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버 로스(Wilbur Ross)가 이번에 현대투신 매각협상 결렬로 가장 크게 피해를 입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AIG에게 현대투신이 매각될 경우 AIG에게서만 3%의 성공 수수료를 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투신 3개사의 매각금액은 총 2조원. 여기에 3%를 곱하면 협상이 성사될 경우 윌버 로스는 투자수익과는 별도로 가만히 앉아서 6백억원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는데, 협상이 깨졌으니 얼마나 가슴을 치며 통탄했겠는가.
요구조건 하나를 들어주면 그 다음날 또 다른 요구를 들고 오는 등 지난 1년여 동안 가운데에서 그렇게 장난을 하더니, 정부 관계자로서 이런 말을 해선 안 되는 일이나 내심 '고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이다.
IMF사태후 한국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던 윌버 로스의 전성시대도 이제 막을 내리는 느낌이다.”
***"더이상 윌버 로스한테 끌려다니지 않겠다"**
지난 17일 AIG 컨소시엄으로의 현대투신 매각협상이 결렬되자 재정경제부 관계자가 한 말이다.
정부가 평소 얼마나 윌버 로스 회장에게 시달려 왔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발언이다.
윌버 로스는 현대투신 매각협상이 결렬된 후 20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에서 빠져나간 AIG를 대신하기 위해 AIG와 비슷한 규모의 몇 개 금융기관들과 협상하고 있는 중"이라며 "그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를 자문사로 고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로스는 그동안 현대투신 협상을 담당하던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해 "뭣하러 비싼 돈 주면서 외국계 자문사를 두느냐. 내가 다 해결해주겠다"며 자문사를 두지 말게 했다.
로스의 말에 현혹된 금감위는 이례적으로 현대투신 매각에 관한한 자문사를 두지 않았다. 혼자서 수수료를 독식하려 한 로스의 농간에 휘말려든 셈이다.
이를 지켜본 정부 관계자는 "외국계와 협상할 때에는 반드시 외국계 어드바이저를 고용해야 상대방의 속내를 정확히 알아 대응을 할 수 있는 법"이라며 "처음 협상을 맡았던 진동수 금감위 상임위원(현재 세계은행 파견)이 윌버 로스의 농간에 놀아난 결과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눈뜬 봉사처럼 협상에 임한 셈"이라고 개탄했다.
이처럼 평소 로스의 행태를 못마땅스러워한 만큼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 내용을 접한 정부 반응은 차가왔다. 더이상 로스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것이다.
***IMF시대는‘윌버 로스 전성시대’**
윌버 로스가 과연 어떤 인물이길래, 정부 관계자조차 이처럼 고개를 내젓는가.
윌버 로스는 정식명칭이 W.L.로스사인 미국계 투자그룹의 회장이자 오너이다.
그는 97년말 IMF사태 발발 이후 시쳇말로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외국인투자가’중 하나였다.
그런 대표적 증거가 IMF사태 발발후 지난 4년간 김대중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층 지근거리에는 언제나 윌버 로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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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은 2000년 11월 ‘IMF 위기극복’을 공식 선언했다. 김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위기극복에 도움을 준 몇몇 외국인투자가들에게 표창을 했다. 이 가운데에는 윌버 로스도 당당히 끼어 있었다.
로스는 이에 앞서 지난 99년 4월30일 산업자원부에 의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투자박람회 명예대사로 위촉돼, 그해 6월 서울에서 열린 APEC 투자박람회때 국제투자 세미나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다.
로스는 또한 지난해 5월에는 고건 서울시장이 상암동 월드컵 주경기장 옆 디지털미디어시티(DMC) 건설비 투자 유치를 위해 뉴욕을 방문해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할 때에도 고시장 옆에 배석했다.
로스는 이처럼 DJ정부 출범이래 정부 고위관계자들로부터 가장 환영을 받은 자칭 ‘친한파(親韓波)’였다.
이러다 보니 김대중 대통령은 특히 외국계로부터 자문을 구할 때에는 윌버 로스의 의견을 묻곤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도 한국관련 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윌버 로스의 코멘트를 따곤 했다.
로스는 한마디로 국내외가 인정하는 '한국통'이었던 것이다.
***24년간 2천억달러의 거래를 성사시킨 국제투자계의 큰 손**
윌버 로스는 한때 '한국의 은인'인양 대접받았다. 대통령은 표창까지 줄 정도였고 유관부처 장관들도 그를 깍듯이 예우했다. 로스의 본질은 그러나 ‘지킬박사'보다는 '하이드’ 쪽에 가까왔다.
윌버 로스가 한국에 맨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IMF사태 발발 직후인 98년초의 일이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발발후 한국 등 아시아는 서방자본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사냥터였다. 무수한 기업들이 줄줄이 헐값에 시장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윌버 로스는 영국의 세계적 금융그룹인 로스차일드의 회장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미국의 록펠러재단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최대 유태인 금융그룹으로 유명하다. 19세기초 창업주인 네이던 로스차일드가 창업한 뒤 나폴레옹전쟁등의 과정에 주가조작 등으로 본원적 축적을 한 뒤 주로 유럽왕실의 재산관리를 통해 급속히 세를 확장한 유태자본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도 유태자본의 대표로서 영국등과의 외교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세계의 금값은 모두 런던에 있는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결정하는 등 로스차일드는 선물과 현물 시장 모두에서 절대강자로 군림중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MBA(경영석사과정) 출신인 로스는 이같이 막강한 로스차일드 그룹의 전문 CEO(최고경영자)로,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기업 인수합병(M&A) 및 부실기업을 사들여 가공해 되파는 기업 구조조정의 대가였다.
로스는 지난 2000년 독립하기 전까지 24년간 로스차일드에서 재직하는 과정에 총 2천억달러 이상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대부분이 부도가 나거나 경영난에 봉착한 기업을 사들인 뒤 이를 가공해 되팔며 수수료와 이자차익 및 투자수익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벌처펀드이다.
로스가 손을 댄 유명기업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그룹의 타지마할 카지노를 비롯해 방코 디 나폴리(나폴리은행), 텍사코, 트랜스 월드 항공사 등 즐비하다.
***편법과 뒷거래로 점철된 로스의 한라그룹 사냥**
기업사냥 경험이 많은 그가 한국의 IMF위기를 간과할 리 만무했다.
IMF사태가 발발하자마자 그는 98년초부터 한국에 한달에 4~5차례나 들락거리며 두루 사냥감을 물색했고, 그 결과 첫번째 대상으로 꼽힌 것이 97년 12월 도산한 재계 12위의 한라그룹이었다.
윌버 로스는 한국에 들어와 김대중대통령을 비롯한 이규성 재경부장관, 유종근 대통령특별고문 등 정부 고위층들과 두루 만난 뒤 98년 3월23일 이른바 '로스차일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아래 한라시멘트, 만도기계, 한라펄프, 한라공조 등 한라그룹 주요계열사에 대한 10억달러 투자를 뉴욕과 서울에서 공식발표했다.
로스차일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란 채권단이 부채를 탕감해주면 로스차일드가 브리지론(일시적 자금융통) 방식으로 10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남은 부채를 일시에 갚고 부채가 없어진 기업을 해외에 매각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외환보유고가 거의 텅 비다시피 해 달러 한 푼이 아쉽던 당시 상황에서 10억달러란 엄청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윌버 로스는 당연히 김대통령을 비롯한 재계, 금융계, 언론 등 각계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로스는 그후 사사건건 간섭하며 황제처럼 군림했다. 98년 5월 가혹한 구조조정에 반발해 만도기계 종업원들이 파업을 벌이자 만도기계 사장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파업을 계속하면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로스의 경고에 놀란 정부는 파업현장에 1만4천여명의 경찰력을 투입해 파업을 강제해산한 뒤 로스의 주문대로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라시멘트는 프랑스의 라파즈사에 , 한라펄프는 미국 보워터사에, 한라건설의 캘리포니아 발렌시아 호텔은 미국 선스톤사에, 한라공조의 캐나다법인은 미국 포드사에 갈갈이 찢어 팔았다.
문제는 그러나 이 과정에 로스가 각종 편법과 위약을 거침없이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문제가 된 것은 10억달러의 외자유치 약속 위반이었다. 그는 일부는 외국에서 자본을 들여오고 나머지는 국내의 공적자금을 빌어쓰는 편법을 자행했다.
그 다음 문제가 된 것은 한라그룹 오너들과의 은밀한 뒷거래였다.
이같은 사실은 외환위기가 사그라든 2000년 들어서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국회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2000년 6월 기자회견을 통해 한라그룹의 내부제보 자료를 공개하며 "정몽원 한라회장이 한라시멘트가 부도난 이후 윌버 로스와 손잡고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 자기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30%의 지분을 챙겼을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한라시멘트가 보유하고 있던 한라콘크리트 지분을 사실상 정몽헌회장을 대리하고 있는 대아레미콘에 헐값에 매각해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폭로했다. 문제의 한라시멘트는 채권단이 7천5백43억원의 부채를 탕감해준 기업이었다. 국민의 피같은 공적자금을 부실기업주 및 윌버 로스가 중간에서 가로챈 양상이다.
2000년 10월 국회 재경위에서도 윌버 로스가 도마위에 올랐다.
한나라당의 이한구의원은 10월31일 "윌버 로스의 로스차일드가 10억달러의 외자 도입을 약속하고도 실제로는 3억4천5백만달러만 들여왔으며 1천9백86억원을 우리 정부의 구조조정기금에서 조달해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이의원은 "산업은행이 서울기금,아리랑기금,무궁화기금,한강기금 등 4대 구조조정기금 운용을 윌버 로스 등 외국인에게 맡겨놓고 있다"며 "그 결과 로스차일드가 이들 기금에서 한라시멘트 명의로 1천1백86억원, 한라건설 명의로 8백억원을 지원받았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한라그룹 구조조정을 위해 공공자금이 투입되고 로스차일드와 정몽원회장 등이 반사이익을 취한 셈"이라고 질타했다.
한나라당의 이성헌의원도 "로스차일드가 한라그룹에 손을 댄지 1년만에 성공보수료 5백억원, 이자 3백억원 등 도합 8백억원을 챙겼다"며 "IMF극복을 위해 외자유치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와 기업의 약점을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회의 지적에 놀란 정부는 서둘러 로스차일드를 구조조정기금 운용자에서 빼는 등 허둥지둥했으나 이미 로스차일드는 가운데에서 짭짤한 수익을 챙긴 뒤였다.
말 그대로 윌버 로스의 농간에 한국 정부가 놀아난 셈이다.
***직접 자기 회사 설립해 한국사냥에 나서기도**
윌버 로스는 2000년 4월 자신이 24년이나 몸 담아왔던 로스차일드사를 그만 뒀다. 그리고 곧바로 W.L.로스라고 자신의 이름을 딴 투자회사를 설립, 오너 겸 회장으로 취임했다.
한라그룹 등의 사냥에서 큰 재미를 보자 직접 자기회사를 세워 떼돈을 벌기로 작심한 것이다.
로스는 2000년 자사 설립후 굵직굵직한 거래마다 끼어들었다.
그런 대표적 예가 IMF위기후 경수종금, 해동화재보험, 일은증권 등을 인수해 단기간에 거대금융군을 구성했다가 이들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한국코리아온라인(KOL)의 주가조작에 연루된 혐의로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한 영국의 리젠트그룹 매입이다. 문제의 KOL은 '진승현 게이트' 유명한 진씨가 13%의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로 등록돼 있는 기업이기도 했다.
윌스 로스는 리젠트그룹의 주식 40%를 인수해 최대주주 자격으로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윌버 로스는 이어 정부의 차세대영상이동전화(IMT-2000) 사업에도 하나로통신에 1억달러의 외자유치를 약속하며 깊숙이 개입했고, 지난해에는 현대투신 등 현대금융계열사 3개사 인수에 미국의 AIG를 비롯한 6개 해외금융기관 컨소시엄을 구축해 1조2천억원대(당시 10억달러)의 외자유치를 약속하기도 했다.
로스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근래 들어서는 일본의 도쿄 쇼와 은행 인수를 추진하는 등 기업사냥 범위를 일본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본디 자본의 속성은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덕상인 '샤일록'에 가깝다.
아무리 윌버 로스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그의 뇌리에는 '이윤'이라는 개념만이 작동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로스의 '한국사냥'을 도덕적 측면에서 비난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김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의 대응이다. 과연 이들 외국자본의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대응했는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많은 아쉬운 대목이 목격되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숱한 '제2, 제3의 윌버 로스'가 한국시장에 접근해올 것이다. 만약 이 과정에 정부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구조조정 과정에 외국에게 알짜기업을 몽땅 팔아넘긴 끝에 마침내 국가경제 전체가 도산해버린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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