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지난 20일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 '네덜란드의 기적'이 세간의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지구상에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게 이 프로그램을 본 모든 이들의 공통된 경탄음이다.
16년간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내고 내무장관까지 지낸 인물이 공직기간중 단 4백만원을 유용한 사실이 네덜란드 최악의 부패 스캔들이 되고 있는 나라, 2백여명의 국회의원들 가운데 단 한명도 자가용 운전수를 두고 있는 이가 없을뿐 아니라 대다수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라, 청교도 전통에 따라 가진 자가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고 있어 계층간 위화감이 없는 나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 실업 발생을 막고 있는 나라.
TV에 비친 네덜란드는 너무나도 부러운 '인간의 공동체'였다.
본지는 이에 이 프로그램 제작의 토대가 된 젤 비세르와 안톤 헤메리지크의 공저 <네덜란드의 기적(A Dutch Miracle)>을 긴급 입수했다. 아울러 캐나다의 민간경제연구소 AIMS의 수석정책분석가 프레드 맥마흔이 <네덜란드의 기적>을 다각도로 심층분석한 <성장으로 가는 길>(ROAD TO GROWTH)도 구했다. 네덜란드 기적의 이면을 심층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본지는 앞으로 3회에 걸쳐 '네덜란드 기적'의 뿌리를 추적하기로 한다. 편집자
***네덜란드의 기적,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국가경쟁력 세계 5위,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인 네덜란드. 1980년대초 서유럽 최고의 '문제국가'에서 오늘날 유럽의 스타 국가가 된 것을 두고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이라고 부르며 경제 위기를 겪는 나라들이 지금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제기적은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은 케이스라는 점에서 특히 우리에게 주목된다. 미국의 시장경제주의가 ‘강자의 논리’라면 네덜란드의 자본주의는 ‘모두의 논리’다.
네덜란드는 정부보다는 민간의 자율과 협력에 기반을 둔 ‘협의주의’ 전통이 강하다.
네덜란드는 모든 것을 협의체를 구성해 결정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국제무역을 주름잡던 동인도회사 역시 각 도시 상인들의 협의체에 의해 경영됐다.
17, 18세기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절대왕권이 없는 상태에서 7개 주 대표들이 협의체를 구성해 국정을 주도했다.
네덜란드에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왕이나 권력자가 없었고, 따라서 도시를 운영하는 협의구조가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치구조가 되었고 이는 계속 남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노사정 협의체가 경제 기적 일궈내**
우리나라에서는 번번히 실패로 끝난 노사정위원회가 네덜란드에서는 ‘기적의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덜란드의 노사정위원회가 바로 '세르'(SER)다.
네덜란드식으로는 사회경제위원회로 명명되는 SER는 1950년 정부자문기관으로 설립되었다. SER는 노사협의를 최종적으로 조정하는 기관으로 정부의 각종 사회경제 정책을 자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노조와 경영자측 대표, 그리고 공익을 대표하는 전문가 집단(정부 임명)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집단은 모두 11명씩 대표를 갖는다. 이 곳에서 결정되는 내용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 정책으로 추진된다.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파업과 진압이 끊이지 않던 서유럽 최악의 경제였던 네덜란드가 지금은 유럽의 스타 경제국가가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생산비용을 증가시키는 각종 규제가 심했다. 이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지자 정부는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삭감해 공무원 월급을 깍고 감원을 하는 동시에 기업주와 노동자가 내던 의료보험, 고용보험료 등을 깍아주는 과감한 감세정책을 폈다. 이것은 노사정이 모여 합의한 임금삭감, 일자리 나누기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도표 1>
1980년대초 네덜란드의 경제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있는가를 살펴보자.
1984년 실업률은 17%로 치솟았다. 1881~1983년 사이 3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1984년 매달 10만명씩 실업자가 늘어나 80만명에 이르렀다.
198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성장률은 0%선에 머물렀다. 정부지출은 1973년 GDP의 40%에서 1983년 58%로 급증했다. 그런데도 당시의 완벽한 사회보장제도 덕에 사람들은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도표 2>
***반 빈의 식탁에서 이뤄진 네덜란드의 기적**
경제파탄이 극심해지자 네덜란드 국민은 위기 극복을 위해 뜻을 모았다. 1982년 네덜란드 정부는 비로소 사회적 비용 감축과 경제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시장개혁과 정부지출삭감에 초점을 맞춘 개혁은 강력한 성과를 가져왔다.
1982년 미국의 비벌리힐즈에 해당하는 헤이그의 북쪽 바세나르에서 당시 네덜란드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VNO-NCW 회장 크리스 반 빈은 직장에 나가는 아내 대신 아이를 돌보느라 주로 집에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최대노조단체 FNV의 빔 콕 회장과 자기 집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다. ‘네덜란드의 기적’을 가져온 가장 핵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 바세나르 협약은 바로 반 빈의 식탁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바세나르 협약은 임금조정과 민간의 수익향상에 대해 집중했다.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현실에 대한 극적인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 중 네덜란드가 먼저 놀라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3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 1980년대초 지나친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혹독한 불황을 겪고 있음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통제불능의 상태였다.
두 번째,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개방형 경제여서 국제 경쟁에 압박감을 더 크게 느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사회각부문의 이해관계가 복잡한데도 불구하고 타협을 이끌어내는 협의체적 전통이 강했다는 점이다.
통제불능이라고 할 정도의 사회상황에서 바세나르 협약이 극적으로 맺어진 것도 놀랍지만 이것이 효과를 봤다는 것은 더 놀라운 것이다.
바세나르 협약에 따라 2년내에 기존의 모든 규약 중 3분의 2가 갱신되었다. 1985년 생계비 완전보장 조항은 10% 대로 바뀌었다. 평균실질임금은 9% 떨어졌다. 그 대신 노조는 일자리 재분배를 위해 주간 노동시간 감축에 나섰다.
1982년에는 1994년에 물러날 때까지 네덜란드 사상 최장수 총리였던 루드 루버스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루버스 정부는 공무원 봉급과 사회보장비, 최저임금 등을 동결했다. 1983년에는 이마저 3.5%씩 삭감했다.
1986년 공공노조는 전후 최대의 파업으로 저항했으나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3%의 임금 삭감과 주당 38시간 노동에 합의했다.
그러나 1987년 경제안정은 다시 위협받았다. 1988~1991년 국제적인 경기호조 분위기에 따라 노조는 다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감세, 복지제도 민영화 등 사회적 비용 줄이는 데 성공**
바세나르 협약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네덜란드 경제는 1992년 다시 불황에 빠졌다. 세계적인 전자회사 필립스와 포커 항공사 등 네덜란드의 대표 기업들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네덜란드의 제조업 일자리 1백만개 중 10분의 1이 1992~94년에 사라질 정도였다.
위기는 다시 영웅을 불러냈다. 1994년 총선에서 네덜란드 사상 최초의 좌우익 연합정권이 탄생하면서 바세나르 협약을 이끌어냈던 노조지도자 빔 콕이 수상이 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정부지출 삭감, 세금감세, 시장경제활성화, 규제완화, 사회복지제도 수정, 민영화 등 과감한 조치를 실시했다.
<도표 3>
빔콕 정부가 정부가 취한 조치는 1982년 때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것이었다. 빔 콕 정부는 1994~98년 중앙정부의 지출을 6% 삭감하기로 했다. 국민 저축은 재정적자를 줄이고 감세로 인한 세입을 보충하는데 돌렸다. 새로운 정부는 이전 정부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경제를 예측하는 바람에 재정 적자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한 점에 주의해 긴축적으로 예산을 편성했다.
그런데 개혁정책과 노동계의 달라진 태도로 인해 경제는 예상보다 1% 포인트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1994~95년 GDP 성장률은 연평균 3.25%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 경제의 악순환 고리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네덜란드 정부는 1996년 재정적자를 GDP의 2%까지 끌어내릴 수 있었다. 1997년에는 재정적자가 GDP의 0.9%에 불과했다.
또한 세금 삭감은 2백억 길더(약 10억 달러)나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GDP의 2.5% 가까운 것으로 목표치의 두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세계은행 통계(1997년)에 따르면 GDP에서 세입의 비중이 1993년 46.1%에서 1995년 42.9%로 떨어졌다. 1998년에는 42.5%로 더욱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장기적으로 세금삭감에도 불구하고 세수가 많아지려면 GDP가 세입 감소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네덜란드 통계청 자료(1999년 8월)은 1998년에 세수가 8.8% 늘 것으로 추정했다.
세금삭감은 네덜란드의 비용경쟁력 측면에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1982~1997년 세금 부담은 평균 2.8% 줄어들었다. 영국은 이 기간에 세금부담을 1.9% 줄이는데 그친 것과 비교된다.
반면 독일은 세금부담이 2.6% 늘고 프랑스는 2.3% 늘었다. 전반적으로 유럽연합 국가들은 세금부담이 평균 2.6% 올랐다.
이 점만으로도 네덜란드가 경제성장과 고용률에서 앞서가는 이유를 잘 말해준다. 영국과 아일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직업 창출과 경제성장에서 호조를 보이는 이유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1994~98년 네덜란드 정부는 사회보장 지출에도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병가에 대한 임금이 사회보장비에서 지출되었던 1990년 근무일 100일 중 7일은 병가로 쓰였다. 영국의 2.6일, 독일의 5일(1998 OECD)이라는 통계와 비교된다.
1996년 이 병가보조금제도는 기업의 부담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기업주에게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기업으로서는 종업원들의 복지를 위해 각종 인센티브를 주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치로 1994~1997년말 병가는 25%나 줄어들었다.
사실상 본인이 원하면 노동장애인으로 분리돼 편안히 나랏돈을 받고 살 수 있는 복지제도도 개혁 대상이었다. 저임금층에서는 실제임금과 사회보장비와 거의 차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초 국민들의 건강이 가장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네덜란드에서 6백만 노동자 중 1백만명이 노동장애인으로 분류될 지경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동장애인을 엄격히 심사하고 점차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제도를 민영화하고 있다.
이 역시 기업으로 하여금 종업원이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 비용이 감소하면서 네덜란드의 경제는 갈수록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3.8%로 예상되고, 1997년 실업률은 6.4%로 떨어지고 1999년 중반 4%까지 실업률이 감소했다. 1990년대 첫 3년간 15~64세 인구 중 56.3%의 고용률이 1997년 60.6%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실업률이 감소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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