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반대하지만, 채널이 생기고 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방송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2009년, "손석희가 종편으로 스카우트돼 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을 누군가 했다면 반응이 어땠을까. 대부분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물론 당시 "종편이 허용되면 자금난 때문에 오히려 조중동은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법안 자체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적잖은 사람들이 '두려운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종편이 은근슬쩍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당당한 언론사로 자처하며 '어제 <TV조선> 뉴스 봤니'라고 말하게 되는 모습"을 걱정하는 시선이었다.
종편은 그렇게 사회적 합의 없이 탄생했지만, 안개처럼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정치가 '사생아'를 창조했고, 4년이 지난 지금 그 '사생아'는 일상이 돼 가고 있다. 여기에 손석희 교수의 JTBC행은 종편 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손석희 씨는 MBC 노조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MBC 노조 제공 |
MB의 방송 장악, 번갯불처럼 시작돼 연탄가스처럼 스미다
이명박 정부 5년간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방송 장악 논란이었다. 비리를 저질러 감옥에 갔다가 이명박 정권 말기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그는 MB 정권의 방송 장악 논란의 한가운데 언제나 서 있었다.
2008년 3월 26일, 최 전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방송계의 지각변동은 시작됐다. 최 전 위원장이 디자인한 미디어법은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후에도 최 전 위원장은 종편 선정 과정을 주도했고, 각종 의혹을 뒤로한 채 간난신고 끝에 '조중동 방송' 탄생의 희열을 맛봤다. 그리고 2011년 6월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에서 "정부가 봤을 때 종합편성채널은 아기다. 걸음마할 때까지는 (정부가) 보살펴야 한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종편과 이명박 정부의 유착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종편을 위해 공중파 방송을 흔드는 전략을 일관되게 사용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 중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나라당은 KBS 수신료 인상을 밀어붙였다. 정연주 사장 시절에는 KBS 수신료 인상에 반대했던 그 한나라당이 그랬다.
이는 수신료 인상으로 줄어들게 될 KBS 몫 광고 물량을 종편에 할당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물론 KBS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던 의원들은 이런 해석을 부인했다. 그래도 "줄어든 KBS 광고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래도 종편 쪽으로 가겠지"라는 답을 돌려줬다. 이 때문에 KBS 조직은 수신료 인상을 주장하면서도 자아분열을 겪어야 했다.
MBC는 조금 다른 상황을 겪었다. 김재철 전 사장이 "쪼인트"를 맞으면서 '좌파 청소'에 나선 것(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은 결국 MBC 조직의 와해로 귀결되고 만다. 이후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MBC는 반목과 분열을 겪으며 공정 방송의 상징성을 잃어갔다. 그 와중에 이하정 전 MBC 아나운서는 <TV조선>으로 자리를 옮겼고, '황금어장' 등을 연출한 여운혁 피디는 JTBC를 택했다. '위대한 탄생' 연출을 맡았던 임정아 피디도 JTBC로 갔다. 그 외에 최일구 앵커 등 MBC가 만들어준 '스타'들이 MBC를 하나둘 떠났다. 손석희 교수의 매형인 주철환 피디도 OBS 사장을 거쳐 결국 JTBC에 둥지를 틀었다.
졸속이나마 체제를 정비한 종편은 영향력을 입증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보수 진영이 날치기 즈음에 예고한 대로였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종편은 수많은 '논객'을 찍어내듯 만들어내 출연시켰다.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은 '논객'도 많았지만 종편에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민주당이 종편의 태생적 문제를 지적하며 출연을 거부하는 사이 새누리당 의원들과 보수 논객들은 논리의 동종 교배를 통해 특정 이슈를 확대 재생산하며 보수층 결집에 큰 몫을 담당했다. 하나의 예로 종북이라는 말처럼 종편에서 많이 사용된 신조어도 없을 것이다.
종편 택한 손석희? 손석희 삼킨 종편!
보수층에 대한 영향력을 입증한 종편은 이제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탄생기(2009년 7월~2011년 12월)를 거치며 영향력을 입증하고 이제는 이른바 '정상 언론'으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다. 출생과 관련된 논란은 언제 있었냐는 듯 JTBC는 버젓이 손석희라는 '대어'를 낚았다.
손석희의 종편행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손석희는 1992년 10월 MBC 파업 당시 노동조합 쟁의대책위원을 맡은 후 푸른 수의를 입었던 MBC 노조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공정의 이미지를 쌓아 '100분 토론'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명실상부한 MBC 간판 시사 프로그램으로 만든 인물이다. MBC 노조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처리를 결사반대했을 때도 자의와 상관없이 손석희는 정신적 지주로 상징적 역할을 했다. 떠나는 손석희가 마지막 방송에서 "내 선택에 반론도 있겠지만"이라고 한 부분 역시, 그 스스로 자신이 상징하는 무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명박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한 이른바 '여론의 다양화' 전략, 즉 방송 재편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질 전망이다. 종편은 태생적 열등감을 벗고 사람들의 경멸적 시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아우라를, 방송 장악에 눈먼 정권의 입김에 휘청이던 공중파 방송으로부터 조금씩 빼앗아 오고 있는 중이다. 이는 방송의 하향 평준화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손석희의 개인적 결단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얼마나 고뇌했고 어느 정도 고민했는지는 손석희의 '팬'들이 고민할 일일 뿐이다. 손석희를 비난하고 MBC를 욕하는 것은 쉽지만, 이는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중권은 손석희의 JTBC행을 두고 "결국 손석희가 바꾸느냐, 손석희가 바뀌느냐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JTBC라는 방송이 누구 소유인지는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손석희가 종편을 택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종편이 손석희를 삼킨 사건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나리오는 2013년에도 현재 진형형이다. 다만, 대부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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