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한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란,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하는 제도다. 김대중 정부가 1999년 도입한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역시 과거 야당 시절 이 제도의 강화를 주장했었다. 예타를 면제할 경우, 정책적,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사업이 추진될 수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 및 관련 학계에선 예타 면제 방침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밝힌 예타 면제 대상은 총 24조1000억 원 규모의 23개 사업이다. 앞서 17개 시·도가 총 33개 사업에 대해 예타 면제를 신청했었다. 이 가운데 약 69%가 받아들여진 셈이다. 약 20조 원이 도로 건설 등 토건 사업 몫이다. 김천∼거제 간 남북내륙철도 사업, 평택∼오송 복복선화 사업 등이 포함됐다.
관심을 모았던 서울시 동부간선도로 확장, 인천시 GTX-B 건설사업, 신분당선 수원 호매실 연장사업 등은 예타 면제 대상에서 빠졌다. 이들 사업은 정책적, 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거쳐야 한다. 정부는 수도권 지자체의 예타 면제 요구는 원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취지 때문이다. 다만 서울도시철도 7호선을 포천까지 연장하는 사업은, 수도권임에도 예외로 뒀다.
24조1000억 원 가운데 약 20조 원이 토건, 환경 및 보건은 6000억 원
정부는 29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내용의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 추진 방안을 확정하고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대상 사업을 의결, 신속하게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철도, 도로 사업은 올해 예산으로 기본계획을 추진하고, 연구개발(R&D), 공항 건설 등은 내년 예산에 반영한 뒤 추진한다. 2019~2024년 국가재정 운용계획 수립에도 반영해 중장기적으로 뒷받침한다. 거제, 통영, 울산, 군산, 목포 등 이른바 '고용·산업 위기 지역'의 예타 면제 요구를 주로 받아들인다는 방침이다.
토건 사업이 대부분이지만, 환경 및 공공보건 관련 사업도 일부 포함됐다. 약 4000억 원 규모인 제주 공공하수처리시설 현대화 사업, 약 2000억 원 규모인 울산 산재전문공공병원 사업 등이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 받는다.
또 지역 전략 산업 육성 사업에 대해서도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한다. 14개 시·도별로 48개 지역희망 주력산업을 지정, 해당 분야 지역 중소기업에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지역특화산업육성에는 1조9000억 원이, 시도별 스마트특성화 기반 구축에는 1조 원이 각각 예타 없이 투자된다.
이처럼 지역 전략 산업 육성 사업과 관련해서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받는 사업 예산 규모는 총 3조6000억 원대다. 여기에 제주 공공하수처리시설 현대화 사업과 울산 산재전문공공병원 사업 관련 예산을 합치면, 약 4조2000억 원이다. 예타 면제 사업 예산인 24조1000억 원에서 이를 뺀 나머지인 약 19조9000억 원은 모두 토건 사업에 투자된다.
24조1000억 원 가운데서 약 20조 원이 토건에, 약 3조6000억 원이 지역 전략 산업에, 약 6000억 원이 환경 및 공공보건에 쓰이는 셈이다.
4대강 사업 평가 위원장 "정부가 휴지통에 버린 평가방법으로 4대강 설명은 '모순'"
토건 사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전국 권역을 연결하는 광역 교통·물류망 구축 사업이다. 약 10조9000억 원이 쓰인다. 김천∼거제 간 고속 간선철도 건설에 4조7000억 원, 충북선 철도 고속화에 1조5000억 원, 평택~오송 복복선화에 3조1000억 원 등이 쓰인다.
이들 토건 사업이 시행되는 지역에선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경기도 포천 등 관련 지역 주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예타 면제 촉구 시위를 했었다.
그러나 시민단체 및 학계에선 비판 목소리가 거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은 현 정부의 예타 면제 방침에 대해 "토건사업 확대를 위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일이라며 일제히 반발했다. 이들 단체는 "국책사업은 수조 원이 투입돼 한번 시작하면 잘못된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도 되돌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4대강 사업 조사평가단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종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하루 전인 지난 28일 개인 페이스북에 긴 글을 실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SOC 사업들이 예타 면제로 확정된다면 나는 더 이상 대통령 훈령으로 만든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은 정책적, 경제적 타당성 조사가 불충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현 정부는 4대강 사업 조사평가단을 구성해서, 타당성 조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해 현 정부가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한다면, "이중적인 잣대로 국정을 운영해 온 것"이라는 게 홍 교수의 지적이다. 요컨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들이댔던 잣대는, 현 정부의 토건 사업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중 잣대'라는 것.
홍 교수는 "내년 총선이라는 정치적 일정에 꿰맞춘 것이라는 비판에서 진정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4대강 보처리 조사평가단 위원들께 얼굴을 들 수 없다. 위원장으로서 너무 죄송하다"라며, "정부가 가차 없이 휴지통에 던져 버린 평가방법을 사용하여 국민들께 4대강의 미래를 설명하고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라고 적었다.
갑작스런 예타 면제 방침…장하성 "2018년 말 지나면 '고용 개선'"
이런 비판은 정부도 예상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판했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날 "금번 프로젝트는 과거에 추진했던 30대 선도 프로젝트, 4대강 사업과는 사업 내용과 추진방식 등에서 다르다"고 밝혔다. 또 "중앙정부가 사업을 선정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 아닌 지역이 주도해 제안한 사업을 중앙이 지원하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추진한 것도 과거 사례와 다르다"고도 했다.
하지만 옹색한 답변이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한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방침은 지난해 말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보다 앞서 발표된 ‘2019년 경제정책방향’에서 부분적으로 예고되긴 했다. 그러나 강조점은 재정 지출 확대 및 민간 투자 활성화에 있었다. 대규모 정부 사업에 대해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한다는 내용은 그 뒤에 나왔다.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는 예타 면제 방침이 갑작스레 준비됐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서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소득주도성장 논란과 관련해 "고용 개선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장 전 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조선업 구조조정이 완료되고 자동차 산업도 회복세"라면서, 고용상황 개선의 시한을 "올해 연말(2018년 말)"로 구체적으로 못 박았었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을 지나면서도, 고용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예타 면제 방침과 맞물려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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