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융개혁을 압박하기 위한 미국 백악관과 월가의 연합전선이 본격 작동되기 시작했다. 금융개혁을 기피하고 있는 일본을 그냥 뒀다가는 '일본발(發) 세계금융위기'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내각은 그러나 일본 금융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에 직면, 제2차 공적자금 투입같은 정공법 대신 일본 은행들의 주식 매입같은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있어 '3월 일본 금융위기설'의 현실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무디스와 S&P의 '조직적 경고'**
미국의 세계 최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 투자서비스는 13일(현지시간) 일본 국채의 신용등급을 상위랭킹 4위인 현재의 Aa3에서 한 등급 아래인 A1 또는 두 등급 아래인 A2로 하향조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디스는 이날 공식성명을 통해 "일본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가장 큰 현안은 디플레이션"이라며 "대규모 공공부채, 기업부문의 과도한 채무, 은행시스템 등의 취약성으로 정책입안자들은 더욱 위협적인 디플레이션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무디스의 말대로 일본 국가신용등급이 한단계만 낮아져도 일본은 서방선진7개국(G7) 가운데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국가로 전락한다.
무디스는 또한 일본의 막대한 공공부채에 대한 우려도 함께 표명했는데, 일본의 공공부채는 오는 2003년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40%에 달하는 6백93조엔(52조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지난해 말 국가 자체가 파산한 아르헨티나조차 GDP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60%에 불과했다.
무디스에 몇 시간 앞서 미국의 또다른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역시 일본의 신용등급 하향조정을 경고하고 나섰다.
S&P의 비키 틸만 수석 부사장은 이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경제회복과 구조개혁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국채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S&P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하향조정한 것은 불과 석달전인 지난해 11월의 일로, 이날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인 하향경고였다. 더욱이 S&P는 지난주 일본증시에 나돌았던 S&P 신용등급 하향검토설에 대해 공식으로 이를 부인한 바 있다.
세계의 양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S&P의 경쟁적 하향경고 발언은 발언의 '강도'나 '시기'에 있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신용평가기관과 미국정부가 평소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금융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들은 97년 IMF사태 발발당시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한꺼번에 6단계나 하향조정한 바 있으며, 98년 10월 러시아 모라토리움(지불유예) 선언으로 세계금융공황 위기감이 고조됐을 때에는 이례적으로 한국 신용등급을 올려 세계자금의 물꼬를 한국 등으로 돌림으로써 위기를 수습한 바 있기도 하다. 이때에도 이들 신용평가기관과 미국정부간 사전교감설이 국제금융계에 파다했었다.
***미국정부의 압력, "필요하다면 금융기관 절반을 폐쇄하라"**
미국정부의 압박도 조직적으로 가해지고 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오는 18일 도쿄에서 만날 예정이다.
미국 정부의 수석 경제학자인 글렌 허바드 대통령경제자문(CEA) 위원장은 12일(현지시간) 일본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이 다음주 고이즈미 총리와 만날 때 은행 부실채권 정리 문제와 디플레이션 압력의 시급한 저지가 주요 의제로 부각될 것"이라며 "일본정부가 정공법을 택하지 않고 엔화 약세를 통해 수출회복 촉진을 추구한다면 이는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앞서 8일(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담에서도 일본의 금융개혁에 대한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이 가해졌었다. 오닐 미국 재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공개리에 "일본은 세계경제 성장에 공헌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더 노골적 압박이 가해졌었다. 지난 90년에 일본에 대해 가열찬 '엔 다카(高)' 압박을 가했던 것으로 유명한 미국정부의 핵심 싱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의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일본은 금융시스템을 일시에 정지시킨 뒤 절반에 달하는 금융기관을 폐쇄한 뒤 남은 은행들에게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IMF사태후 한국이 취했던 치열한 금융 구조조정 과정을 밟으라는 주문이었다.
***일본 금융계와 대장성의 '조직적 저항'**
이같은 월가 및 미국정부의 파상공세에 대한 일본정부의 답은 'NO'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13일 오전 중의원 답변에서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강제투입하는 방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12일 야나기사와 하쿠오 일본 금융담당상도 기자회견에서 "은행권에 공적자금을 강제투입하는 것은 자유경제 체제하에서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법은 파산하지 않은 금융기관에 대해선 해당 금융기관의 자발적 자금투입 요청이 있기 전에 자금투입을 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대장성은 공적자금 투입 대신 4조엔의 공적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해 급락하고 있는 일본은행 주식들을 사들이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은행주 매입을 통해 은행 주가의 추가하락을 막음으로써 3월말 결산때 나타날 은행의 주식평가손을 최소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정부의 해명 및 대책에 대한 국제금융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의 미봉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본은행들은 지금 자신들의 잠재부실이 36조엔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를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일본의 고무줄식 평가기준에 따른 수치일 뿐, 엄격한 국제기준에 따르면 일본 금융기관들이 안고 있는 부실규모는 최고 1백20조엔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기준을 적용할 경우 일본의 대다수 금융기관들은 '사실상의 파산'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과감한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국영화 및 금융구조조정 없이는 일본 금융 및 일본 경제의 재건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지배적 견해다.
하지만 일본 금융계와 대장성은 공적자금 투입에 수반되는 문책을 두려워해 공적자금 투입에 결사반대하고 있으며, 고이즈미 총리 역시 이에 굴복한 게 아니냐는 게 국제금융계의 싸늘한 시선이다.
***무너지는 고이즈미 개혁**
지난해 4월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했을 때만 해도 고이즈미 총리에게 거는 일본 안팎의 기대는 컸다.
니혼게이자이 신문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4월말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인 80%를 기록했고, 6월12일 조사에서는 85%로 더욱 높아졌다. 하향세로 반전된 7월24일자 조사에서도 69%, 9월25일 조사에서는 70%, 11월27일 조사에서도 78%를 기록했다. 역대 어느 총리보다도 높은 지지율이었다.
그러던 것이 자민당 및 관료들과 타협해 지난달에 '관료와의 전쟁'을 벌이던 다나카 외상을 전격 경질하면서 고이즈미에 대한 기대는 급락, 13일 발표된 고이즈미 지지율은 55%로 떨어졌다. 역대 여론조사결과 22%포인트나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 '성역없는 구조개혁'이라는 고이즈미의 공약에 대한 신인도는 "믿을 수 없다"고 답한 이가 60%에 달해 "실현가능할 것"이라고 답한 33%의 거의 두배에 달했다.
말 그대로 '고이즈미 신뢰'의 붕괴이다.
일본이 과연 언제까지 일본식 스탠더드에 기초한 '마이 웨이'를 걸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계최대 무역흑자국인 일본이 아직 미 재무부 채권의 최대보유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도 섣부르게 일본을 파국으로 몰아넣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깨진 지 이미 오래다. 시장의 신뢰가 깨지면 아무리 미국과 일본 정부가 손잡고 사태를 수습하려 해도 쉽지 않은 게 국제금융계의 냉혹한 현실이다.
'3월 위기설'로 상징되는 일본발 금융공황 위기감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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