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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스위스'가 돼야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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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2의 스위스'가 돼야만 산다

고촉동 싱가포르총리, '뉴 싱가포르' 플랜 발표

‘값싸면서도 품질 높은 상품들(high quality but cheaper products)’
외국의 한 지도자가 최근 정의내린 중국제품의 특성이다. ‘품질은 조악하나 값이 싼 상품’으로 규정해온 종전의 중국제품 관념을 깨트리는 충격적 정의이다. 이는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읽어내는 ‘지도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촉동(吳作棟) 싱가포르총리는 지난 8월19일 일요일 저녁, 싱가포르의 36번째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행한 TV 연설에서 ‘뉴 싱가포르’라 불리는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싱가포르는 현재 중국의 심각한 경제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며, 따라서 앞으로 10년간 싱가포르를 보다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고 외국투자에 덜 의존하는 체질로 바꾸는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총리는 “그동안 나는 중국의 변신을 예의주시해왔다”며 “그것은 실로 가공스런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따라서 우리의 최대도전은 중국이 값싸면서도 품질 높은 제품들로 세계를 뒤덮고 있을 때 우리만의 틈새시장을 지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97~98년 아시아 전역을 강타했던 금융위기 때에도 아시아의 유일 무풍지대였던 싱가포르가 올 들어 심각한 경제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는 9.9%의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던 것이 올 들어 1.4분기(1~3월) 성장률은 2.7%에 그쳤고, 2.4분기(4~6월)는 0.9%로 더욱 나빠졌다. 하반기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싱가포르 경제의 견인차인 수출(기름 제외)이 전년동기보다 24%나 줄어들었다. 넉달 연속 감소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그동안 올해 평균성장률이 0.5~1.5%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으나, 전문가들은 제로성장 더 심하면 마이너스성장까지 점치고 있다. 싱가포르 건국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국면 진입이다.

싱가포르 경기침체의 외형적 원인은 싱가포르의 주된 수출지대이던 미국경제의 침체이다. 특히 전자제품 수출의존도가 높은 싱가포르는 미국의 정보통신(IT)산업 침체로 직격탄을 맞았다. 고촉동 총리는 그러나 보다 본질적 원인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중국이 위기의 근원>
고총리는 중국의 위협을 단지 값싸면서도 품질 좋은 상품에서만 찾고 있지 않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그동안 싱가포르의 성장은 주로 외국인투자에 의존한 것이었다”며 “그 결과 우리는 부를 경이로운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미래를 보면 우리가 이같은 전략에 얼마나 계속 의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13억명의 저임금 인력과 방대한 내수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전세계의 투자자금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신화사 통신의 지난 8월3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컨설팅기관 A.T.커니의 조사결과 세계 투자희망국 순위에서 중국은 올해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3위에서 한단계 뛰어오른 것이다.

최근 미국경제가 심각한 불황국면에 빠져들고 달러화가 약세로 반전돼 국제투자가들이 미국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이 랭킹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신화사 산하 중국경제정보사는 지난 8월16일 “올 1월부터 7월까지 중국에 새로 투자키로 한 외국인들의 계약액이 402억9천3백만달러로 전년동기 대비 45.77%나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 결과 올 7월말까지 중국내에 설립된 외국인 투자기업 수는 37만4천8백3개, 투자계약액은 7천1백70억1천2백만달러에 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거센 중국 신드럼을 볼 때 “더 이상 기존의 외자의존적인 성장전략 갖고는 싱가포르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게 고총리가 오랜 고심 끝에 도달한 최종결론이었다.

<“10년내 제2의 스위스가 되자”>
고총리는 그러나 현재상황을 건국후 최대위기 국면으로 규정하면서도 지도자답게 320만명의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뉴 싱가포르’의 모델을 스위스로 잡았다. “향후 10년내 싱가포르의 생산력을 스위스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게 그의 선언이었다. 일각에서는 위기타개책으로 임금인하 등의 방법도 제기되고 있으나 중국과의 임금 격차가 너무 큰 상황에서 이는 본질적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게 고총리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살 길은 단하나, 생산력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총리는 “새 싱가포르를 창조하기 위해선 새로운 경제전략을 수립하고 신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경제전략은 이 자그마한 나라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기반을 발전시키고 전자제품 수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해소하는 쪽으로 짜여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경제개혁의 핵심으로 주로 다국적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싱가포르의 수출과 국내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내수간의 불균형 해소를 꼽았다.
고총리는 “우리의 수출요소는 경쟁력을 갖고 있으나 내수는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수출도 전자산업 하나에 의존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싱가포르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기업가정신을 고양시키고 국내기업을 국제적기업으로 키우며, 정보기술산업과 생명과학, 그중에서도 특히 바이오 의료과학과 여타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해야 할 것”이라고 개혁방향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앞으로 기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노력하고, 지구촌의 인재를 끌어들이며, 벤처비즈니스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세금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고촉동의 ‘국책은행장 수입’>
싱가포르 경제가 직면한 위기는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높은 수출의존도, 그것도 반도체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문제이다. 내수시장의 협소함과 경쟁력 빈곤도 문제이다. 중국이 향후 5년내 한국의 주력수출부문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는 전망도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민간, 국책경제연구소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위기 돌파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도 싱가포르 정부와 비슷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이다. 싱가포르정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실천에 옮겨왔다. 한 예로 고총리가 위기타파의 한 해법으로 제시한 ‘지구촌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싱가포르의 4대 은행중 하나이자 국책은행인 싱가포르 산업은행(DBS)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극에 달했던 지난 98년 6월 최고경영책임자(CEO) 겸 부회장으로 미국투자은행 J.P.모건 출신의 미국인 존 홀스(54)를 기용, 국제금융계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홀스는 J.P.모건에서 아시아태평양부문의 최고책임자로서 싱가포르에 장기간 체류한 경험도 있는 아시아통이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민간은행 부문에서는 외국계 행장을 영입한 경우가 있었으나, 국책은행인 DBS에서 서양인 CEO가 배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DBS의 다나바란 회장은 기자회견장에서 “홀스 부회장을 영입해 그의 다양한 경험과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DBS의 사업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영입이유를 밝혔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이를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해하고 있는 인물을 채용해 금융자유화의 선두를 차지하겠다”는 긍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특히 국제금융계는 싱가포르가 아시아 금융시장 가운데 최초로 국책은행에 외국인 CEO를 영입한 대목을 높게 평가했다.

한국등 대다수 국가에서 산업은행등 국책은행은 정부의 철저한 통제아래 놓여 있다. 한국의 경우 역대 산업은행 총재는 재무부 차관출신이 다음 장관 승진을 앞두고 거쳐가는 ‘당연직’으로 여겨져 왔고,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경우 지난해말 하이닉스등 부실기업의 회사채 만기도래로 금융시장이 크게 불안하자, 산업은행 주도로 만기 회사채를 무더기로 매입해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 억낙용 산은총재 등이 일주일 가까이 ‘저항’을 하기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민간금융기관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처였다.

그러나 산업은행의 경우 이런 시장안정조치를 취해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연말에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주는 까닭에 별다른 부담없이 정부지시에 따르고 있다. 한 예로 외환위기때 산업은행은 4조원대의 천문학적 손실을 입었으나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여타 시중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조조정 압박도 적게 받았다. 한국등 아시아 정부들은 이와 관련, “나날이 국내 금융시장이 개방되는 상황에서 최소한 국책은행만이라도 정부 통제아래 놓여 있어야 최소한의 금융시장 안정이 가능하다”는 방어논리를 펴고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가 다른 점>
그러나 싱가포르는 이같은 통념을 깨고 월가에서 DBS, 즉 싱가포르 산업은행의 CEO를 영입함으로써 국제금융계를 경탄시켰다. 싱가포르 정부의 이런 결정은 싱가포르가 국책은행 운영, 더 나아가선 싱가포르 금융시장의 운영을 시장법칙에 따라 하겠다는 적극적 의지표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DBS는 홀스 부회장의 영입을 계기로 아시아 금융위기를 도리어 사업확장의 계기로 삼아 태국과 필리핀의 은행을 사들이는 등 적극적 확장공세를 전개하고 있다. 민간은행을 뺨치는 놀라운 자기변신이자 기동력이다.

DBS의 외국인 CEO 영입은 그러나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외국인 중용은 고촉동 총리 스스로가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싱가포르의 국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핵심원칙중 하나이다.
고총리는 지난 97년 8월의 국정발표에서 “재능있는 외국인의 적극적 활용”을 촉구하며 “외국인 기용은 싱가포르의 고용기회를 박탈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들어와 국가경쟁력을 높인다”고 자신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었다.
싱가포르는 말뿐 아니라 외국인 채용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인을 채용하는 경우에 세금우대를 해주는 한편, 전문지식을 가진 외국인에 대해 저가로 주택을 제공하는 등 세제, 금융상의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현재 DBS외에 국영 반도체회사인 차타드 세미컨덕트 매뉴팩처링(CSM)이나 정부의 경쟁력향상위원회 등에도 많은 다국적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경쟁적으로 초청하고 있다. 이처럼 싱가포르가 일관된 국책 차원에서 능력있는 외국인을 영입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아직도 말만 앞서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10년후 싱가포르는 ‘제2의 스위스’가 돼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는 중남미 국가들처럼 ‘잃어버린 10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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