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가 국민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대의민주주의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방대한 행정부와 각 기관을 감독하며 시대 변화에 따라 법과 제도를 책임지는 입법부의 역할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예산은 23배 늘어날 동안 국회의원 숫자는…
단적으로 13대 국회가 구성된 1988년과 20대 국회가 시작된 2016년 사이에 인구는 4203만 명에서 5167만 명으로 23%가 늘었고, 공무원 수도 44.5%가 늘었다. 국가 예산은 17조4644억 원에서 401조8000억 원으로 무려 23배 증가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세종특별시 선거구 신설로 단 한 명 늘었을 뿐이다.
물론 국회의원 증원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지역구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는 협치와 대안 제시보단 정쟁과 비난으로 점철되도록 만들었으며, 국가 전체의 미래보다 지역구 주민의 단기적 인기에 영합하는 각종 행태로 심각한 자원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즉 가뜩이나 적은 수의 국회의원으로 할 일은 태산 같건만 막상 정당이나 국회의원 당사자들은 본연의 역할보다 다른 일에 역량을 낭비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지역 대표성을 가지는 지역구 의원과 정당 투표로 선출되는 비례의원 두 가지 선출방식이 운영 중이다. 현재의 비례대표는 일명 '병립형'으로 고작 47석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대해서만 정당투표 결과가 반영된다. 이로 인해 정당에 대한 지지 정도와 실제 국회의원 의석과는 현격한 차이가 벌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대안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지난 1월 9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산하 '선거제 개혁 자문위원회'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국회의원 정수 360명으로 증원, 선거연령 18세 인하를 핵심으로 권고안을 제출했다. 전직 국회의장과 학계·여성·청년 등 각계 대표로 구성된 자문위가 지난해 11월부터 두 달여간 의견을 모은 끝에 한목소리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역할을 하려면 비례대표 국회의원 숫자를 늘려야 하는데, 그게 쟁점이 되고 있다. 물론 지역구 의원 숫자를 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253석인 지역구 의원을 줄이기도 쉽지 않다. 현역 의원 기득권 문제를 떠나 이미 인구수가 적은 군 단위는 생활권도, 지역상황도 전혀 다른 5개 군을 하나의 선거구로 단 한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다. 단적으로 홍천군,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선거구는 면적만 5697㎢로 605㎢ 면적인 서울특별시의 9.4배가 넘으며, 선거구 순회를 위해 철원읍사무소를 출발해 화천, 양구, 인제, 홍천군청까지 가는 데만 편도 200km가 소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제도 개혁의 키를 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개특위 간사 김종민 의원은 "민주당은 의원정수 확대 없이 선거제도 개혁을 하자는 것이 기본 입장"임을 내세우고, 자유한국당의 정개특위 간사인 장제원 의원은 "(자유한국당은)의원정수 확대는 안 된다는 게 확고한 입장"을 외친다. 더불어 농어촌과 중소도시는 소선거구제, 100만 이상 대도시는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자는 '도농복합선거구제'까지 주장하고 있다. 정개특위가 1월까지 선거제도 개혁안을 내겠다고 했지만, 거대 양당의 태도를 보았을 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독과점을 강요하는 선거제도
사실 의원정수 증원에 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정치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원인이며, 이러한 정치 불신의 원인은 사실 잘못된 선거제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특권의 크기는 특권을 향유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작아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의대 정원 증가를, 법조인들은 변호사 증원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사실 거대 양당이 국민 여론이라는 방패에 숨어 국회의원 증원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특권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소수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태를 막기 위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 독과점 사업에 대해 규제를 강력히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1인 1표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의정치체제에서는 아예 대놓고 독과점을 초래하는 선거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 양당 입장에서도 지금의 선거제도는 너무나 위험하다. 지난해 열린 제7회 동시지방선거에서야 현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재미(?)를 보았지만, 2006년에는 집권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재앙적 선거 결과를 받았다.
2006년 제4회 동시지방선거 서울시의원 선거를 살펴보면, 한나라당은 57.17%의 정당 득표를 얻었지만 시의원 106석 중 102석을 차지했다. 무려 96.23%다. 반면 2018년 서울시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50.92%의 정당 득표를 얻고 시의원 110명 중 102명. 92.73%를 차지했다. 아무리 지지율이 떨어졌어도 2006년의 열린우리당과 2018년의 자유한국당은 지지율이 최소 20~30%였다. 그러나 20%가 넘는 지지율은 그 가치가 10분의 1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역 이용해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다음 총선에선 자유한국당의 씨를 말려야한다"며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다. 지금이야 집권여당으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지만 2020년의 정세와 국민여론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식의 오만은 되려 2006년의 경험을 다시 겪게 만드는 촉매가 될지 모른다.
더불어 국회의원 정수 증가와 관련해 단순히 국민 여론조사가 아니라 고리원전이나 대학입시 논의때처럼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할 필요도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선거관리위원회나 '선거제 개혁 자문위원회' 모두 연동형 비례대표 도입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증원을 주장한다. 이는 우리나라 선거제도의 문제점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한다면 대안은 비례대표제 확대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공론화위원회 회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상당하지만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그 어떤 주제보다 공론화위원회로 논의하기에 적합한 주제다. 그토록 국민 여론이 중요하다면 정개특위 일정을 다소 늦추더라도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좀 더 정확한 정보에 기반한 국민 여론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짬뽕을 먹고 싶다
중국집에 짬뽕을 먹으러 갔다. 분명히 메뉴판에도 있기에 난 짬뽕을 주문했다. 그러나 중국집 사장님은 짬뽕이 아닌 짜장면을 가져다줬다. 왜 그러냐 물으니, "옆 테이블에 계신 4명이 모두 짜장면을 시켰으니 손님도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재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출 제도이다. 우동을 주문하건 볶음밥을 주문하건 메뉴판에 있다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 달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이를 위한 국회의원 증원은 이런 상식적인 소망이자, 헌법 37조에 명시된 국민의 자유권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연동형 비례대표를 동의하지만 국회의원 증원은 안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더불어민주당에 진심으로 요청한다. 그런 주장을 하고 싶다면 의원 총회를 열어 '지역구 국회의원 200석 이하 감축' 결의안부터 채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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