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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금융, 일본 앞질렀다"

예금부분보장제ㆍ시가평가제 등 앞서 도입

"한국금융이 마침내 일본금융을 앞질렀다."
요즘 들어 국제금융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반가운 평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지는 8일(현지시간) 일본금융위기를 다룬 '서울의 가르침(Seoul's Lesson)'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금융계는 한국금융구조조정에서 배우라"고 훈수를 두었다. 한국금융이 아직 완벽한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97년 IMF사태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AWSJ)도 7일자 기사에서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 모두가 투자적격처로 한국을 주목하는 이례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한국의 구조조정을 높게 평가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기분 좋은 평가들이다.

***일본을 앞지른 두 가지 제도적 이유**

한국금융계가 이처럼 국제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IMF사태후 지난 4년간 정부와 금융인들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 노력을 해온 결과다.
3월 금융위기설로 위기감이 팽배한 일본과 비교해보면 그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의 3월 금융위기설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증폭되고 있다.
하나는 오는 4월1일부터 예금부분보장제가 실시된다.
다른 하나는 오는 7월1일부터 채권 시가평가제가 실시된다.

전자인 예금부분보장제는 금융기관 파산시 1인당 1천만엔까지만 정부가 보장을 해준다는 것이다.
후자인 채권 시가평가제란 채권가격을 장부가가 아닌 실제가격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즉 부실기업의 채권은 그만큼 낮게 평가되고, 그 결과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은 그만큼 대손충당금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은행 가운데 절반 정도가 쓰러질 것"(미국의 버그스텐 소장 평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잠재부실이 심한 일본 금융기관들로부터 무더기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결과 3월 결산때 일본금융의 뿌리가 흔들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두 가지 제도를 이미 도입해 실행하고 있다.
예금부분보장제는 2001년 1월부터 전면실시, 1인당 5천만원까지만 보장해주고 있다.
채권 시가평가제는 98년 11월15일 부분도입됐고, 2000년 7월부터 전면실시되고 있다.

도입과정에 우리나라도 엄청난 저항과 시련에 직면했다.
예금부분보장제를 시행한 지난해 1월은 현대그룹 유동성위기로, 한국경제 전반에 위기감이 팽배했던 시점이다. 당연히 저항과 비판이 잇따랐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경제전문가들이 '실시 유보'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팀은 보장한도를 2천만원에서 5천만원으로 높이는 부분적 타협만 했을 뿐, 당초 예정대로 밀어부쳤다.

채권 시가평가제를 도입할 때는 상황이 더욱 험악했다.
세계자본주의사상 개별기업 규모로는 최대인 80조원 규모의 대우사태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IMF와의 약속대로 이를 실시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숨겨져 왔던 은행 등 금융권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진통끝에 50조원의 2차 공적자금을 조성해 이 문제를 풀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일본보고 한국에서 배우라는 조언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행 과정에 엄청난 고통과 저항이 뒤따랐으나 정면돌파하는 방법을 택했기에 오늘날의 한국경제 재건이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중국 "과연 한국처럼 할 수 있을지. 우리는 5년후가 겁난다"**

한국은행의 자금담당 국장이 지난해 하반기 스위스 바젤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이틀간 열린 회의의 주된 화제는 한국의 채권 시가평가제였다.

"어떻게 단기간에 그렇게 어려운 시가평가제를 도입할 수 있었느냐"는 게 주된 물음이었다.
한국이 도입한 채권 시가평가제는 철저한 미국식이다.
금융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도 아직 한국 수준의 엄격한 시가평가제를 하는 나라는 드물다.
'한다면 하는' 한국형 돌파력에 대한 찬사가 계속됐다 한다.

회의가 끝나는 날 중국대표가 회의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솔직히 말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이해가 안 간다. 중국 속담에 '눈을 한번 껌뻑하는 데 10년이 지나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신속한 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다. WTO에 가입한다고 금융시장을 바로 여는 건 아니다. 5년간의 유예기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5년 안에 중국이 한국처럼 금융시장을 정비할 수 있을지는 자신없다."

***"이제는 한국의 숫자를 믿을 수 있다"**

한국금융의 업그레이드에는 정부도 많은 공헌을 했지만, 민간 금융인들의 역할도 지대했다.
때로는 정부와 충돌하면서까지 한국금융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치열한 자기개혁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 예가 김정태 통합국민은행장이다.
그는 많은 면에서 정부정책에 앞서 글로벌 스탠더드(국제기준)를 도입했다.

98년 취임직후 주택은행에 국내에서 최초로 미래상환능력(FLC) 방식에 따른 회계방식을 도입해 4천5백억원의 적자를 발생시켰다. FLC방식에 따른 회계는 정부가 IMF와 99년말부터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2001년말부터야 워크아웃 여신에 대해서까지 전면도입키로 한 제도였다.

주택은행은 또 99년에는 세계 5대 회계법인중 하나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에 아예 회계감사를 맡겨 버렸고, 맥킨지 컨설팅 결과를 수용해 경영지배구조를 이사회 중심으로 재편하고 집단소송제도 도입했다.
다른 은행들도 시차가 있긴 하나, 같은 투명성 제고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계 펀드매니저는 한국의 금융구조조정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요즘 외국인들이 경쟁적으로 한국의 은행주를 사들이고 있는 것은 이제 '한국의 숫자'를 믿기 시작한다는 반증이다.
채권시가평가제 도입이 결정적이었다. 잠재부실을 숨기는 것이 원천봉쇄된 탓이다.
FLC 등 선진적 대손충당금 적립기준을 도입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아직 한국의 구조조정은 완성단계가 아닌 진행형이다. 구조조정이 안 끝난 기업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은 숫자를 믿을 수 있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투자가들이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한국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제 한국의 숫자를 믿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하기만 한다면 어떤 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한국은 제2의 IMF사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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