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불황은 그 기간이 불과 9개월밖에 안됐다. 골이 너무 얕았던 셈이다.
그러다보니 하루라도 빨리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지 않으면 내년이후 상황을 장담하기 힘들다. 정부 주장처럼 금리인상 시기를 6월이후로 잡는 것은 너무 늦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의 우려섞인 전망이다.
***"요즘 물가 분위기가 썩 안 좋다"**
한은은 요즘 상당히 불안정한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총재와 3명의 금융통화위원이 바뀌는 '인사 격변기'를 맞고 있는 데다가, 금리정책도 대전환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내달 1일 박승 신임 한은총재가 취임한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4일 금융통화위원회가 예정돼 있다. 4일 예정대로 회의가 열릴지는 미지수다. 3명의 금통위원 임기가 7일이어서, 새 금통위원들이 부임한 후인 11일에 금통위가 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일이 되든 11일이 되든, 한은사람들은 4월 금통위가 '대단히 중요한 회의'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새 한은총재가 어떤 통화정책을 펴나갈 것인지를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회의라는 이유에서다.
한은 내에서는 '4월 금통위 회의'에서 금리인상이 단행되기를 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앞의 한은 관계자는 최근 돌아가는 경제상황을 다음과 같이 우려했다.
"한마디로 말해 요즘 물가 분위기가 썩 안 좋다.
우선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달 하반기 들어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엔화가 완연한 약세로 돌아서며 원화약세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유가도 예상치 이상으로 계속 오르고 있다.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르면서 철강과 시멘트 값도 같이 뛰고 있다.
예정됐던 일이기는 하나 각종 공공요금도 잇따라 인상되고 있다.
지난해 여름부터 최근까지는 물가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통상적으로 경기가 불황에서 호황국면으로 전환한 뒤 6개월이 지나면 물가가 오른다.
이런 법칙에 따라 보면 오는 여름부터 물가가 가파르게 오를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말해 물가에 적신호가 커졌다는 것이다.
***"골이 너무 얕았다. 다음 불황이 빨리 올 수도...**
상황이 이런 만큼 이 관계자는 '선제 공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아직 금리를 올릴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올리더라도 확실한 '숫자'가 나온 뒤 올리자는 식이다.
그러나 숫자는 늦게 나온다. 3월 현재상황이 빨라야 5월에나 숫자로 나온다. 나오는 숫자를 확인한 뒤 대응하려 하면 이미 늦다. 숫자에는 관성과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뒤에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통화정책에서 숫자보다 '현장감각'이 중요한 것도, 통화정책이 '선제적'일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관계자가 한층 불안감을 느끼는 대목은 지난번 불황이 너무 짧았다는 사실이다.
"호황국면이 끝난 것은 99년말 2000년초의 일이다.
그러다가 불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0년 4.4분기부터다. 불황이 계속 심화된 것은 지난해 2.4분기까지이고 3.4분기에는 바닥을 찍었다. 불황국면이 불과 9개월밖에 안됐다는 얘기다.
불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그러나 불황, 즉 조정기간이 너무 짧아도 문제다. 골이 얕으면 그만큼 경기상승도 오래갈 수 없어 다음 불황이 빨리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들어 경기는 1.4분기 성장률이 6%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될 만큼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이러다가는 경기회복이 연말 정도에 끝나고 내년에는 다시금 불황국면으로 접어들지나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업들, "빨리 그러나 조금씩 올려달라"**
금융정책협의회는 25일 회의에서 현재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가 '이상 무(無)'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각에서 강력히 제기돼온 가계대출 급증 및 부동산 거품 우려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걱정할 필요없다"며 일단 제동을 건 셈이다.
금정협에는 재정경제부외에 한은도 참석한다.
때문에 금정협 회의의 결론을 일방적인 정부결정이라 몰아붙이기도 무리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은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상대적으로 재경부 입김이 강한 곳이 금정협 회의다.
그러면 기업들은 금리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은의 다른 관계자는 최근 기업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최근 금리문제로 기업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미팅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금리인상에 질색을 한다. 그러나 요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국공채 유통수익률이 6%대, 회사채 유통수익률이 7%를 넘은지 한창 오래이니 콜금리를 계속해 4%로 유지해달라는 무리한 얘기는 안한다. 단기금리(콜금리)가 장기금리(회사채 등)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인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셈이다.
그들의 요구는 한마디로 금리를 올리되 충격이 한꺼번에 오지 않도록 단계적으로 인상해달라는 것이다."
또다른 고위관계자는 더욱 구체적인 얘기를 했다.
"최근 삼성그룹 고위관계자와 만났다.
삼성그룹은 최근 과도한 소비경제 위주의 고성장 경기부양책에 경계감을 표명하며 부동산 버블의 재연을 막기 위해선 신속한 금리인상이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여러 편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간기업이 먼저 금리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한은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우리가 먼저 금리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잇따라 노정되고 있는 저금리의 각종 부작용에 대해 삼성그룹 등 민간부문조차 적잖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 한은이 결단을 내릴 때이다."
***재경부와 기획예산처의 대립**
정부의 공식입장은 "아직 금리인상 시기가 아니다"이다.
97년 개정된 한국은행법에 따르면, 금리결정권은 한은 금통위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법 따로, 입 따로'인 국가다.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틈만 나면 '금리 운운' 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공개리에 금리인상 불가를 주장함으로써 한은을 압박해 왔다.
그런데 이같은 정부 부처내에서조차 최근 이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리문제와 관련, 기획예산처 대 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의 대립 양상이 눈에 두드러지고 있다.
이같은 대립양상은 기획예산처의 장승우 장관이 지난 13일 "경기부양책 중단, 금리인상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시작됐다.
장장관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면서도 최근 4년간 한은에서 금통위원을 지낸 까닭에 거시정책에 관한 한 '균형잡힌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장관은 이날 대한상의 조찬간담회에서 최근의 경기과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재정투자 사업을 조기에 집행하지 않고 자금집행을 경기흐름에 맞추겠다"며 "금년 상반기중 연간계획의 50%수준을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금리정책도 수정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마디로 말해 종전의 경기부양책을 전면수정해야 한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장장관의 주장은 반나절도 안돼 진념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에 의해 꺾이었다. 장장관의 발언을 접한 진념 부총리는 이날 점심에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며 "상반기 예산 집행규모를 종전의 계획대로 57%로 밀고 나가겠다"고 밝혔다. 금리인상에 대해서도 때가 아니라고 끊어말했다. 1차전은 이렇게 진부총리의 승리로 끝나는듯 보였다.
그러나 며칠 뒤 2차전이 붙었다.
진념 부총리는 지난 20일 뉴욕에 가 외국인투자가들을 상대로 투자설명회를 가졌다. 이날 진 부총리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4%로 예상되며 아직 수출과 설비투자가 부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경제정책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였다.
장승우 기획예산처장관은 이에 대해 22일 21세기 경영인클럽 초청 조찬강연에서 우회적 반격을 가했다.
그는 "최근의 경기회복 추세를 이어감으로써 올해 우리 경제는 물가안정 속에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기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잠재 경제성장률은 5~6%. 따라서 장장관의 발언은 올해 성장률이 정부의 공식성장률 목표 4%를 크게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는만큼 경기부양책의 수정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같은 기획예산처의 주장에 대해 최근 들어서는 신국환 산업자원부장관이 금리인상 불가를 주장하고 나서는 등 기획예산처를 '집단 왕따'시키는 움직임까지 감지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재경부등이 올해 정치일정을 의식, 무리한 저금리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어린 시선도 제기되고 있다.
***박승 신임총재,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
이처럼 금리인상은 당면한 경제 최대현안이 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지와 미국의 블룸버그통신 등이 한국 거품경제의 재연 가능성을 경고할 정도로 이 문제는 이제 국제적 관심사로 급부상하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대외신인도도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이제 공은 박승 신임 한은총재에게 넘어왔다.
박 신임총재는 내정 과정에 진념 부총리가 특정지역 연고 및 친분을 앞세워 강력히 추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각에서 '과연 소신있는 통화정책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또 내정 사정이 발표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달을 일하든 일년을 일하든 열심히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한은 사람들로부터 "4년 임기의 한은 총재가 할 말이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은 관계자는 이와 관련, 박 신임총재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박 신임총재가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4월1일 취임직후 모종의 액션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4월 금통위에서 선제적으로 소폭이라도 금리인상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연 박 신임총재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의주시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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