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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화', 그리고 파워엘리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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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화', 그리고 파워엘리트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2강-②] 군산복합체와 안보 관료의 등장

2차 대전은 미국 사회가 전면적으로 군사화되는 첫 번째 계기였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가 대외 정책의 실세가 됐고, 대기업은 연방정부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군수산업이라는 새롭고 거대한 수요처를 확보했다. 군산복합체의 등장이다.

또한 뉴욕에 근거를 둔 국제금융가와 대기업 국제변호사들이 연방정부의 안보 관료로 대거 발탁돼 미국의 대외정책을 전담한다. 이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의 3자 연합은 이후 군사 개입에 의한 세계 경영을 추진한다. 파워엘리트의 탄생이다.

2차 대전을 통해 연방정부가 비대해지면서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이 사실상 의회에서 행정부로 넘어갔다. 예컨대 반전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미 의회에서는 미국의 해외 참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당 루이스 러들로 하원의원이 발의한 이 결의안, 즉 '러들로 결의안'은 1938년 1월 의회 표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는데, 이를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치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리스 내전 개입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나 한국전쟁 개입은 의회의 승인은커녕 상의조차 없이 결정됐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지침 역할을 했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였다. 강력한 군사력이 국내 번영과 세계 패권을 유지해준다는 믿음이었다. 이른바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가 그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안보 관료들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자리에 놓으면서 '뮌헨의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에 양보한 뮌헨의 유화정책이 2차 대전을 불러왔다면서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제 전쟁, 또는 전쟁의 준비는 필요한 것을 넘어 바람직한 것이 됐다. 그리고 정부의 최대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됐다. 파시즘과 맞서 싸운 어제의 동지 소련이 이제는 불구대천의 숙적이 됐다. 아니, 돼야 했다. 그들에게 소련과는 대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군사적 대결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2차 대전 직후 약 18개월 간 급속한 동원 해제로 일시적으로 퇴조하는 듯했으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재시동을 걸었으며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면적 재무장이 단행되면서 미국 사회의 기본 구조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연방정부의 팽창 :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의 탄생


2차 대전은 미국의 연방정부를 급속하게 팽창시켰다. 그중에서도 안보 부문의 팽창이 두드러졌다. 전쟁이 일어나던 1939년 미 연방정부의 공무원은 80만 명이었고 이중 안보 관련은 10%였다. 전쟁 직후 공무원의 전체 규모는 400만으로 늘어났고 이중 75%가 안보 관련이었다. 전체 관료 숫자는 5배로, 안보 관련 공무원은 8만에서 300만으로 3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연방정부의 세입 규모는 8.8배 증가했다. 그 돈은 누가 냈을까? 국민들이 냈다. 1차 대전 때 미국은 채권(Liberty Bond) 발행으로 전쟁 자금을 댔다. 반면 2차 대전은 국민 세금(소득세)으로 충당했다.

1919년에서 1939년까지 미국에서 소득세를 내는 가구는 전체의 1.5~2.5%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3년이 되면 거의 모든 가구가 소득세를 낸다. 1945년에는 개인 소득세 세입이 기업 법인세 세입을 초과하면서 사상 최초로 소득세가 연방정부의 최고 세입항목이 된다. 이후 20년간 민간 소득의 8~9%가 소득세로 징수됐고, GNP의 10~11%가 국방비로 쓰인다.

이처럼 국민의 혈세로 모아진 전쟁 자금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수 십 개 거대 기업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다. '이익은 사유화, 위험은 사회화'라는 전쟁과 금융의 공통점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프레시안(최형락)

1930년대 중반 미 육군의 병력 규모는 약 14만 명이었고 1934년 국방예산은 2억 4300만 달러였다. 당시 미군이 보유한 무기는 반자동 소총 80정과 대부분 1903년에 만들어진 스프링필드 소총이 전부였다. 군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미미했던지 1935년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가능하다면" 30일 치 탄약을 비축하는 게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1940년에도 미군이 보유한 중화기는 탱크 80대, 폭격기 49대가 고작이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30억 달러에서 참전 직후인 1942년 200억 달러, 그리고 1945년에는 450억 달러로 급속하게 늘어난다. 불과 6년 만에 15배나 증가한 것이다.

전쟁 기간 병력 규모는 최대 1600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미국은 탱크와 자주포 8만 8000대, 대포 25만 7000대, 기관총 200만 정, 폭격기 9만 7000대, 전투기 9만 9000대, 그리고 22척의 항공모함과 400척의 구축함 및 순양함을 생산했다. 그리고 원자폭탄까지.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군비가 증강된 것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리차드 드 보프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군사 관련 지출은 1939년 90억 달러에서 1945년 2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GNP 대비 군사 지출 비중은 1939년 1.5%에서 1945년 40%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전쟁 5년간(미국은 1940년부터 전쟁경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로버트 힉스라는 학자는 미국의 2차 대전 전쟁비용을 8400억 달러로 추산한다(1940년 기준 : 인플레 감안 2012년 가격 13.59조 달러). 그에 따르면 1944년 미국의 군사지출은 GDP의 36%, 연방정부 예산의 86%에 달했다. (Depression, War, Cold War(2006), p.80~81, 로버트 힉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2개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러나 평상시 국방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액의 전쟁 자금, 자그마치 1600만 명의 인력이 5년 가까이 전쟁에 동원됐다면 그 사회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즉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게다가 관료제의 속성상 한 번 생겨난 조직과 기구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관료제도 일종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생존을 모색한다. 2차 대전을 통해 팽창한 연방정부와 군부의 규모,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안보 국가, 전쟁 국가로의 변화는 2차 대전과 함께 시작됐다.

군부의 부상

2차 대전 동안 미 군부는 단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세우고 집행하는 가장 효율적인 정부기구였다. 즉 미국의 대외 정책은 군부가 주도했다. 국무부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 2차 대전 때까지 미국의 외교관은 상류 계층, 또는 부호들이 맡았다. 이들의 역할은 주로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영사 업무에 한정됐다.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정치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은 극히 적었다. 1944년 현재 국무부 총인원은 5,906명, 이중 정치 담당은 336명에 불과했다. 6%가 채 안 된다. 게다가 젊은 외교관 상당수는 군 장교로 징집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부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전쟁 수행과 관련된 계획과 집행을 군 합동참모본부에 의존했다. 그는 당시 국무장관인 코델 헐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학교 동창인 섬너 웰스 차관을 통해 국무부와 소통했다. 1943년 열린 주요 국제 회담인 카사블랑카(1월), 카이로(11월), 테헤란(11월) 회담에 헐 국무장관은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합동참모본부가 참가했다. 국무부의 위상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루스벨트는 처칠과 회동했고 그 직후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했다. 당초 목적은 영국 참모본부의 상대 역할을 맡는 한편 육군과 해군 간 불필요한 경쟁을 막기 위해서였다(당시 공군은 별도 병과가 아니라 육군과 해군에 소속돼 있었다). 또한 해군의 윌리엄 리 제독을 군과 대통령 사이의 연락책으로 임명해 백악관에 상주시켰다.

군은 대통령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군부 지도자들은 다른 어떤 민간 관리보다도 훨씬 자주 대통령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을 매우 높게 평가했던 루스벨트는 "귀관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구려"라고 할 정도였다. 군부에 크게 의존했던 루스벨트가 합참의 건의를 거부한 것은 2~3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군부는 대외관계에 대한 모든 정보와 사고방식의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기업계를 대표하는 외교협회(CFR)가 1940년 시작된 '전쟁과 평화 연구'를 통해 전쟁 목표의 큰 원칙을 제시했다면, 1941년 12월 이후 군부는 실제 전쟁 수행을 통해 미국 안보전략의 입안과 집행을 담당한 셈이다.

전쟁을 통해 미 군부는 주변적 기구에서 사회 전체의 자원을 통제하는 위치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다. 정치와 군사의 장벽이 무너졌으며 전략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군부는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군역사가 월터 밀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무부는 너무도 철저하게 소외된 반면, 군부는 너무도 확고하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대외 전략과 관련해)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거의 없었으므로 전쟁에 관한, 그리고 국가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에 관한 미 군부의 교조와 신념은 매우 중요하게 됐다"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전쟁의 주요한 결정들은 대통령과 합참, 그리고 루스벨트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에 의해 내려졌다. 외교 회의를 준비하고 동맹국과의 협상을 담당한 것은 합참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각각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합참은 "(미국과 해외, 정부와 군 간의) 모든 통신을 장악함으로써 다른 어떤 민간기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사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아직 스탈린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1942년 말~43년 초), 미 군부는 벌써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군사 위협에 대비한 군비 강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육군은 450만 병력, 해군은 60만 병력에 371척 주요 전함과 5000척의 보조 군함, 공군은 별도 병종으로의 독립과 70개 전투 그룹과 40만 병력을 요구했다. 미국 내 어떤 세력보다도 먼저 냉전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기간 쌓은 경험과 위상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부 지도자들이 주요 외교 보직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셜이다. 그는 1946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국 국공내전 협상의 중재역을 맡은 데 이어 국무장관(1947~49년), 국방장관을(1950~51년) 역임했다.

맥아더는 무려 7년간 일본을 지배했고, 미국 대외 전략의 핵심인 독일 정책을 담당한 것도 힐드링, 바이로드 등 군 출신이었다. 중앙정보국(CIA)도 창립 초기에는 호이트 반덴버그, 로스코 힐렌코터, 월터 베델 스미스 등 장군들이 국장을 도맡았다.

군산복합체

2차 대전은 미국 경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군수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분야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에는 군사 무기만을 생산하는 군수산업이란 게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분야가 됐다.

전쟁 이전 군과 기업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 군과 기업은 확고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군산복합체의 탄생이다.

2차 대전 이전 미국의 기업가들은 군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앤드류 카네기나 헨리 포드 같은 미국 재계의 거목들은 상업적 평화주의자였다. 교역 확대가 인류 구원의 첩경이며 언젠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시장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산업 발전과 군사주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군사주의는 순전한 낭비일 뿐이었다.

반면 군인들은 기업가를 이윤만 밝히는 유한계급이라고 경멸했다. 공공의 이익에 대한 봉사는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1906년 윌리엄 카터 장군은 "애국과 이윤은 전혀 별개"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1941년 3월 무기대여법(Lend-Lease) 제정을 통해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에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1940년부터 군수물자 생산을 서둘렀다. 미국의 재무장은 헨리 왈라스, 해리 홉킨스 등 뉴딜주의자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당초 기업계는 군수물자 생산에 소극적이었다. 과잉 설비 투자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가 자칫 유휴시설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매년 비행기 5만 대 생산 계획을 제시하자 군과 기업계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전쟁의 규모가 그 정도로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업계는 1차 대전 때처럼 연방정부 소유의 병기창에서 정부 주도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과잉 설비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네럴 모터스(GM)는 1차 대전 때 생산설비를 전혀 확대하지 않았다. 자동차 생산은 이전처럼 유지하면서 군수물자 생산은 3500만 달러에 그쳤다. 2차 대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그마치 12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생산한 것이다(340배 이상). 특히 GM은 1942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는 단 한 대의 상용차도 생산하지 않았다. 그 대신 377가지의 신형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정부가 아낌없이 연구개발비를 제공하고 생산설비를 지어주며 생산된 제품에 두둑한 이윤까지 보장하는데 군수물자 생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업계로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난 셈이다. 이제 '애국과 이윤'은 하나가 됐다.

게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 레이더 등 전혀 새로운 군수물자가 속속 개발됐다. 이제 미국 기업계는 연방정부라는 새로운 고객이, 확실하게 이윤을 보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주문하는 전혀 새로운 성장 산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부 개입을 그토록 증오했던 미국 기업은 2차 대전 동안 정부 주도의 군수산업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기업의 자유를 외치며 정부 간섭을 그토록 싫어했던 미국의 기업이 거대한 정부 보조금으로 회생한 것이다. 전쟁 5년간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정부 지원은 특히 대기업에 집중됐다. 연구개발의 40%가 상위 10대 기업에 몰렸다. 연방정부는 전쟁 기간 중 수백 개 군수공장 건설을 지원했으며 전후 헐값에 민간 불하했다. 260억 달러 중 170억 달러가 정부 지출이었다. 예컨대 유에스 철강은 2억 달러에 건설된 제네바 철강을 4750만 달러에 불하받았다. 정부 자금으로 개발된 특허권도 민간기업에 불하됐다. 감사 결과 7개 중 1개는 거의 공짜로 불하된 것으로 드러났다.

1차 대전 때까지 군수물자 계약은 경쟁 입찰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때는 74%가 수의 계약으로 바뀐다. 전시 중 경제 운용에 관한 권한이 대기업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전 직후인 1942년 1월 루스벨트는 전시생산위원회(War Production Board)를 창설하고 이 기구에 군수물자 생산 계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위원회 임원은 거의 모두 대기업 간부 출신이었다.

▲ 1942년 4월 14일 워싱턴 D.C의 해밀턴 호텔에서 전시생산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Picryl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자신의 행정명령으로 만든 각종 전시 연방 기구에 자그마치 1만 명의 기업 경영진들을 포진시켰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수행하려면 기업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스팀슨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군수물자 생산 계약의 최우선 기준은 얼마나 빨리 납품할 수 있는가와 연구개발 능력이었다. 당연히 대기업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의 경우 군사비 지출의 4분의 3이 상위 56개 기업에 몰렸다. 그중 3분의 1은 6개 기업(베들레헴철강, 제네럴 모터스, 듀퐁 등)이 차지했다. 끼리끼리 해먹은 것이다. '기업사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전시생산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던 제네럴 일렉트릭(GE)의 찰스 윌슨 회장은 "중소기업이 탱크나 비행기 같은 복잡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국방 프로그램은 대기업이 할 일"이라고 강변했다.

군수물자 생산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제조원가에 일정 비율의 이윤(9~10%)을 보장해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제작 원가가 적게 들어도 당초 책정된 대금은 모두 지급됐다. 비용이 더 들면 초과분을 보전해줬다.

전쟁 후 군수산업 실태를 조사한 상원 국방프로그램특별조사위원회의 해리 트루먼 위원장은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선물 나눠주듯 생산 계약을 분배했다 (중략) 이전 같으면 기업 스스로 위험 부담을 지고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돈의 3~4배를, 정부 보증하에 3개월이면 벌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전쟁 특수가 어찌나 달콤했던지 군과 기업이 영구적 협력관계를 맺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1944년 GE 회장 찰스 윌슨은 '육군군수산업협회' 연설을 통해 앞으로도 장래의 전쟁 동원에 대비해 '영구 전쟁 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군수물자 생산 기업의 임원 중 한 명을 예비역 대령으로 임명해 국방부와의 연락 역할을 맡기자면서 "최종적으로 군과 기업 사이에는 항구적인 협력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국가 정책은 미래의 전쟁에 대비한 산업 역량과 연구개발 능력 확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에 못 미치는 어떤 정책도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산업계가 똘똘 뭉쳐 "정치적 마녀사냥"을 예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의 상인'이란 오명을 또다시 뒤집어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30년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1930년대 대공황 기간 동안 땅에 떨어진 대기업의 대중적 이미지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대기업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됨으로써 이윤과 함께 애국적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GM이 히틀러를 무찌를 탱크를 생산해내면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는 사실을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군의 과제가 변화하면서 기업과 군의 화해도 가속화됐다. 기술과 정치 문제에 대한 군의 개입이 확대되면서(정부 예산의 대부분을 국방 예산이 차지하고, 국방 예산의 지출로 공장, 병원, 주택, 교통 등 민간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군인의 영웅적 윤리와 기업가의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간의 경계도 희미해져 갔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리차드 바넷은 저서 <전쟁의 뿌리>를 통해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군부를 이윤이 생기는 동맹세력으로, 미국적 생활방식의 영구적이고 합법적인 세력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미국에서 민간 기업의 발전은 공공 자금에 의해 뒷받침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전쟁은 이들 민간 기업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고 말한다. 특히 2차 대전은 "미국의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Commanding Height)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쟁들이 가져다준 혜택을 그야말로 보잘것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민간 기업의 발전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의 결과라는 신화를 정면 부정한 것이다. 나아가 실상은 공공의 지원에 의해, 특히 전쟁 이윤이 기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고 그중에서도 2차 대전에 의한 혜택은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즉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가져올 정도로 막대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건국 이래 미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직업 군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상비군이 없으니 당연히 민간 군수산업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군사경제가 경제의 근간이 될 정도가 됐다. 미국이란 나라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보 관료, 금융가와 국제변호사의 독무대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즈음인 1940년 6월 19일, 루스벨트는 공화당 출신의 월가 변호사이자 동부 주류세력(Eastern Establishment)의 원조 헨리 스팀슨(1867~1950년)을 전쟁부 장관(국방부의 전신)에 임명한다.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스팀슨은 이미 스페인전쟁 당시 전쟁부 장관(1899~1904년)을 비롯해 필리핀 총독(1927~29년), 국무부 장관(1929~1933년)을 역임한 정치거물이었다. 정계를 떠난 뒤에는 뉴욕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일했다.

루스벨트가 공화당 출신의, 그것도 73세의 노정객을 국방 책임자로 발탁한 이유는 스팀슨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스팀슨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부 장관으로 일했다.

전쟁부 장관이 된 스팀슨은 자신과 같은 주류세력의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존 매클로이와 로버트 로벳이 바로 그들이다. 스팀슨은 1940년 9월 매클로이를 비서실장으로, 12월에는 로벳을 공군 관련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 헨리 스팀슨 전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센터

매클로이는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쟁물자 조달, 연합국에 대한 전쟁물자 조달(렌드리스), 징병, 정보 관련 일을 했다. 또한 전쟁 이후 2대 세계은행 총재, 점령 당시 독일 고등판무관을 역임했다. '의장(Mr. Chair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동부 주류세력의 대부 역할을 했다.

로벳은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략 폭격 등 미국의 공군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종전 직후 전쟁부가 출범시킨 로벳위원회를 맡아 CIA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국무 차관, 국방 차관, 국방 장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내각 구성을 처음 상의했던 인물이 바로 로벳이다.

케네디는 당초 로벳에게 국방 장관을 맡기려 했으나 로벳은 건강 문제를 이유로 고사했다. 대신 국방 장관에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 딘 러스크, 재무 더글라스 딜론을 천거했고 케네디는 이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한편 제임스 포레스탈은 1940년 8월 해군부 차관을 시작으로 1944년 5월 해군부 장관, 그리고 1947년 9월에는 전쟁부와 해군부를 통합해 출범한 국방부의 초대 장관이 된다. 그는 1940년 해군부 장관에 임명된 프랭크 녹스에 의해 차관에 발탁됐다. 녹스는 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루스벨트와 대적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1941년 국무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국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면서 전후 미 대외정책의 골격을 짠 민주당 소속의 딘 애치슨이 있다. 스팀슨, 매클로이, 로벳, 포레스탈 등 공화당 출신과 애치슨 등은 전후 미국에서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으로 불린다. 이들이 주도한 대외 전략이 전후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부 뉴욕에 근거를 둔 금융가, 기업가 또는 대기업을 위한 국제변호사라는 점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역임한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요직을 맡은 이들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염원하는 동부의 대자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미국 대기업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 좋은 것'이라는 게 이들의 신념이었다.

20세기 초에서 1920년대까지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군사 개입을 했다면, 이들 냉전 시대의 현인들은 1945년 이후 미국 대기업의 세계 정복을 위한 대외 군사 개입의 길을 연 셈이다.

리차드 바넷은 "1940년 이후 이들 국가 안보 관료들은 미국의 국익을 새로 정의했다"면서 루스벨트의 스팀슨 등용은 미 대외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한다.

파워엘리트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안보,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이나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의회도 국민도 아니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들로 구성된 파워엘리트들이 내린다."

미국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1956년 발간한 저서 <파워 엘리트>(The Power Elite)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는 "민간 기업 경제인 동시에 영구 전쟁 경제"가 됐으며 이 체제 하에서는 대기업 최고경영진, 군부 지도자, 그리고 행정부 안보 관료가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파워엘리트다.

밀스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정책이나 조세, 그리고 국방비 이외 나머지 예산에 관한 배분 등 중간 수준의 정책들밖에 없다. 국가 안보, 그리고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의회 정치에 바깥에 있으며 파워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국민들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회에서 직업 정치인들이 중간 수준 정책을 놓고 벌이는 다툼일 뿐, 국가 안보와 같은 진짜 중요한 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의회 정치, 중간 수준의 밑에 있는 '일반 대중'들은 그저 TV에서 보여주는 정치 쇼를 보면서 그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다.

밀스에 따르면 건국 이후 남북전쟁 때까지 미국의 경제는 소규모 농장과 공장을 소유한 개인사업자들에 의해 지배돼 왔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행정적,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2,3백 개 대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들이 중요한 경제적 결정의 열쇠를 쥐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한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불신 때문에 최소 규모로 유지돼 왔던 군부가 이제는 정부 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서가 됐다"는 점이다.

군부 지도자와 대기업 경영진, 그리고 안보 관료들은 이른바 '회전문 인사'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즉 파워엘리트는 독점적, 배타적으로 미국의 대외, 안보, 군사 정책을 결정한다.

특히 2차 대전 이전 미국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평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간혹 전쟁이 끼어드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엘리트들은, 상호 공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불편하고도 변덕스러운 휴지기라는 것 외에, 평화의 진정한 이미지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그들이 오직 유일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의 계획은 완전 장전된 피스톨뿐이다. 한마디로 전쟁, 또는 최고 경계 태세의 전쟁 준비만이 미국의 정상적이고 어쩌면 영구적 상태가 됐다."

2차 대전은 기업 엘리트와 군부의 결탁을 가져왔다. 1961년 퇴임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으로 명명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낸 것은 2차 대전이었다. 대기업과 군부가 결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군부가 기업의 생산 계획을 모르면 전쟁 계획의 완벽함을 확신할 수 없고, 기업 경영진이 전쟁 계획을 모르면 생산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이 세계의 일에 개입을 하면 할수록 행정부의 권한은 커져갔고, 한때 의회에서 이뤄졌던 많은 결정들이 행정부로 이관됐다. 행정부의 권한이 비대해진 변곡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때였다.

전쟁이 끝난다면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군수물자 주문이 끊어지고 수백만 참전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감은 떨어지고 실업자도 수백만으로 늘어날 것 아닌가.

전쟁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이미 1942년부터 전후 불경기에 대한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한다.

"1942년부터 경제 기획가들 사이에서는 전후 실업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왔고, 공식·비공식 기구들은 전후 국제 교역 부족, 원자재 부족, 투자 기회 부족에 대한 비관적 전망들을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당시 젊은 경제학자였던 폴 새뮤얼슨은 전쟁이 끝난 후 "정부 지출의 감축으로 500만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의 상당한 감축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딘 애치슨 국무부 차관은 1944년 11월 의회 청문회에서 전후 미국이 "해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완전고용과 번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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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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