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촛불정부인가, 아니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3기인가?"
지식인선언네트워크 등이 개최한 토론회(11월 30일)에서 조돈문 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물음을 던졌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아니냐는 실망과 비판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을 보며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 더 오래 전 정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 아니면 김대중 정부? 물론 그때도 연상된다. 둘 다 자의반 타의반 친노동 세력이라 지목됐으나 집권 후에 모두 노동을 탄압하거나 노동권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최근 행보가 기억 저 편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더 전 정권의 잔상이다. 바로 김영삼 정부다.
특히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가 돌아가는 꼴 때문에 그렇다. 그 모양을 보노라면,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국 역사상 '총파업'이라는 이름에 가장 부합하는 투쟁이었던 1996~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을 불붙인 그 노개위 말이다.
헌법 지켜줄 테니, 너희도 내놔라?
1996년 5월에 노개위가 설치되자 노동운동 일부도 이 기구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1년 전 막 출범한 민주노총은 아직 노총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개위는 한국노총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에게 참여를 요청했다. 민주노총에게 이는 조직의 위상을 확인받을 좋은 기회로 보였다.
더구나 김영삼 정부는 노동계 참여를 유도하면서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숙원을 해결해줄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복수노조 허용, 정치활동 금지 철폐, 제3자 개입 금지 철폐 등을 받아들이겠다고 운을 뗀 것이다. 복수노조 금지, 정치활동 금지, 제3자 개입 금지는 헌법에 규정된 노동3권을 사실상 무력화한 대표적 악법들이었다.
민주화의 산물인 제6공화국 헌법 정신에 따르면, 이들 악법은 이미 폐지됐어야 마땅했다. 굳이 사회적 대화 기구의 의제로 올려 생색 낼 것도 없이 정부가 법안을 제출해 폐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이들 개혁 과제를 굳이 노개위 안건으로 올려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노동계로서는 이런 의제를 다루는 테이블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애초에 이것이 정부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막상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하자 분위기는 애초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김영삼 정부는 재계가 요구한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들, 즉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시간제(오늘날 탄력근로시간제라 불리는) 도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민주노총이 노동3권 관련 개혁을 얻고 싶다면 이들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른바 '맞교환'을 강요했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대등한' 사회 세력이라 여긴다면, 이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계약 관계는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용자와 노동자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이 바로 이렇게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노동3권이라는 특별하면서 중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의 약속을 실현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이 권리의 보장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는 이런 당연한 임무의 수행을 다른 노동권의 엄청난 후퇴와 맞바꿔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민주노총은 기만당했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노개위에서 철수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김영삼 정부는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시간제를 포함한 노동법 개악안을 안기부법 개악안과 함께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했다가 총파업의 반격에 부딪혔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김영삼 정부 말기 대혼란의 시작이었다.
한데 요즘 언론에 흘러나오는 경사노위 상황은 이런 20여 년 전 노개위의 판박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노개위나 노사정위원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대화의 모범을 만들겠다며 노사정위의 간판을 경사노위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노동계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의제를 내세웠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노동3권 관련 법제를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조합운동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특수고용직의 노동조합 설립 허용 등이 있다.
이런 의제들이라면, 노동계가 경사노위에 쌍수 들고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재계는 ILO 기본협약 비준의 전제로 자기들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토를 달았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사업장 점거파업을 금지하며 파업 시 대체근로자를 투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단협 유효기간 연장 · 사업장 점거 금지 논의…재계 손 들어주나", 2018년 12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다시 한 번 맞교환론이다. 노동3권이 예전보다 신장되니 재계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김영삼 정부의 재판이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공정하게' 주고받아야 하며 정부의 역할은 이 거래를 '공평하게' 중재하는 것이라는 식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의 태도에 우리는 김영삼 정부에게 던졌던 의문을 고스란히 다시 던질 수밖에 없다. ILO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집단적 노사관계 제도를 손보는 것은 이른바 '민주화된' 대한민국 정부가 한참 전에 이미 했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한 번 이 당연한 헌법상 권리의 보장을 또 다른 노동권의 후퇴와 맞바꿔야 한다고 요구한다. 구어체로 표현하면, 이런 말이다.
"좋아, 헌법을 지켜 줄 테니 너희도 뭘 좀 내놓아야지."
어느 모로 봐도 헌법 수호자의 언어는 아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국가의 기원을 논하며 '골목길 깡패'라는 비유를 들곤 하는데, 아무래도 저 문장은 거대 자본에 붙은 그 쪽 직업군의 언어일 뿐이다.
'맞교환'의 피해는 가장 약한 노동자들에게로
더구나 노개위 때나 지금이나 이런 맞교환론은 지극히 사악한 얼굴을 감추고 있다. 정부와 재계가 노총에게 서명하라고 협박하는 맞교환 목록에 든 노동권 후퇴 조치들은 하나같이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을 안기는 내용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 여력조차 없어 실은 노총 바깥에 방치된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조치들이다.
노개위의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이 바로 그러했다. 정리해고는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도 무시무시한 위협이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장렬한 전투라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수의 노동자는 이제 정리해고'제도'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만 두라면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변형근로시간제 역시 주로 강력한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소득 감소와 노동시간 연장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파견근로제 도입은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2등, 3등 노동시민의 급증을 알리는 신호였다.
1997년 벽두에 민주노총은 이런 노동권 후퇴를 총파업으로 일단 막았다. 한국노총까지 합류하고 시민운동 단체들도 엄호하며 거리의 시민들까지 지지하니 김영삼 정부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1987년 민주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시작돼 나름대로 진화하고 있던 한국 사회 민주 역량과 연대 의식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지구 자본주의는 이 성취가 더 이상 진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70년대~1980년대 초에 영국, 프랑스 등에서 좌파적 대안의 성장을 가로막고 신자유주의 시대를 개막한 외환위기(<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장석준 지음, 책세상 펴냄))가 한국에서도 역사의 다른 전개 방향을 차단했다.
불과 몇 달 전에 호기롭게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을 막아냈던 민주노동조합운동은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지금 우리는 그때 일을 영화(<국가 부도의 날>)로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월이 지날 만큼 지났다 여기지만, 상처는 더욱 곪고만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거센 바람은 산업과 직종,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휩쓸었지만, 가장 커다란 타격을 받은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강력한 기업별 노동조합 우산 바깥에 있는 이들이다. 여전히 노총의 보호막 바깥에 있는 이들이 20여 년 전 '맞교환'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데 지금 경사노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도 정확히 이 구도 그대로다. 탄력근로시간제를 사용자에게 더욱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하자고 하고 있고, 단체협약 유효 기간을 연장하자고 하며, 사업장 점거파업을 금지하거나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을 자유롭게 하자고 한다. 하나같이 노동자의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을 제약하는 조치이며,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조직-미조직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짓이다.
하지만 누가 더 큰 피해자가 될지, 누가 미래의 가능성을 더 많이 박탈당할지 따져 보면, 이번에도 역시 가장 약한 노동자들이다. 아무래도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의 행사는 이미 강한 노동조합이 있는 노동자보다는 새로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는 노동자에게 더 절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사노위에서 오가는 재계 요구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게서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단을 빼앗아간다.
촛불 이후 많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새롭게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촛불이 한국 사회에 남긴 가장 소중한 자취들 가운데 하나다. 이들이 힘을 모아 지옥 같은 노동 현장을 바꿔간다면, '헬조선'은 반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재계 요구안은 수십 년만에 비로소 등장한 이 희망에마저 족쇄를 채우려 한다. 헌법의 약속을 뒤늦게 실현할 몇몇 조치와 이 족쇄를 맞교환해야 한다고 한다. 노동계가 이 논리에 따라 경사노위에 참여하고 합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덫이다. 그것도 다시 한 번 가장 약한 노동자들이 최대 피해자로 예정돼 있는 덫이다.
파견근로제 철폐부터 의제로 올려라
이게 모두 오해나 억측일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의 노동 정책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의심과 우려는 이미 확신으로 바뀌는 중이다. 그럼에도 경사노위가 의미 있다고, 사회적 대화가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한 가지 길이 있다.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비극이다. 발전소에서 일하던 젊은 노동자 김용균 님의 죽음이다. 그런데 언론이 파면 팔수록 이 죽음은 외환위기 이후 어느덧 우리에게 익숙해진 노동 법제들 때문임이 명명백백 드러나고 있다. 사망 사고가 벌어진 하청 작업은 다분히 '불법 파견'이었다("김용균씨 업무는 '불법파견'…발전5사도 알고 있었다", 2018년 12월 17일자 <한겨레>). 모순투성이 파견근로제가 양산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불법' 파견 중 하나였다.
이 상황에서 자칭 '촛불'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간단명료하다. 파견근로제 철폐를 의제에 올려야 한다. 20여 년 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처음 도입이 논의된 이 제도의 폐지를 안건으로 삼아야 한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누구든 '사회적 대화'를 달리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게 아니라면, 그것은 '대화'도 아니고, '사회적'이지도 않다. 경사노위란 한갓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기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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