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3남 김홍걸씨가 연루된 스포츠 토토 스캔들이 파헤치는 과정에 미국 정치권과 금융계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속속 드러나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전직 하원의원이 방한기간중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았는가 하면, 미국 최대 보험사가 국내 투신사를 인수하기 위해 문제의 최규선씨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번 스캔들은 단순히 국내 스캔들로 그치지 않고, 국제 스캔들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 사냥꾼' 솔라즈 전 의원의 타이거풀스 뇌물 수수 의혹**
김대중 대통령 보좌역을 지냈던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는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을 도와준 대가로 타이거풀스(현재의 스포츠 토토)측으로부터 10억원의 수표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해명하던 중 다음과 같은 예기치 못한 발언을 했다.
"스티븐 솔라즈 전 미 하원의원의 방한 당시 타이거풀스측으로부터 약간의 방문비를 받아 솔라즈 전 의원에게 전달해주었을 뿐, 그밖의 금품은 받은 적이 없다."
최 대표의 발언은 이번 의혹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언론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동안 솔라즈 전 의원의 행태를 잘 알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사냥꾼 솔라즈가 타이거풀스의 체육복표 사업에도 끼어든 게 아니냐"는 의혹어린 반응이었다.
솔라즈 전 의원은 미국 레이건-부시 정권시절 하원의원으로, 12년간 미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을 맡아 국내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80년에는 미국 의원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만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정권 시절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솔라즈 어소시에이츠라는 국제문제 및 국제투자 컨설팅사를 세워 워싱턴 정가의 외곽을 겉돌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던 잊혀진 존재였다. 하지만 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신이 '한반도통'이라는 것을 내세워 때로는 김대중정부를 압박하고, 때로는 한국기업들의 로비 역을 맡으며 한국에 부지런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예로 김 대통령 당선후인 98년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솔라즈는 자신이 속해있던 '한반도 위기관리 대책위원회' 명의로 미국의 한반도정책 첫 보고서를 펴냈다. 내용은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클린턴 및 김대중 정부의 대북 대화정책을 수정하라고 촉구하는 냉전회귀적 보고서였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제스처로 해석됐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리는 데 성공한 탓인지, 그후 솔라즈는 시쳇말로 대단히 잘 나갔다.
98년 7월 그는 거액을 받고 삼성자동차의 국제담당 자문으로 영입됐다. "자동차 수출과 관련된 국제문제에 정통한 전문가의 자문이 절실히 요구되는 만큼 국제문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솔라즈 전 의원을 영입하기로 했다"는 게 당시 삼성차의 발표였다.
그해 9월에는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다음해 미국 나스닥 상장을 준비중이던 통신장비제조업체 한별텔레콤의 자문역을 맡았다.
2000년 2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아태재단이 주최한 햇볕정책 2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연사로 초청돼, 종전 자신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햇볕정책을 극구찬양하는 주제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 2월에도 서울포럼 초청으로 방한해 김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2001년 들어 조지 W. 부시 공화당정권이 들어서자 솔라즈는 새 주한 미국대사 후보로 꼽히는 등 더욱 힘을 얻는 듯 보였다. 그는 지난해 6월 현대그룹 사태로 중단위기를 맞은 금강산 관광사업에 외자 유치를 해주겠다며 정몽헌 현대아산회장과 만나기도 했다.
솔라즈는 지난해 10월에는 워싱턴에 미국 북한인권위원회를 만들어 북한을 압박하는가 하면, 지난 1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21세기 주한미군의 새 역할과 위상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종전의 햇볕정책 지지 입장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변신의 천재인 셈이다.
이처럼 수시로 한국을 안방처럼 들락거리던 솔라즈였던 만큼 "솔라즈 방한 당시 타이거풀스측으로부터 약간의 방문비를 받아 솔라즈 전 의원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최규선씨 주장은 가볍게 흘리기 힘든 발언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체육복표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치던 타이거풀스가 왜 김 대통령의 보좌역 출신인 최규선 대표를 통해 솔라즈에게 돈을 건네 주었을까.
앞으로 분명히 규명해야 할 의혹중 하나라 하겠다.
***미국 최대보험사 AIG의 불법 뇌물 로비 의혹**
최규선 대표를 검찰에 고소한 최 대표의 전 운전기사 천호영씨는 11일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받는 과정에 또다른 미국계의 모럴 해저드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증언을 했다.
"최규선이 현대투신사 매각 추진 과정에도 개입, 거액의 돈을 미국의 AIG사로부터 받았다."
천씨는 그 증거로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걸쳐 4천여만원이 AIG사로부터 최규선 대표에게 제공된 것으로 기재된 차명계좌 내역을 검찰에 제출했다.
천씨는 검찰 조사에 앞서 지난달 28일 경실련 홈페이지에 올린 최초의 폭로문에서도 "최규선은 르네상스 호텔뒤 부속건물 13층에 A모라는 사무실을 꾸며놓고 현대증권 주식을 미국 AIG사에 매각하는 일을 해왔다"고 주장했었다.
천씨의 이같이 일관된 주장과 그가 제시한 증거물을 볼 때, AIG가 현대투신·현대증권·현대투신운용 등 현대계열 금융3사 인수를 위해 최규선 대표를 일종의 로비스트로 고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AIG가 최 대표에게 4천여만원을 건넸다는 지난해 12월과 올 1월이라는 시점은 현대투신 매각협상의 막바지 단계였던 만큼 천씨 주장의 신뢰성은 더욱 크다.
거의 AIG로 넘어갈 듯했던 현대투신 등 현대계열 금융3사는 AIG의 과도한 요구를 재정경제부 등 한국정부가 소신있게 거절하면서 지난 1월17일 최종결렬됐다. 당시 재경부 등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제2의 제일은행'이 될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AIG는 미국 최대 보험사인 동시에, 세계 최대 보험사로 유명하다. 이처럼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거대금융기관이 김 대통령의 전직 보좌역 최규선 대표를 통해 불법로비로 현대투신 등을 헐값에 매입하려 했다는 의혹은 결코 간과할 대목이 아니라는 게 국제금융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우에 따라선 미국 금융감독당국의 조사가 뒤따를 수도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김홍걸 스캔들을 통해 드러난 미국 정치권 및 금융권의 모럴 해저드는 왜 우리가 하루빨리 자주적이면서도 정경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국가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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