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열차 시간에 짜증난 한 승객, 세계표준시를 만들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열차 시간에 짜증난 한 승객, 세계표준시를 만들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6> 철도가 발명해낸 시간

아주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본다. 학창 시절의 세계사 시간, 근대 유럽의 역사는 개혁과 혁명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명예혁명, 과학 혁명 등 세상을 뒤흔드는 일들이 쉬지 않고 벌어졌다. 이 혁명 중에서도 사회 질서와 문화, 사상 체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산업혁명을 관통하는 매개자는 속도였다. 속도는 철도와 전신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했고, 철도와 전신이 탄생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됐다. 빠른 이동이 일상화된 오늘날에는 체감하기 힘들지만 과거에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었던 지방에 불과 몇 시간 만에 발을 내디딘 철도여행자가 느꼈던 감회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한 시점, 부산역에 도착한 열차 승객은 불과 10분전에 서울역 패스트 푸드점에서 산 뜨거운 커피가 채 식지 않았다는 걸 경험한다. 그렇게 되면 '미래 인간'의 시공간에 대한 감상과 현대인의 그것은 어떻게 다를까? 10분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한다는 게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런던에서 맨체스터 까지, 혹은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몇 시간 만에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한때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소재의 혁명과 동력추진 방식의 혁명을 통해 서울과 부산의 이동시간을 순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완전히 밀폐된 진공튜브로 만들어진 선로 안을 캡슐형 열차가 초전도 방식을 통해 음속의 수 십 배 속도로 달린다. 현재 하늘을 나는 최신형 초음속 전투기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다.

이런 연구는 현재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방식의 열차는 서울에서 뉴욕까지 두어 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금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이면, 뉴욕 중앙역 승강장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서울에서 약간 이른 퇴근을 한 뒤 뉴욕행 열차를 타고 저녁시간에 공연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나서 다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출근을 준비한다면? 황당한 공상과학소설같지만 인류는 언제나 공상에서 과학으로 혁명을 현실화시키며 전진해 왔다.

▲ 진공튜브열차 개념도 ⓒ구글

도가 잉태한 세계 표준시의 탄생

다시 과거로 가자. 속도가 품고 있는 것은 거리와 시간이다. 속도는 물리적 거리의 벽을 뚫어버렸다.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태우는 연료인 '시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어떤 과정 속에 요구되는 하나의 단위로서 시간,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흐름으로서의 시간의 이중성은 인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갖고 있는 성질이다. 빛을 두고 '입자냐, 파장이냐'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빛은 입자로서의 성질과 파장으로서의 성질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이 밝혀냈다. 하나의 실체가 각기 다른 본질을 포함하고 있는 빛의 이중성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한 성질이다.

흐르는 시간은 '빅뱅'으로 불리는 우주의 탄생시기부터 존재해왔다. 이 흐르는 시간이 지구 행성에서 발현되는 방식 중 하나인 본초자오선의 중요성이 전 세계적으로 떠올랐다. 본초 자오선이란 무엇일까? 바로 기준 자오선이다. 앞선 연재에서도 밝혔듯 지구상의 각 지역에 모여 살았던 사람들은 태양이 가장 높게 떠오른 시간을 정오로 정해 자신들의 사는 지역의 기준시간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태양정오시간(자오시간)이 생겼다. 시간의 통일성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동에 제약을 받았던 인간은 서로 다른 지역이 시간을 통일할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철도의 출현으로 이 세계관이 무너졌다. 먼 지역에서 적용되는 '다른 시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철도가 처음 만들어진 영국에서 표준시가 제정되고, 또 영국 전역의 각기 다른 시간을 하나로 묶는 일이 추진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영국을 벗어난 세계에서는 아직 표준시가 정착되지 못했다. 특히 철도가 세계로 뻗어나가가면서, 영국 국토 면적의 수 십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넓이를 가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더 절실하게 '시간의 통일'이 필요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외국인들이 출입하는 호텔의 안내 데스크에 가면 안내인 뒤로 벽면에 여러 개의 시계가 붙어있다. 그 시계들의 아래에는 서울이나 뉴욕, 런던, 도쿄, 베이징 등 여러 도시이름이 붙어있다. 표준시간에 근거한 각도시의 지역시간을 여행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 세계 지역 시간은 본초 자오선이라는, 그리니치 표준시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표준시가 적용되기 전, 시계와 그것이 가리키는 시간은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었을까?

과거, 시간은 철도 회사의 소유였다

1000킬로미터(Km)의 철도노선이 있고 이 노선을 따라 도시와 마을들이 이어져있다. 만약 1000킬로미터 밖에서 출발지의 시간에 맞춰 달리기 시작한 열차가 품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출발지의 시간인가? 아니면 중간 도착지의 시간인가? 최종 목적지의 시간인가?

표준시가 정착되기 이전의 역에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에는 오늘날의 호텔처럼 여러개의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시계 밑에 붙어있는 명찰에는 서울, 홍콩, 베를린, 파리 같은 지역명이 쓰여져 있는 게 아니라 '이리 앤 래커워너', '뉴욕센트럴 레일웨이',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같은 철도회사 이름이 붙어 있었다. 결국 시간은 철도회사의 소유였고 철도 회사의 수만큼 수많은 시간이 존재했다.

1883년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 철도역에서 '지금 몇 시지요?' 라고 묻는 다면 대답하는 사람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역의 공간은 이상한 타임머신의 내부와도 같았다. 각기 다른 여러 시간들이 공존했기에 질문하는 사람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시간을 말했다가는 시간을 물은 사람이 열차를 놓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역에 들어선다는 것은 여러 시간이 미묘하게 공존하는 괴이한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열차 멀미를 하기도 전에 여러 시간대가 흔드는 혼란으로 두통약을 찾아야했다.

1870년대의 펜실베니아 철도 회사는 필라델피아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하고 자신이 운행하는 노선의 역들에 이 기준시간에 따른 시간표를 배포했다. '뉴욕센트럴 레일웨이'는 그랜드 센트럴 역의 '밴더빌트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했다. 이 두 회사는 근접한 지역에서 영업을 했는데도 통일된 열차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다. 만약 여행자가 피츠버그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할 경우 이 갈아탈 시간과 함께 어느 회사에서 운행하는 열차인지도 알아야 했다. 어느 한 회사의 시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다른 회사의 시간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 수였기 때문이다. 시간의 혼란은 미국의 철도망이 점점 더 확장될수록 심각해 졌다. 대륙이 넓은 만큼 경도차가 심해졌고 이것은 시간차가 그만큼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구난방인 시간들을 하나로 묶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사회적 요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1883년 4월 8일 극심한 시간의 혼란에 빠져있는 철도를 구하기 위해 미국철도연합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제1차 '시간총회'를 열었다. 철도연합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미국의 철도회사들이 모여 만든 이익단체 성격의 협의체였다. 철도연합 사무총장 앨런이 세인트루이스에 초청한 사람들은 50여명의 간선철도 경영자들이었는데 세인트루이스 역은 14개의 노선이 운영되는 곳이었고 대표단이 어디에서 오든 극심한 시간의 혼란을 경험할 수 있는 역이었다. 시간총회에서는 미국철도 회사들이 사용하는 50여개의 시간 표준 종류를 4개로 줄이는데 합의했다. 미국 철도여행자들은 더 이상 역에 들어서자마자 혼돈으로 몰아넣는 시간들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필라델피아 지역시간을 표준시간으로 했던 펜실바니아 철도회사의 기점역인 펜실베니아역. ⓒ구글

근대 표준시 결정의 중요 인물, 센포드 플레밍

세계 표준시가 제정되는 과정의 에피소드들을 따라가 보자. 1884년 10월 1일 세계표준시 채택을 위한 국제회의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고 이 회의 일정 끝에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자오선으로 하는 세계표준시가 결정됐다. 이 회의가 결실을 맺게 될 때 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센포드 플레밍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근대 철도의 역사 중 상당 부분을 유실하게 된다.

1876년 7월의 어느 날. 고향인 아일랜드를 찾았던 플레밍은 서둘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가 열차를 타기위해 도착한 곳은 밴도란이라는 작은 시골역이었는데 아일랜드 간선 철도노선중의 하나인 런던데리와 슬라이고를 연결하는 노선에 있는 역이었다. 플레밍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역의 승강장에 서있었다. 오후 5시 35분차를 타기 위해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서있던 신사는 열차 도착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승강장에 자신이 혼자 서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플레밍은 열차 도착시간이 지났는데도 열차가 오지 않았다. 철도 여행자들의 필수품인 <아일랜드 철도 여행자 가이드>를 꺼내 다시 읽었지만 분명히 런던데리행 열차 밴도란역 5시 35분차라고 써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심지어는 역의 안내판 조차도 5시 35분차가 맞다고 알려주었지만 이날 플레밍은 열차를 탈 수 없었다. 플레밍은 랜도란역에 갇혔고 다음날 아침 런던데리항에서 영국으로 가는 배까지 놓치게 된다.

이 사건은 렌포드 플레밍이 철도와 관련된 시간의 모든 것들, 특히 세계 표준시를 제정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밴도란발 5시 35분 열차는 오전 5시 35분발이었다. 외부 이용자가 거의 없는 밴도란역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아침에 열차가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5시 35분발 열차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역의 시계에도 안내판에도 12까지 표시된 숫자에서 오전과 오후를 나누지 않은 덕에 플레밍은 16시간을 아일랜드의 시골역에 갇혀있었다.

플레밍의 일기에 따르면 "막대한 짜증"을 유발했던 이 사건은 플레밍이 만들어낸 철도사의 업적에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 일은 플레밍이 캐나다 태평양철도의 책임 엔지니어가 되면서 시작된다. 플레밍이 갇혀서 잃어버린 16시간은, 전 세계 사람들이 낡은 시간표시방식 때문에 잃어야 했던 엄청난 시간덩어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플레밍의 짜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왜 시간을 12시간으로 나눠 두 번 세는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같은 시간을 두는 게 얼마나 많은 실수를 유발시키는가? 인간이 12이상의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바보인가? 플레밍은 5시 35분을 17시 35분으로 바꾸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습 때문에, 혹은 착각으로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게 해주었다. 24시간 체계는 공적인 기관이 관장하는 곳에서 표준으로 적용됐고, 많은 혼란과 갈등을 사라지게 했다. 플레밍이 기차를 놓친 황당한 경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더 오래 동안 12시간체계가 주는 혼란 속에 고생했을 것이다.

플레밍은 24시간 체계를 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대한 지역 시간들의 아성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와 발표한 첫 논문은 밴도란역에서의 하루 밤을 회고하며 시작된다. 이 논문은 지역시간을 폐기한 다음 표준 시간대와 전 세계를 위한 보편적 시간을 결합하고, 경도를 시간과 연결 짓고, 24시간 단위의 시계를 도입하자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플레밍의 첫 논문은 많은 사람들의 이해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세계 표준시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구글

'왜 영국이 기준이냐' 프랑스인의 반발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의 주제는 딱 하나였다. 본초자오선, 그러니까 전 세계 태양정오의 기준선이 되는 자오선을 어디로 설정해야 하는지 문제였다. 여러 가지 난제가 있었다. 일단 영국에 한해서였긴 했지만, 그리니치 표준시가 있었고, 그리니치를 따르면 본초자오선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정한 기준을 죽어도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영국과 원수지간인 프랑스였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처럼 프랑스와 영국은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겪었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역사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국가대항전 축구경기 때는 한일전을 능가하는 양국 축구광들의 괴성으로 술집이 떠내려 갈 정도이다. 플레밍이 캐나다에 철도를 건설하던 초창기에 런던 그리니치천문대를 기점으로한 자오선을 본초 자오선으로 염두에 조차 두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반발을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터(m)' 단위도 프랑스가 영국에서 쓰는 마일이나 인치를 차용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미터의 어원이 '단위'를 뜻하는 프랑스어 'mètre'에서 온 것 만 봐도 프랑스와 영국이 얼마나 서로를 증오했는지 알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는 적도에서 북극점에 이르는 지구 둘레 4분의 1의 길이를 측정했고 이것의 1000만분의 1의 길이를 1미터로 정했다. 적도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보폭을 약간 넓게 가져간다고 칠 때 천만걸음을 걸으면 극점에 도달할 수 있는 셈이다.

미터단위가 퍼져가자 스코틀랜드의 왕실 천문학자였던 찰스 피아치 스미스는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대상으로 자신의 과학적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는 연구를 진행했다. 원 안에 그려진 사각형 면적이 그 원의 면적과 같을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문제에 메달리게 된 원인은 신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은 미터법의 오류를 입증하고 대영제국에서 사용하는 인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스미스는 '인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명해 사용한 유서 깊은 단위인데 근본 없는 갈리아 족속인 프랑스인들이 미터란 것을 만들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는 취지로 비난했다.

1884년 10월 1일 3주간의 일정으로 시작된 본초자오선 회의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었다. 어떻게든 그리니치가 세계 표준시의 기준으로 채택되는 것을 관철시키려는 영국, 그리고 이를 막고 파리 본초자오선을 세계기준으로 삼으려는 프랑스의 외교전쟁이 불꽃을 튀겼다. 이 회의에 초청받은 25개 국가 중 콜레라 창궐로 불참한 나라를 뺀 19개국의 대표는 이 외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야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중재

회의를 주최한 미국의 채스터 A 아서 대통령은 각국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서한을 보내 세계 표준시의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근대 상업의 일상 업무 면에서 많은 난관에 처하게 됐습니다. 각기 자국의 표준 자오선을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오늘 모인 까닭은 전신망과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기존의 어려움들이 더욱 심각해 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미국과 유럽의 여러 기업과 과학자들이 세계공통 자오선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의해 왔고, 세계 공통의 자오선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채스터 A 아서 미국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낯선 인물이다.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다른 많은 대통령에 비해서 커다란 업적도 눈에 띄는 사건도 없는 축에 속하는 미국 대통령이다. 채스터 A 아서 대통령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부르스 윌리스가 주인공으로 나온 액션영화 다이하드 3에서였다. 테러범이 대통령의 이름을 딴 채스터 A 아서 공립초등학교에 폭탄을 설치하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학교 이름으로 잠깐 등장했을 뿐인 인물이다.

그러나 세월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조선과 특이한 인연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다. 아서 대통령 재임시절인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 통상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에는 미국공사가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외교채널이 가동된다. 고종은 보빙사(報聘使)라는 사절단을 미국에 보내는데 조선최초로 서구에 보낸 외교 사절단이다. 고종은 강대국인 미국의 도움을 얻어 청이나 일본으로 부터의 간섭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개화파가 주축이 된 미국 사절단은 아서 대통령과 두 차례 만남을 갖는다. 첫 만남이 있었던 접견장에서 조선 사절단 대표들이 집단으로 큰절을 하는 모습에 황당해했던 아서 대통령의 일화가 있다.

2주에 걸쳐 지속된 본초 자오선 회의에서 최고 쟁점이된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외교적 수사가 만들어낸 파도 위에서 출렁거렸다. 플레밍은 "세계표준시는 반드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립적인 안으로 "그리니치와 정 반대편인 태평양을 가르는 대척지점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설정하자"고 했지만 역시 영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 대표로 참가한 루이스 러더퍼드의 설득력 있는 비판은 그리니치에 대응하는 자오선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러더퍼드는 "만약 그리니치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 본초 자오선을 만들면 런던은 한 낮에 날자가 바뀌게 되는데 세계일을 변경해야 한다면 세계최대도시의 한 복판에서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태평양 한복판이 났다"는 주장을 했고, 이에 대해서는 반대편에서도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파리 자오선을 목표로 했던 프랑스는 그리니치 자오선에 대한 양보안으로 앵글로 색슨 국가들이 미터법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지만 영국과 미국에 의해 단칼에 거절당했다.

플레밍이 중립적인 안을 냈던 것은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했던 것이라기보다 어떻게든 세계표준시를 워싱턴회의에서 결정내고 싶어서였다. 플레밍은 어느 곳으로 본초 자오선이 지정되든 산재한 지역시간들이 방출하는 혼란을 벗어나는게 중요했다. 지루한 회의와 협상과 표결 끝에 1884년 10월 13일 세계 표준시가 채택되었다. 이제 지구상의 경도마다 창궐했던 각각의 지역 표준시들이 사라지고 하나의 시간 틀에 인류가 속하게 되었다. 이 연재가 게재되는 날인 2013년 10월 13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꼭 129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