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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와 에우제비오의 악령을 떨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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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와 에우제비오의 악령을 떨쳐라

[프레시안 스포츠] 아르헨·포르투갈과 재회하는 남북축구

한국과 북한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을 만난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 인연이 깊은 두 팀과의 재회는 한국과 북한 축구의 어제와 오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쿵푸라는 예명의 17번 선수"

1986년 한국은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했다. 그러나 조 편성은 너무 잔인했다. 지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 남미의 전통적 강호 아르헨티나가 포진돼 있었다. 한국의 첫 경기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초원을 휘젓고 다니는 목동 '가우초'를 연상시키듯,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세계무대에 익숙지 않았던 한국을 갖고 놀았다.

전반에만 2골을 내줬다. 유럽축구 중심에서 대활약한 '차붐'의 가세, 그리고 3년 전 청소년 축구 4강 신화를 이룬 약속의 땅 멕시코에서의 월드컵이라는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한 가지 눈 여겨 볼 대목이 있었다. 마라도나에 대한 악착같은 수비였다. 마라도나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외신들은 한국의 거친 태클을 '태권도 축구'로 비난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런 기죽지 않는 기세로 월드컵 사상 첫 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그의 자서전 <엘 디에고>에서 당시 한국 축구에 대한 짧은 인상을 밝혔다. "17번 선수.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 못 하지만 난 이미 그에게 '쿵푸'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마라도나가 기억 못했던 17번 선수는 남아공 월드컵에서 그와 격돌할 한국의 사령탑 허정무.

허정무는 선수 시절 근성 있는 선수로 정평이 났지만 개인기량도 출중했다. 특히 패싱과 돌파 능력은 분명 아시아권 선수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그런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없었다. 오직 그가 해야 할 일은 중원에서 마라도나의 예봉을 차단하는 일 뿐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뛸 때, "어이 융무(허정무의 네덜란드식 발음), 인삼 좀 먹어야겠어"라는 동료의 한 마디에 자극 받아 '근성의 화신'의 거듭난 그는 죽을힘을 다해 마라도나를 막았다.

그 뒤, 불가리아와의 아쉬운 무승부, 이탈리아 전에서 좋은 경기 내용을 보여 준 한국 대표팀은 가능성만을 남긴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월드컵을 뛴 선수들은 하나 같이 "모든 계획은 32년 만의 월드컵 진출이라는 숙원을 푸는 데에 맞춰져 있었다. 막상 본선에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은 없었다. 상대 팀에 대해서도 그저 피상적인 정보뿐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어땠을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8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예상하지 않았다. 1978년 월드컵 우승 당시 보여줬던 화려한 공격축구에 필요한 선수들 보다 '궂은 일'을 수행하는 선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는 별로 인상 깊은 축구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신뢰도 잃었다. <엘 디에고>에 나온 것처럼 아르헨티나 팬들은 한국과의 경기에서 오히려 이변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빌라르도 감독의 때로는 얄밉지만 세밀한 전략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고, 결국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정상으로 인도했다.

"마라도나처럼 손을 써서 골을 넣지는 않았다"

마약복용 등으로 나락에 떨어졌던 마라도나는 그의 친정팀 보카 주니어스에서 1995년 재기했다. 그의 재기전은 한국에서 이뤄졌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시동을 걸던 한국은 아르헨티나 메넴 대통령 방한에 맞춰 보카 주니어스와의 친선경기를 세트로 추진했다.

마라도나에 대한 인기는 여전히 대단했다. 비가 오는 가운데 축구 팬 3000여 명은 2시간 이상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렸다. 사인회의 공식명칭은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한 마라도나 선수초청 사인회였다.

하지만 사인회는 흐지부지됐다. 마라도나는 10분 동안 간략히 인사말만 남긴 뒤 "다른 곳에 가봐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라도나의 이런 행동은 빈축을 샀다. 국내는 물론 아르헨티나 언론도 "어린이 축구 팬들과의 만남, 사인회 등 3번이나 약속을 어긴 마라도나의 행동 때문에 그의 정신상태까지 의심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허정무감독은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마라도나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6월드컵 아르헨티나 전에서) 몸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결코 축구에서 벗어난 행동은 아니었다. 마라도나 감독처럼 손을 써서 (골을) 넣지는 않았다."

마라도나 감독에게는 24년 전 빌라르도와 같은 치밀한 전략수립이 이번 월드컵에서 과제로 남아 있다. 반면 허정무감독에게는 16강 진출이라는 목표가 있다. 그에겐 한국인 감독으로 월드컵 첫 승의 테이프를 끊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축구가 86년 이래 세계 축구의 중심부로 얼마나 접근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대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주심이 포르투갈에 PK 내줬다"

북한에는 아직 에우제비오의 악령이 남아 있다. 66년 월드컵 역사상 최대이변을 일으킨 북한 축구는 8강전에서 3-0으로 앞서다가 5-3으로 포르투갈에 역전패 당했다. 이 경기에서 4골을 몰아친 포르투갈의 스타 에우제비오는 북한 축구에는 영원한 공적이다.

북한은 이 경기 패배의 한 원인을 심판 판정에서 찾았다. 핵심은 에우제비오가 넣은 4골 중 2골이 페널티 킥이었다는 점. 2003년 북한에서 발간된 실화소설 <혜성들>은 "때마침 조선과 적대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주심 아슈케나지가 포르투갈 팀에게 11미터 벌차기를 주는 식으로 편심을 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북한 언론도 이 부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북한의 66년 월드컵 심판 판정 의혹은 지난 2005년 일본에 의해 교묘하게 부각됐다. 일본은 북한과 이란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나온 북한 팬들의 난동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북한에서의 원정경기가 아닌 제3국 경기를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와중에 일본축구협회는 북한 언론이 심판 판정 때문에 66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에 졌다는 보도를 했다는 사실을 FIFA(국제축구연맹)에 귀띔 했다.

▲ 1966년 제8회 잉글랜드월드컵 이탈리아팀과의 경기서 우승후 기뻐하는 북한팀 선수들 ⓒ연합뉴스

"74년 월드컵 4강 후보는 모잠비크, 가나, 북한, 중국"

심판 판정 의혹을 떠나 북한과 포르투갈의 경기는 세계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66년 월드컵 이전 아프리카는 그들에게 주어진 월드컵 티켓이 너무 적다며 대회를 보이콧 했다. 축구계에서 제3세계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팀으로 치부됐다. 에우제비오를 포함한 4명의 모잠비크 출신 선수가 포르투갈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해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당시 북한 축구를 무너뜨린 에우제비오의 모국 모잠비크의 반군 세력의 전과가 연일 북한 언론의 열렬한 응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브라질을 격파한 포르투갈과 함께 이탈리아를 꺾은 북한도 자연스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 때까지 유럽과 남미의 전유물이었던 월드컵 축구가 서서히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실제로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비록 진지한 예상은 아니었지만 74년 월드컵의 4강 후보로 "모잠비크, 가나, 북한, 중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74년 월드컵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74년 월드컵 직전 아프리카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브라질의 아벨란제가 FIFA 회장에 등극했다. 물론 아벨란제의 재력이 부정한 방법으로 투표에 영향을 줬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 선거는 유럽중심의 FIFA가 제3세계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제3세계의 등장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북한과 포르투갈의 경기는 5-3이라는 스코어가 말해 주듯이 공격 축구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팬들의 기억에 이 경기가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66년 월드컵은 지지 않기 위한 축구가 예선부터 판을 쳤다. 오죽하면 세계적 축구 월간지 <월드 사커>가 당시 대회 분위기를 논평하면서 "이번 대회에서 (진정한 공격) 축구를 찾는 것은 사하라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 같았다"고 했을까.

66년 월드컵의 과감성이 필요한 고슴도치 같은 북한 수비축구

2010년 남아공에서 포르투갈과 재회하는 북한 축구의 최대 고민은 너무나 극단적인 수비 축구를 한다는 점. 물론 수비 축구가 전력이 약한 팀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 그들에게 기회가 있는 법이다.

북한 축구의 희망 정대세는 "에우제비오에게 우리가 졌는데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이번에는)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의 '고슴도치'같은 북한 수비축구는 오랫동안 세계와 대화를 단절한 채 살았던 북한 사회를 다소간 반영하고 있다. 66년 월드컵에 나갔던 북한 축구의 코드는 두려움이 없는 과감한 플레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과감성이 부활해야 북한 축구가 살 수 있고, 포르투갈과의 44년을 기다렸던 리턴 매치도 볼 만한 경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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