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와 금리의 향방은 신도 모른다."
월가의 금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가와 금리의 방향만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면 누구나 떼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향을 정확히 맞추는 이는 유감스럽게도 지구상에 극소수다. 주가나 금리같은 지표를 결정하는 변수들이 너무나 많은 데다가 예측불허인 탓이다.
1969년 퀀텀펀드 설립이래 9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35%의 높은 운용실적을 거뒀고,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잘못된 환율정책을 폈던 지난 92년과 93년에는 그 틈새를 치고 들어가 각각 68.6%와 67.4%의 경이로운 실적을 올렸던 조지 소로스조차 90년대 하반기부터는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거듭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소로스는 요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설파하고 다닐 정도로 앞날에 대해 자신을 못하고 있다.
악명높은 '중앙은행 킬러'조차 한치 앞길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요즘 지구촌 경제의 24시이다.
***"주가는 더 올라야 한다. 1천5백포인트까지"**
"주가가 더 올라야 한다. 우리나라 증시는 저평가돼 있다. 다만 단기간 급등하지 말고 꾸준히 상승해서 1천포인트, 1천5백포인트까지 가야 한다."
한국은행의 박승 신임총재가 16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한 말이다.
박 총재는 총재는 이날 국회의원 모임인 '경제비전 21(회장 김만제 의원)'의 초청을 받아 향후 경제전망 및 통화정책 방향을 언급하던 중 주가와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박 총재의 이날 발언은 그다지 새로운 게 못된다. 국내외의 증시전문가들이 이미 여러 차례 한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 총재는 이날 "주가가 더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1천포인트, 1천5백포인트'라는 구체적 목표치(?)까지 제시했다.
박 총재는 이밖에도 이날 많은 말을 했다.
"현재 경기회복은 경기순환 사이클 상의 단순한 경기회복이 아니다. 올해는 큰 틀의 구조조정을 끝내고 선진경제로 출발하는 원년이 될 것이다. 경제발전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관건은 공적자금 투입의 성공에 있었다. 기업부도가 금융부도로 이어지는 사태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주식투자가들이 듣기에 더없이 신명나는 발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중앙은행 총재가 앞으로 주가가 1천5백포인트까지 올라야 한다고 말했으니 그럴 수밖에.
***"주가가 떨어지면 박 총재가 책임질 것인가"**
박 총재의 '화법'은 역대 한은총재들의 그것과 상당히 구별된다.
역대 한은총재들은 극도로 말을 아끼었다. 표현 하나를 쓰더라도 대단히 조심스러워 했다.
반면에 신임 박 총재는 직설법을 즐겨쓰는 스타일이다.
이날 국회에서의 발언도 여느 총재들은 상상치도 못했을 발언이다. 한은 총재가 "주가가 더 올라야 한다"며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다니...
박 총재는 취임직후부터 직설적 화법을 즐겼다. 애매한 화법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국회에서의 발언은 여러 모로 중앙은행 총재가 지켜야할 '한계선'을 넘어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시장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 증권업계 고위관계자의 비판이다.
"한은 총재라 할지라도 '말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주가에 대해서만은 극도로 말조심을 해야 한다. 박 총재 말에 힘입어 주가가 1천5백포인트까지 오른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 경우가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박 총재 말을 믿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게된 투자가들이 한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때 한은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 피해를 보상해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 외국계 펀드매니저도 비슷한 맥락의 비판을 했다.
"한국의 구조조정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공적이라는 것은 지배적 평가다. 올 1.4분기에 한국 증시가 전세계 시장에서 3번째로 많이 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주가가 더 올라야 한다'는 박 총재의 발언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현재와 같은 글로벌 경제하에서 주가란 일국(一國)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올해가 한국경제가 선진경제로 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는 발언도 시기상조다. 많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한국기업의 투명성이나 지배구조 등은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도한 부동산값 급등 등 곳곳에서 거품 현상도 목격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박 총재의 발언은 적절치 못했다. 특히 올해가 대통령선거를 앞둔 예민한 '정치 시즌'이라는 대목에서 보면 박 총재의 발언은 불필요한 오해까지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다."
***99년도 한국은행의 '미필적 고의'**
99년도 하반기의 일이다.
'바이 코리아''묻지마 투자'의 여파로 거래소, 코스닥을 불문하고 주가가 미친듯 올랐다.
바이 코리아 열풍을 주도했던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회장은 "주가가 '돈의 힘'으로 금명간 3천선을 돌파하고, 6천선까지 오를 것"이라고 앞장서 바람잡았다.
당시 한은 고위층인사들은 "이익치가 결국 한국경제를 결딴낼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비판에 그쳤다. 정작 한은은 금리 등 통화정책을 통해 주식 거품을 제어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99년 7월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시장 저변이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공적자금 추가조성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4.13 총선을 앞둔 정부여권은 야권의 공세를 의식, 공적자금 추가조성을 극구기피했다. 정부여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가가 계속 올라 대우사태 발발에 따른 투신권등의 피해를 완충시켜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다보니 금리 인상은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그 결과 한은은 주가 이상급등에 따른 '자산 인플레'를 목격하면서도 침묵해야 했다.
2000년 3월을 정점으로 마침내 부메랑이 되돌아왔다. 주가는 급락했고 많은 개인투자가들이 깡통 신세가 됐다. 경제는 급속히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주식투자야 개인 책임이니 한은에 뭐라고 불만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은에게는 그러나 '선제적으로' 거품을 예방못한 책임은 남아 있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이자 '직무유기'였다. 적잖은 한은 사람들이 당시의 책임을 시인하고 있다.
당시 한은의 발목을 잡은 것은 대우사태라는 경제요인뿐만이 아니었다. 2000년 4월13일 치러진 총선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었다. 요컨대 '정치논리'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박 총재의 말이 아닌 '행동'을 지켜볼 때**
올해는 선거의 해다.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12월 대통령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정부여권은 은연중 최소한 주가가 1천포인트까지 올라 과거의 고점을 돌파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현정부의 경제개혁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나를 당당히 숫자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은행 총재인 박승 총재가 설마 이같은 정치논리에 기초해 문제의 주가 발언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본디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매선 안되는 법이다.
"정부와의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인식차이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으나,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앞으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정부와 정책방향을 조율하고 정보도 교환하겠지만 판단은 독자적으로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겠다고 수십번 말했다."
박 총재가 이날 국회 강연에서 한 말이다. 앞으로 박 총재의 말이 아닌 '행동'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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