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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류'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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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주류' 떠오르고 있다

한국 주류사회에 균열현상 뚜렷

이름 석자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개업의 A원장(38)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잘 벌고, 동시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의사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낼 것은 내면서 번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절세를 한답시고 이리저리 복잡하게 장부를 꾸민다는 게 구질구질한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아서이다.

덕분에 지난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세금을 잘 안내는 고소득층 의사들을 세무조사한다고 국세청이 강남 병원가 일대를 뒤집고 있으나, 그의 병원만은 조사대상에서 ‘열외’다. 세무서도 그의 성실신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의사집단 사이에서 ‘미운 오리새끼’가 됐다. ‘그래, 너 잘 났다’는 식의 반응이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에 열몇시간씩 환자를 직접 돌본다. 짬이 나면 틈틈이 자신의 병원에서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네티즌들의 궁금증에 자신의 실명으로 답한다. 그 덕분에 그의 사이트 조회율은 매일같이 3만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의 낙은 주말마다 떠나는 등산이다. 이따금 골프장에 나가기도 하나, 그보다는 땀을 빼며 산등성이를 오르기를 좋아한다.

그는 평소 도네이션(Donation: 기부)에도 관심이 많다. 소리소문 없이 가난한 소년소녀가장들을 몇 년째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고, 얼마 전에는 모교에 10억원에 가까운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라 한다. 그는 그 대신 떡고물이라도 생길까 싶어 자신의 주변에 얼쩡거리는 이들을 경멸하다시피 한다. 여기에는 일부 기자들도 포함돼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나"**

A원장은 자신의 능력으로 오늘날의 위치에까지 오른 철저한 자수성가형이다. 지금은 강남의 60평대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나, 몇해전 그가 병원을 처음 차릴 때까지만 해도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었다. 은행을 찾아가 병원 개업비 5천만원을 빌리려 했으나, “담보와 신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명동 사채시장을 찾아가 급전을 빌려 개원을 해야 했다.

그가 얼마 전 민주당의 개혁진영 대통령후보 주자인 김모의원 캠프를 조용히 찾아가 수천만원의 거액을 정치후원금으로 선뜻 내놓았다. 김모의원과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에게 “왜?”냐고 물었다.

“정치를 직접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요즘 정치판 등 우리 사회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 이런 상황이 계속 가다가는 나도 남들처럼 아이 데리고 이민을 떠나는 길밖에 없어보인다.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정치인들 중에서도 그래도 김모의원이 가장 합리적이며 진솔하다는 판단이 서, 그에게 얼마 안되는 돈이나마 후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모의원이 ‘당을 깨고 나와서라도’ 새로운 정치세력들을 규합, 차기 대통령선거에 도전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의외로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내 또래 친구들이 주위에 많다. 김모의원이 정말 새 정치를 하겠다고 당을 깨고 나선다면 음으로 양으로 많은 이들이 도울 것이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뭉친다면 내년 대통령선거도 한번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한나라당의 惡手**

10.25 재.보선후 잘 나가던 한나라당이 얼마 전 ‘악수(惡手)’를 두었다.
교원 정년을 62세에서 63세로 한 살 연장했다가 여론의 거센 저항에 부딪친 것이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손을 잡고 국회 교육위에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기분좋게 ‘여소야대’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동안 교원정년 연장을 주장해온 교원단체총연합회 등 ‘교육계 주류(MainStream)’의 민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기치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여론이 살벌하게 돌아갔다.
MBC가 한국갤럽과 손잡고 전국 1천1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2.6%가 “정년연장은 잘못된 일”이라며 “교원정년 연장은 당리당략에 의한 결정으로 본다”고 답했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잘못된 정책 바로잡기”라는 주장에 동조한 이는 12.8%에 불과했다.
한국일보가 한국통신엠닷컴과 공동조사한 결과는 더욱 삼엄해, 응답자의 70.8%가 교원정년 연장에 반대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한나라당 수뇌부는 크게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이회창 총재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와중에 터진 만큼 수뇌부는 오는 29일 이총재 귀국후 처리하자는 측과, 귀국전에 처리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하루에도 몇 차례나 ‘강행’과 ‘유보’ 사이를 오갈 정도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왜 이런 사태가 발발했나.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몇몇 이익집단에게 발목이 잡힌 셈”이라고 지도부의 안일함을 성토했다. “교직원 사회의 세대교체를 원하는 학부모 전체여론을 읽지 못하고 교원단체 수뇌부들의 말만 듣고 밀어붙이다가 뒤탈이 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만으로는 명쾌한 답이 못된다. 이번 사태에는 그 이상의 중차대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주류는 우리편"이라는 착각**

한나라당은 그동안 “한국사회의 주류는 우리편”이라고 자신해왔다.
한국사회에서 주류, 즉 메인스트림(MainStream)이라 함은 권력과 부, 명예를 움켜쥔 파워집단, 오피니언 리더들을 가리킨다. 한나라당은 이들이 DJ식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안티DJ’를 주장하는 자신들을 전폭 지지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지난 10.25 재.보궐 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압승이 이를 입증해주는 산 증거라 말해왔고, 내년말 대통령선거에서의 정권탈환을 자신해왔다.

교육계의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교장 등의 강한 불만을 사온 교원정년 연장도 이같은 주류의 입장 대변 차원에서 한나라당이 선거승리후 가장 먼저 칼을 빼어든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기치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일반 학부모들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이라 여겨왔던 강남의 내로라하는 중.상류층 학부모들도 일제히 한나라당 조처에 강력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이 크게 당혹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이라 여겼던 중.상류층의 생각을 잘못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이번 사태는 한나라당이 몇몇 이익집단의 로비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사회 주류집단 내부에 일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못 읽고 있기에 발생한 일대 사건이었다.
흔히들 우리 사회에서 ‘주류’ 하면 보수적 이익집단, 반공적 이데올로기, 정경유착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신 주류'의 출현**

‘구 주류(Old MainStream)’는 실제로 기존 통념과 상당부분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 구 주류와 여러 모로 대비된다는 측면에서 ‘신 주류(New MainStream)’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오피니언 리더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현재 산업계, 관료계, 학계, 언론계 등 거의 모든 사회부문의 허리들은 40대와 30대 후반이 맡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70~80년대 대학시절 유신시대와 신군부 통치시절을 경험하며, 구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몇 가지 가치관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능력보다는 지연. 학연. 혈연이 중시되는 사회와 정경유착 같은 축재방식에 대한 환멸감, 북한에 대한 탈냉전적 공동체 의식, 교육등 각 부문을 지배하고 있는 관료주의 행태에 대한 거부감, 지역주의와 권위주의에 찌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 환경 등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한 높은 이해 등등.
이런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세력들이 지금 우리사회의 허리 부문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결과 기존의 주류 통념을 뒤엎는 신주류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들 연령대의 전체가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사회를 흔들고 있는 각종 정경유착 스캔들의 주역들이 한결같이 30대 벤처기업들이라는 점만 보아도 그러하다. 어떤 면에서는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능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악적 존재는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는 건강한 가치관에 근거해 사회 돌아가는 모양새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여론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하고 있는 60%대의 유권자들은 바로 이들인 것이다. “더 이상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며 무더기로 이민 길을 떠나고 있는 중.상류층들이 바로 이들 신주류다. 김모의원에게 수천만원을 건네준 A원장도 이같은 시대정신의 아들이자, 신 주류의 한 표상인 것이다.

***무조건적인 안티DJ는 "NO"**

국내 환경운동의 선구자격인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내년 6월 지방자치단체선거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자치단체선거에 최소한 2백~3백명의 후보를 내겠다는 게 그의 복안이다.
그의 자신감은 다른 시민단체들과 약간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현재 매달 1만원씩의 회비를 내고 있는 환경연합의 회원숫자가 8만6천여명에 달한다. 국내 시민단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이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환경연합 회원의 절반이 강남 지역의 화이트칼라들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서는 이들의 회원 가입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시민층이 본격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같은 흐름도 신주류의 반란 가능성을 예고케 하는 한 대목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수천억원대의 외국자금을 운용해주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국계 펀드매니저 B씨는 요즘 한나라당 수뇌부 움직임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그는 미국에서 MBA(경영학석사과정)를 마친 전형적 펀드매니저이자, 외국계 투자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오피니언 리더중 하나다.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이긴 여파로 김대중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자 외국인 투자가들 사이에 향후 한국정치를 불안하게 여기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무조건 안티DJ로 가는 게 아니냐, 그러면 DJ의 개방정책도 변질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의 확산이다.
이런 기류가 전달된 탓인지 최근 이회창 총재가 외국인투자가들과의 만남 회수를 늘리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다수의 외국인투자가들은 향후 정국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B씨는 “이런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선 한나라당이 DJ정책중 승계할 부문은 승계하고 고칠 부문은 고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만약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한국에의 투자 리스크(위험)를 크게 줄여준 햇볕정책과 개방정책, 두 가지만은 승계해주기를 희망하나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고 불안감을 토로했다.
그는 “만약 차기정권이 외국인투자가들의 불안감 해소에 실패해 이들이 한국에서 빠져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이번에는 정치 때문에 또한차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 주류'와의 접목만이 살 길이다**

DJ정부와 조.중.동 ‘언론 빅3’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홍석현 중앙일보회장이 “우리는 DJ의 언론정책에는 반대하나 햇볕정책은 지지한다”고 말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언론사주들 가운데 가장 먼저 감옥에 갔다왔던 홍회장의 선언은 당시 ‘무조건 안티DJ’로 흐르던 보도논조에 싫증을 느끼던 독자들로부터 “신선하다”는 호의적 평가를 받았다.
홍회장의 이같은 선언은 단순한 레토릭(수사법)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후 그는 자신이 발행하는 언론매체에 냉전적 사고에 젖은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것으로 기자협회보등을 통해 전해진다.

홍회장의 선언이 의미하는 것은 ‘신 주류’와의 접목 시도이다.
과거의 구 주류와 다른 시대정신으로 중무장한 신 주류와의 접목 없이는 언론산업의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시대는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흐름에 적확한 기폭제만 추가된다면 미증유의 폭발로 연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 주류사회를 양분하기 시작한 구 주류와 신 주류간의 갈등은 ‘반(反)변화’ 대 ‘변화’의 갈등으로도 해석가능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과거 운동권적 차원의 갈등이 아닌, 이해관계의 갈등 구조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비로소 시민사회의 전 단계인 ‘부르조아 혁명’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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