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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굴뚝 앞에 서보면 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들의 외로움에 함께 맞서는 방법

가을에 오른 망루를, 봄이 돼서야 내려왔다.

그러니까 벌써 6년 전이다. 2012년 11월 20일 새벽, 두 명의 동지들과 함께 쌍용차 평택공장 앞 송전탑을 한 칸 한 칸 올랐다. 출소 석 달 만에 오른 '하늘감옥' 길에는 이렇다 할 준비도 없었다. 오르자마자 한파가 몰려왔지만, 벌판에 우뚝 솟은 송전탑 위에서 삭풍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15만4000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송전탑은 바람에 흔들리고, 고압전류는 요동쳤다. 그저 몸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내리쬐는 고압전류에 신진대사가 흐트러져서 그런지 계속되는 구토를 참아야 했다. 하도 가려워 머리에 물 한 컵을 부으면 씻어내기도 전에 얼어붙어 백발이 되다 보니 머리 감기도 포기해야 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박준호·홍기탁 동지처럼 두 번의 겨울을 보내지 않았지만, 하늘감옥 171일은 그렇게 흘렀다.

171일의 고공농성 동안 가장 괴로운 것은 추운 날씨도, 거친 바람도, 고압 전류도 아니었다. 고공에 올라 고립된 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공기까지 조용해진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릴 즈음 송전탑 위에 서면 쌍용자동차차 평택 공장 굴뚝 두 개가 보인다. 그저 허공에 불쑥 솟은 콘크리트일 뿐인 그 굴뚝 두 개를 보면,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했던 기억, 출퇴근길 나누던 이야기, 힘들지만 보람 있던 노조활동의 잔상이 떠오른다.

'우리가 여기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이 싸움이 끝날 즈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공장 굴뚝에 연기가 피어올라 한겨울 삭풍을 타고 송전탑까지 오면 외로움은 더 커진다. 그즈음에 이르면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극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연합뉴스
열병합발전소 굴뚝 75미터 높은 곳에서 400일을 넘도록 싸우고 있는 박준호·홍기탁 동지의 외로움은 6년 전 나의 외로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굴뚝 앞에 서보면 안다. 서울 하고도 목동, 굴뚝은 고층 아파트의 숲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안양천이 흐른다. 해 저물녘 퇴근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불을 밝힐 아파트가 뿜어내는 온기로, 아마 굴뚝 위는 더욱더 추울 것이다. 안양천 산책로를 손 맞잡고 걷는 가족들을 바라보자면, 그 외로움은 미안함으로, 또 서러움으로 몇 배 불어날 것이다. 그 굴뚝 앞에 서보면 안다.

두 동지가 다섯 번의 계절을 돌아 고공농성을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와 일부 사용자들의 '노조 혐오' 때문이다. 그 혐오가 김세권 스타플렉스 사장을 통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혐오, 자기가 서명한 단체협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혐오, 고작 몇 명 되지 않는 노조 따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혐오다. 무노조 삼성과 포스코가 각각 70년, 50년 된 빗장을 열었지만, 그들의 본질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민주노총만 아니면 된다'고. 그리고 팔을 걷어붙인다. 회사 조직을 총동원해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를 위한 껍데기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이 혐오가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이 혐오가 우리 사회에서 용인되는 순간부터 '노동 존중'은 허울만 좋은 속 빈 말이 된다. 신뢰는 무너지고, 기대는 부서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 가파르게 기운다. '노동 존중' 사회를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중에 '최장기 고공 농성'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이 시절이, 그래서 더 안타깝고 더 화가 난다.

혐오가 지배하는 기운 운동장을 바로 잡는 첫걸음은 힘의 균형이다.

한국 노사관계의 역관계가 처한 현주소를 보기 위해서는, 시계를 지난 5월 28일로 되돌리면 된다. 이날 최저임금법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개악안의 국회 표결 결과는 찬성 160명, 반대 24명, 기권 14명이었다. 노동자의 임금을, 그것도 최저임금을 깎는 동맹에는 여야도, 지역도 없었다. 당시 재적의원 288명 중 고작 8%에 불과한 24명만 노동자의 삶을 지키는 표를 던졌다.

힘의 균형을 공정하게 바로 잡기 위해선 반대편으로 힘을 가해야 한다. 구부러진 막대를 펴는 방법은 반대로 구부리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시급히 법과 원칙을 세워야 할 곳은 어디인가. 외주화 파견노동의 달콤한 착취의 늪에서 허우적대면서 '노동 혐오'를 일삼는 사용자들을 단죄하고, 노조와의 약속은 어겨도 그만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혐오를 지워내는데 우선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그래도 되니까'라고 생각하는 노조 파괴 전문가들과 이들에게 줄 서서 의뢰하는 사용자가 설 곳이 없게 해야 한다. 기울어진 반대편으로 힘을 가해야 평평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사관계의 평지 위에서야, 비로소 '노동 존중'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동지의 승리이자 파인텍 투쟁의 승리는 '노동 혐오'를 이겨내는 정의다. 약속을 어겨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냉소를 걷어내는 정의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정의다. 이들을 더 이상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외로움의 크기가 우리 사회 노사관계의 현주소다.

쌍용차 앞 송전탑에서, 내 외로움을 걷어 내준 것은 출근길 동료들이 차창 밖으로 내민 손 인사였다. 저녁마다 열렸던 촛불문화제에 시민들과 동지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였다. 늦어도 성탄절 안에는 따뜻한 마음이 모여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 보자.

2019년에는 가진 것 없는 약자가, 노동조합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에게 더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두 동지의 일갈을 들으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목동 굴뚝 아래로 가자. 우리에겐 여전히 막대를 구부릴 힘이 있다.


* '마음은 굴뚝같지만'은 2017년 11월 12일부터 75m 굴뚝 위에 올라가 있는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 씨와 박준호 씨가 하루라도 빨리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연대 글입니다. 같은 사업장인 파인텍 노동자 차광호 씨는 2015년 굴뚝에 올라 전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일인 408일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오는 12월 24일이 되면 홍기탁, 박준호 두 사람이 이 기록이 경신하게 됩니다. 그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시민들이 릴레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법적으론 문제없단 말 들었을 때..."아 문제가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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