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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인들에게 '죽음'의 존엄은 사치?"

아이티 정부, 서둘러 시신 매장…"신원 확인하고 묻어야"

대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존엄을 구하는 일은 사치일까. 아이티 지진으로 사망했다고 추산되는 5만~20만 명의 대부분은 신원 확인도 못 한 채 집단으로 매장되고 있다.

18일 <뉴욕타임스>는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이티인들에게 사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들을 제대로 묻어 줄 여력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일단 거리에 방치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 때문에서다.

▲ 포르토프랭스 거리에 즐비한 시체들. ⓒ연합뉴스

장례 신성시하던 아이티에서…

폐허로 변한 포르토프랭스. 주저앉은 빌딩들로부터 몇 마일 떨어진 구릉 위로 올라가면, 넓이 20피트, 길이 100피트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구멍에 매일 죽은 자들이 매장되고 있다. 특파원은 이런 '공동묘지'가 이 곳 뿐만이 아니라고 전했다.

아이티 당국의 지시로, 인부들은 지난 15일부터 덤프트럭에 실은 시체들을 이곳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명이 매장되는지 헤아리거나, 사망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굴착기가 흙을 퍼다 나르고 있을 뿐이었다.

시신을 집단으로 매장하는 습지대에서 어떤 농부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여섯 대의 트럭이 시신을 운반한다"고 말했다. 하루에 100달러를 받고 포르토프랭스 시내 거리에 있던 시신을 수습해 온다는 일꾼은 "어디로 가라는 것 외엔 아무런 지시나 안내를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티 당국은 19일 현재까지 7만여 구의 시신을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의 집단 무덤에 매장했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쉽게 부패하는 시신을 처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이티 부두교 지도자인 막스 보부아르는 르네 프레발 대통령에게 "사람을 이렇게 매장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 없다"며 "이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이러한 매장 방법에 강하게 반발했다.

가톨릭교, 개신교, 민간신앙인 부두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독실한 신자의 비율도 높은 아이티에서, 장례식은 어떤 의식보다 신성하게 여겨진다.

아이티인들은 사는 집보다 지하 묘지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평균 수명이 44세에 불과한 아이티인들에게 죽음 자체와의 친밀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죽은 이들도 삶을 계속할 것이라는 부두교적 믿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아이티에서 38년을 산 인류학자 이라 로웬탈은 "(이번 지진으로)너무 많은 이들이 가족 단위의 묘에 눕지 못했다"며 가족 단위의 묘는 많은 종교의식이 거행되고 셀 수 없는 정신적인 교감이 일어나는 곳이라 설명했다.

묘지·관 없어 시체처리 역부족

외신들은 "포르토프랭스 시내와 그 주변에서 추도와 매장에 대해 요구되는 통상적인 수준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거리 위에 방치된 시체는 많이 줄었지만 시체안치소는 과부하 상태고, 장례식장에는 더 이상 방부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시체들이 쌓여있다.

ⓒ로이터=뉴시스

<가디언> 인터넷판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고급 공동묘지였던 '그랑 시메티에르'가 시신이 널리고 쌓여 악취가 진동하는 끔찍한 장소로 변했다고 전했다. 묘지 비용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묘지 근처에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진 발생 직후 며칠간은 볼 수 있던 관 또한 거의 찾기 힘들어졌다고 전했다. 한 목수는 "목재도 없고 전력도 없어서 관을 만들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10년째 관을 만들어 온 어떤 이는 "(사람들이) 관 없이 개처럼 묻힐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했다.

많은 시신들이 급하게 파놓은 구덩이에 한꺼번에 매장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묘지와 관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마저도 가난한 이들에겐 요원한 일이다.

시신 수습조차 힘들어진 곳에서는 부패로 인한 질병 창궐을 막겠다며 건물 잔해에 대규모로 불을 지르는 일도 벌어진다. <AFP>통신은 1만 5000명이 거주하는 빈민가 몽-라자르의 한 주민이 "매몰된 이들을 꺼낼 수 없어 폐타이어와 가스를 이용해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 시신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한 곳도 많다. ⓒ로이터=뉴시스

"시신, 전염병 안 퍼뜨려"

그러나 영국의 <BBC>방송에 출연한 영국 적십자사의 니컬러스 영 대표는 "시신이 전염병을 퍼뜨릴 수 있다는 우려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구덩이 파묻는 시신 처리 방법에 경계를 표명했다.

영 대표는 방송에서 "이런 근거 없는 믿음이 퍼져 시신을 재빠르게 처리하고 있지만, 주민들 사이에 질병이 없다면 전염병이 생길 위험성은 극히 적다"고 말했다.

영국 적십자사가 제작한 '재난지역 사체 처리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전염병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죽은 이들이 아닌 살아남은 사람들이며, 시체 소독에 쓰이는 가성 화학물질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며 신원확인 작업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는 "수습된 시신을 트럭이 모을 수 있도록 거리에 내다 놓으라"는 당국의 메시지가 나오고 있지만, 집단 매장 현장을 목격한 현지 특파원들은 시신이 신원 확인도 안 된 채 묻히는 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04년 지진과 쓰나미가 인도양을 덮쳐 동남아 지역에서 무려 23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각국 정부와 국제구호단체들은 사망자를 묻기 전에 사진을 찍어두는 시스템을 확립했다"며 "생전에 사망자를 사랑했던 이들이 사망자를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이티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름 없이 죽었다. 이 신문이 인용한 인류학자 로웬탈의 말이 그 이유를 대변한다.

"그건 아이티인들이 무감각한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지진이 각 나라들과 구호단체들을 압도시킨, 전례가 없는 대재앙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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