마산현, 비중현은 비인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기벌포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기벌포전투는 나당전쟁 중인 676년 신라와 당나라가 금강하구인 기벌포(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벌인 전투로, 신라는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당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였습니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으로,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인데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삼국이 쟁패 중이던 553년에 신라와 백제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고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후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던 영토분할 약정도 위배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습니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는데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 천성(泉城)과 매소성(買肖城)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투시켰습니다. 이에 신라는 673년에 배치한 함선 1백 척으로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설인귀군과 싸웠는데 초기에는 패배하였으나 22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기벌포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전투를 고비로 당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며, 당은 676년 2월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습니다. 676년 윤3월 토번(吐蕃)이 당을 공격하자 당은 군사전략을 토번 중심으로 전환시키고 토번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방책을 취하였다고 보여집니다. 그해 11월 기벌포전투 당시 당은 상당수의 병력과 유이민들을 이송하기 위해 기벌포로 집결한 상태로 신라와 전투하였으며, 당은 방어적 태세로 대규모 접전을 회피하여 병선 보전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서림군은 가림군에 속하였는데 그 후 감무가 배치되었고, 1314년(충숙왕 원년) 이 고을 출신 이언충이 공이 있어 지서주사로 승격되어 서주(西州)라 불렀습니다. 한산현은 가림군에 속했는데 1165년(명종 5) 감무를 두고 홍산현을 겸임하였으며 그 후 지한주사로 승격하고 한주(韓州)라 불렀습니다. 비인현은 1018년(현종 9) 가림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그 후 감무가 파견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서림군을 서천군으로, 한산현을 한산군으로, 비인현을 비인군으로 개칭하고 홍주부의 관할에 두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서천, 한산, 비인 3군을 통합하여 서천군으로 개칭하였고, 관내 도서 중 개야도, 죽도, 십이동파도, 연도를 전북 옥구군에 편입했으며 해방 후 1979년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11면이 되었습니다.

서천, 한산, 비인에 읍치구역
서천지역은 서천, 한산, 비인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서천읍성은 동쪽 야산에 세종 때 축성된 포곡식 석성입니다. 둘레가 1300m이며 성벽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외벽만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웠습니다. 치성 14개소가 확인되었고 출입구는 동문과 서문, 남문 세 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 밖에는 동·서·남벽에서 8∼10m 떨어져 도랑을 판 해자시설이 남아있습니다. 성 안에는 관아와 건물 및 우물 등이 있었으나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천향교는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 전국적으로 많은 향교를 세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형태를 따르고 있으며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명륜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홍살문, 내삼문, 외삼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한산읍성은 중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쌓은 성이며 성의 둘레가 4,070척(1,233m), 높이가 11척(3m)이고, 성 안에 도랑 1개와 우물 4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벽이 동벽보다 긴 사다리꼴 형태이며, 1914년까지도 동서남북 4대문이 남아있는 읍성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산향교는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때 동산리 유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1669년(현종 10)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고 1850년(철종 1)부터 이듬해까지 크게 고쳐지었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형태를 따르고 있으며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가 남아 있습니다.

비인읍성은 비인면 성내리에 있는데 1421년(세종 3)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고려 중기에 흙으로 쌓은 성을 돌로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성의 높이는 2m, 길이는 3,000m 정도이며, 지금은 성의 형태만 남아있고 대부분 훼손되었습니다.

비인향교는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향교가 설치되었던 조선 전기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등이 남아 있습니다.

▲기벌포해전전망대. 기벌포는 장항 일대, 금강하구의 옛 이름이며 신라는 당과의 최후 결전에서 승리, 당군을 이 땅에서 몰아냈다.Ⓒ서천군

신숭겸, 이색, 이하복, 이상재 유적 찾아간다
서천지역에는 신숭겸, 이색, 이하복, 이상재 등의 유적도 남아 있습니다.

문헌서원은 가정 이곡, 목은 이색을 주벽으로 하고, 현암 이종덕, 인재 이종학, 양경공 이종선, 문혜공 이맹균, 백옥헌 이개, 음애 이자 등 8현을 배향한 서원인데, 창건연대는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성중이 한산군수로 재임하던 1580년대 초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기록상 창건연대는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지며, 처음 이름은 ‘효정사(孝靖祠)’였습니다. 정유왜란으로 소진되어 겨우 사우만이 남아 있었는데 1610년(광해군 2) 한산 고촌으로 이건하였으며, 1611년(광해군 3)에 문헌(文獻)이라 사액되었습니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 효정사와 이색의 영정이 보관된 목은영당, 재실인 진수당, 누각식 강륜당,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관리인의 숙소인 수호사(守護舍) 내삼문, 외삼문, 이색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 등이 남아 있으며 이색 영당 뒤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가히 장관입니다.

<문헌서원지>에 의하면 창건 후 원장으로 송준길, 윤증, 남구만, 권변 등이 기록되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은 ‘문헌서원’이라는 액호를, 진수당(강당), 존양재(동재), 석척재(서재) 현판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가정, 목은 문집판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목판은 한국문화사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한산군으로 봉해졌으며,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립니다.

목은 묘역은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묘 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형봉분 앞에는 망주석, 문인석, 마석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 묘표가 있으며 앞면에 ‘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색신도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으며, 비문에는 “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습니다. 1433년(세종 15)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1666년(현종 7)에 송시열이 쓴 음기를 새겨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색은 본관 한산,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의 문하생으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입니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고 1352년(공민왕 1) 전제개혁, 국방계획, 교육진흥 등 여러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서 1354년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합격하였으며, 1355년 원나라의 한림원에 등용되었습니다. 귀국하여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위하여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91년에 한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조정에 계속 남아 있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여강지역으로 가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상재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대문은 솟을대문입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 터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입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1972년, 1980,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는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로서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1888년(고종 25)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습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섰으며,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결성한 신간회의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하복 고택은 초가로, 19세기 후반에 안채를 짓고 20세기 초에 사랑채, 아래채, 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늘려 지었습니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되었으나, 후대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 대청과 방, 부엌 겸 헛간으로 사용하는 헛청을 덧달았습니다.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을 내고, 부엌과 사랑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래채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독립적인 공간으로, 부엌과 방 2개, 광으로 구성되어 살림을 따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로, 전통기법에 따라 안채의 앞쪽지붕이 뒤쪽보다 길게 처리되었고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준 점이 특이합니다.

이하복(李夏馥)은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산, 호는 청암이며 고려 말기의 문인인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서천지역의 교육사업과 농촌계몽운동 등에 헌신하셨습니다. 평생 청빈한 선비정신으로 사재를 털어 동강중학교를 설립하고 지역인재 육성에 힘쓰며 인간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율리사는 평산신씨 시조 고려 개국공신 태사 장절공 신숭겸과 조선시대 병조참판을 지낸 신철 등 7인의 위패를 모셨는데 원래는 문중사당으로 ‘세덕사’라 불렀습니다. 사당 안에는 신숭겸 등 7인의 위패와 신숭겸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내삼문, 강당, 율리세덕사, 유허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장절공 신숭겸은 몸집이 크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927년(태조 10)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포위당해 태조 왕건이 위급해지자 대신 왕건의 옷을 입고 싸워 전사한 인물로 1048년(문종 2) 장절공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볼 만한 불교유적들
서천지역에는 불교유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봉서사는 기산면 영모리에 있었는데 건지산성 안으로 옮긴 것은 18세기로 추정됩니다. 금당인 극락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우협시불은 관세음보살, 좌협시불은 대세지보살이며 1994년 내부를 조사하면서 1420년(영락 18) 구월산 장불사에서 판각한 목판본과 함께 나온 발원문에 1618년의 연대가 있어 불상은 이때 수연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봉서사는 이상재, 신석초 등이 소년시절 수학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석리삼층석탑은 원래 마을 뒷산인 희리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반출하려고 이곳까지 운반해 왔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가져가지 못하여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형태는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세우고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어 지붕돌보다도 높이가 낮아졌습니다. 기단에 새긴 안상조각이나 간략해진 탑의 구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상륜부에는 약사여래를 안치하였습니다.

봉남리삼층석탑은 봉남리 절터에 세워진 것으로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에는 문 모양과 문고리를 조각해 두었습니다. 화강암으로 치석한 수법으로 능숙하게 표현되었으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수암리삼층석탑은 조선 후기 이 지방을 관할하던 한 좌수(座首)가 매년 풍년을 기원하고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탑 전체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며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습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연꽃무늬를 두른 복발(覆鉢)을 올려 머리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성북리오층석탑은 비인에 세워진 백제계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조선 후기 이 지방을 관할하던 한 좌수(座首)가 매년 풍년을 기원하고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하여 단층기단에 5층의 탑신을 갖추는 등 백제계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려 힘을 기울인 흔적이 보입니다.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 분포에 따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천고을은 예부터 한산모시로 유명하다.Ⓒ서천군

이름난 한산모시, 한산소곡주
서천지역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합니다.

한산모시는 달리 저포, 저치라고도 하는데 통일신라 경문왕 때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있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운 최상품으로 여깁니다. 1새는 30㎝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짠 것입니다.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신라 유리왕이 두 왕녀로 하여금 부내의 여자들을 둘로 나누어 길쌈을 하게 하고, 추석날에 결과를 심사하여 진편에서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한 민속놀이입니다. 팔읍(八邑)은 한산, 서천, 비인, 홍산, 임천, 남포, 정산, 보령인데 이 중에서도 한산은 예로부터 모시 짜기의 본고장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한산소곡주는 백제시대 궁중 술로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빚어 마셨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알려진 술로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시의전서> <규합총서> 등에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산모시문화제 모습Ⓒ서천군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3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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