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묵인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 105주년이기도 하다. 필자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밀약 이후 3·1운동 당시 미국이 이 운동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일본 편을 들었다는 점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 밀약이 우리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부분의 언론이 당시를 조명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미국의 조선 독립 운동 외면 사실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 만나 만든 것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과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특히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 레닌이 발표한 '민족 자결 원칙', 만주 지린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발생한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한편 미국 국무성은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참고 : https://en.wikipedia.org/wiki/March_1st_Movement).
<연합뉴스>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1 운동 당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언론의 이에 대한 보도를 조사 분석한 결과, 일본의 보도 통제와 사실을 왜곡 조작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가운데 일본의 한반도 통치를 용인한 미국, 영국 정부 등의 공식 논평 등에 대한 뉴스는 보이지 않았다(연합뉴스 2019년 2월 14~18일). 미국 등 서구열강은 제국주의 침략자적 야욕으로 야합한 동맹국 일본의 조선인 독립운동에 대한 잔인한 탄압과 대규모 학살에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서울 주재 미국 영사관에 내린 훈령은 철저히 이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당시 국제적인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국내에서는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3·1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은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체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한 이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종전 후 남한에서 취한 미국의 태도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여기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런 태도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해진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에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그런 태도는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야합해 집권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제 미 청산과 이승만 이후 독재의 뿌리가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을 슈퍼 갑으로 공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 이후 남한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면서 미 군정기에 발생한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관행이 여전히 완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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