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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m 굴뚝 위 노동자들, 생명줄을 끊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장벽을 들이받은 거북이들이 공장으로 돌아가길

130살 먹은 해리엇이 처음 한 말은 "안 돼!"였다. 1945년 4월 23일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유대인을 찾아다니는 독일군이 한 아이에게 다가가는 걸 봤을 때였다. 해리엇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안 돼!"라는 생각이 났고, 그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서 입을 지나 입에서 세상으로 나와 버린 것이었다. 해리엇은 아이를 자신의 등에 숨기고 독일 군인을 마주 보았다. 자신들을 막아선 거북이 한 마리를 보았을 때 독일군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423일째 굴뚝 농성 중인 홍기탁, 박준호 파인텍 노동자들이 지난 6일부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차광호 파인텍지회장의 지상 단식은 30일째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의 동조 단식은 22일 차에 접어들었다. 박래군 소장은 굴뚝 농성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단식은 지상에서 하는 단식과는 다르다면서 이런 글을 올렸다. "밧줄을 내리지 않는다는 건, 세상과의 소통의 끈을 모두 잘랐다는 의미입니다. 목숨을 이어오던 밥과 물도 못 올리고, 세상과 연결되던 핸드폰 배터리도 못 올리는 겁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생명을 건 단식에 들어간 두 노동자를 마주하게 된 스타플렉스 김세권 사장'들'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 스타플렉스(파인텍)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7일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농성장 앞에서 무기한 고공 단식에 들어간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 박준호 씨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갈라파고스 섬을 빠져나와 130년 동안 인간의 역사를 여행한 해리엇은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입을 막고 싶어서 자신을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자신이 본 것을 역사학자인 교수에게 말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고 말한다. 해리엇이 교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땅과 같은 높이에서' 거북이의 눈으로 바라본 아래로부터의 역사이다. 해리엇은 어딜 가나 인간종의 발전을 증명해주는 수많은 증거가 있었지만,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아이들도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끔찍한 모순이 너무 괴로웠던 거북이는 선술집 바닥에 떨어진 술 방울을 핥으며 취해 돌아다녔는데, 1849년 영국 런던에서 술에 취해 자기가 쓴 원고도 잊어버린 채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간 칼 마르크스의 원고를 읽고 자본가가 잉여가치 창출에 몰두하고, 소수에게 부가 독점될 때 자본주의는 자체적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고 말한다.

한국합섬이 무리한 경영 확대·내부 비리·화학섬유업계 공급 과잉 등의 이유로 2006년 대규모 정리해고에 이어, 공장 파산을 결정한 것은 2007년이었다. 해고노동자들은 공장이 파산한 후에도 일용직·대리운전을 전전하면서도 빈 공장을 지키며 끈질긴 투쟁을 이어왔다. 스타케미칼이 자산가치 870억 원인 한국합섬 구미공장을 399억 원에 인수하면서 104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 보장·노조 인정·단체협약 체결을 '약속'한 것은 2010년이었다. 김세권 사장이 공장을 재가동한 지 1년 8개월 만에 공장을 멈추겠다고 일방적으로 폐업 선언을 한 것은 2013년 1월이었다. 차광호 지회장이 "공장의 가동 중단이나 해외 이전, 공장 매각 같은 상황이 있을 때 노조와 6개월 전에 합의해 이행하는 절차를 무시했다"며 공장의 분할 매각 중단과 재가동을 요구하며 공장 내 굴뚝에 올라가 408일 동안 고공농성을 시작한 것이 2014년 5월 27일이었다. 결국 김세권 사장이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3승계(고용 승계·노조 승계·단체협약 승계)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충남 아산에 파인텍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은 2015년 7월 7일이었다.

거북이 해리엇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진화를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전쟁을 거치면서였다. 해리엇은 역사의 길에서 발견한 시체들을 "하나, 둘, 천오백십이, 삼백만 이백이십오" 하고 세면서 걷다가 1937년 4월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민간인 마을 위로 떨어지는 공중 폭격을 맞는다. 여자들과 애들 위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거북이 해리엇은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달렸다. 아랫배와 허벅지 사이의 볼록한 부분에 심한 통증이 오면서 다리가 몹시 저렸지만, 폭격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해리엇은 두 발로 일어서서 달렸고, 길에서 어느 할머니 시체에 걸려 넘어지자 그 할머니 옷을 입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2015년 고용 승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스타플렉스가 충남 아산에 세운 파인텍 공장은 "약속"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허허벌판에 선 공장 기숙사에는 선풍기나 TV도 없었다. 식사는 한 끼만 주겠다고 했고, 단체협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급은 최저임금에 1000원을 더한 7030원. 수당과 상여금도 아예 없어서 10달을 일하는 동안 손에 쥔 임금은 1000만 원이 채 안 됐다. 그런데도 사측은 단체협약 "약속"을 계속 미뤘다. 그 정도 월급으로는 기본적인 생활비는 물론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고향에 다녀오기도 어려웠다. 결국 노동자들은 2016년 10월 다시 파업으로 나섰다. 파업을 하자, 사측은 공장의 기계를 반출하고 공장 임대계약을 종료해 버렸다. 돌아갈 공장도 없이 거리에서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서울로 올라온 홍기탁과 박준호는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 위로 올라갔다. 굴뚝 위에서 몸을 펴고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지 420일이 넘는 동안 몸은 점점 줄어들어 뼈가 보이기 시작했다. 곡기를 끊었으니, 앞으로 몸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지상에서 단식 30일 차를 지나가고 있는 차광호 역시 무서운 속도로 홍기탁과 박준호의 야윈 몸을 따라갈 것이다.

유대인으로 사는 것은 거북이로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던 시대에 해리엇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으로 분리되고, 옷이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잘리고, 격납고 같은 곳에 집어 넣어지고, 그들이 손수레에 실려 아주 커다란 화로 같은 데서 태워지는 것을 본다. 사람들에게 빼앗은 안경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이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져 갈 때 해리엇은 히틀러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75m 굴뚝에 오른 두 노동자는 등을 구부려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이 거북이로 살아가는 일보다 더 위험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가 역사로 진입하는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서 부서지는 열아홉 살 노동자를 바라보고, 늦은 밤 화력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 기계에 끼여서 두 동강 나는 스물네 살 노동자를 바라본다. 수첩, 물티슈, 우산, 컵라면 등 유품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이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져 갈 때 홍기탁과 박준호는 자본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는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스타플렉스 자본이 아무리 작은 자본이라 하더라도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아무리 부당하게 행동해도 법 앞에서 괜찮다는 것을.

1945년 8월 거대한 버섯 같은 연기가 피어난 이후 계속해서 태연하게 살아갈 수 없었던 해리엇은 머리를 몸통에 숨기고 동면에 들어간다. 동면에서 깨어난 해리엇은 '인간'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 갈라파고스 섬을 향해 앞으로 달려간다. 해리엇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장벽을 만나고 그 장벽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해리엇이 장벽을 들이받자 장벽은 "꽝!" 하고 무너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파인텍 노동자들은 42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굴뚝 위에서 지상에서 있는 힘을 다해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고 노동자들과의 약속이 헌신짝처럼 부정되는 사회의 '장벽'을 들이받았다.

해리엇은 다윈이 인간은 아주 무시무시한 괴물 쪽으로 진화할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충분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모두들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리엇을 '발 달린 역사자료'로만 취급하던 교수는 갈라파고스로 돌려보내 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다가 해리엇의 복수로 목숨을 잃게 되고, 해리엇은 항상 하던 대로 현실에 '적응'하는 것으로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다윈의 거북이>는 끝난다.

인간이 충분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가 원청인 스타플렉스가 해고노동자들을 본사에 복직시키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진화'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2015년 408일 동안 굴뚝 농성을 한끝에 받아낸 "약속"이 파기된 뒤, 다시 올라간 75m 고공에서 들려오는 거북이들의 "그르르르 그르르르" 는 목소리가 벌써 너무 많이 퇴화했고 더 퇴화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붙든다. 해리엇은 끝내 갈라파고스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장벽을 들이받은 거북이들은 거리로 나온 동료들과 함께 공장과 집까지 안전하게 돌아가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위 글은 2006년 176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지만 세계 최장수 기록을 가진 거북이 '해리엇'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희곡 <다윈의 거북이>(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출판사 펴냄)를 인용했습니다. 필자)

* '마음은 굴뚝같지만'은 2017년 11월 12일부터 75m 굴뚝 위에 올라가 있는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 씨와 박준호 씨가 하루라도 빨리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연대 글입니다. 같은 사업장의 노동자 차광호 씨는 2015년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올라 전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일인 408일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난 12월 24일, 이 기록은 굴뚝 위 홍기탁, 박준호 두 사람에 의해 갱신되었습니다. 이 추운 겨울을 다시 굴뚝 위에서 맞이하게 할 순 없습니다. 이들이 어서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노동자로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응원하며, 파인텍 5명의 노동자들이 웃으며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길 기대하며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릴레이 연재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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