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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 제대로 고쳐야 한다

[안종주의 안전사회] 통신대란, 사회적 비용은 천문학적

재난 대비에 소홀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24일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한국통신(KT) 통신구 화재로 인한 정보통신 대혼란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유비무환, 무비유환(有備無患, 無備有患)"을 떠올리게 한 사건이다.

통신이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는 등 사태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범위와 보상 수준을 놓고 우리 사회는 또 한 차례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상당해 보여 앞으로 상당기간 이번 사건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통신구 또는 전화국 화재는 정보화 사회에서 재난 수준의 엄청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과거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도 에너지·통신·교통·금융·의료·수도 등 국가기반체계의 마비를 사회재난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번 사건은 사회재난으로 콕 꼬집어 규정하기에는 마비 규모가 미흡한 측면이 있다.

일본, 34년 전 도쿄 통신대란 겪은 뒤 '외양간’ 고쳐

일본에서도 지난 84년11월10일 일본 전신전화공사(NTT, 우리나라의 한국통신에 해당) 도쿄도내(都內) 세타가야(世田谷) 전화국의 지하 케이블이 불타는 화재가 발생해 9만 회선의 전화가 불통되는 등 전화와 온라인망이 한 동안 마비되어 큰 혼란을 겪었다.

당시 <서울신문> 과학전문기자로 있었던 필자도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해설기사로 다루었던 기억이 있다. 광통신·정보화 사회를 맞아 통신이 마비되면 금융과 일상생활이 마비되는 재난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통신시설 화재는 정보화 사회의 그림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145m의 통신케이블이 불에 타 통신이 모두 마비되는 사태를 맞은 뒤 '외양간'을 고치기 위해 지하통신구 300㎞ 전 구간에 통신구 집중 감시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못하고 통신 시설 화재로 인한 재난 발생에 대비하지 않았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일본 도쿄 사건 후 딱 10년 뒤인 1994년 3월 10일 혜화전화국과 다른 전화국 또는 일반전화가입자를 잇는 통신케이블들이 통과하던 관문에 해당하는 서울 종로5가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해 서울시내와 수도권 일대에 무더기로 통신이 끊기는 재난 사태가 벌어졌다.

교훈 못 얻은 한국, 24년 전 종로에서 첫 통신구 화재 통신대란


당시 화재로 지하 통신구 내의 170m 가량의 광케이블과 동축케이블이 타면서 통신선로 32만1천회선이 손상돼 전화회선은 물론 방송회선까지 끊겼다. 전화는 화재 발생 나흘 뒤 완전 복구됐다.

이날 발생한 화재로 지하 통신구를 지나가던 광케이블과 동축 케이블 가닥들이 소실됐고 이로 인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통신두절사태를 겪었다. 서울에서 부산, 인천, 대전, 춘천, 문산 등으로 가는 시외전화가 불통됐다. 전용회선을 이용하는 기독교방송(CBS) 문화방송(MBC) 등 일부 라디오방송의 송출이 중단됐다. 이뿐만 아니라 팩시밀리망, 무선전화, 그리고 지금은 추억의 산물이 된 무선호출(삐삐)등 이동통신, 데이콤의 국제전화(002), 천리안 등 컴퓨터통신망, 신문사의 고속팩시밀리, 은행 기업 등의 온라인전용망이 일시에 마비됐다.

당시 언론은 한결같이 이 화재로 인한 통신대란 사건이 첨단정보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가 소홀하게 여겼던 안전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었다고 지적했다.

대구, 여의도 등에서 잇단 통신구 화재로 인한 대형 통신장애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해 11월 18일에 대구 지하통신구에서 불이 나 대구 시내 통신망이 마비되는 일이 또 벌어졌다. 2000년 2월 18일에는 여의도 전기·통신 공동구에서 불이 나 21일까지 사흘간 통신장애가 이어졌다. 그 뒤 대형 통신장애를 일으킨 전화국 또는 통신구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과 1994년 종로구 통신구 화재 사건을 일회성 사고로만 여겼다. 이 때문에 통신구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재 등에 대한 감시장치나 조기 화재 진압설비 설치 등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20~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의 모든 것이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상품 구매와 식당, 결제 등 거의 모든 일상을 통신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통신구 대형 화재 등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재산 피해와 사회 혼란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빚어진 통신, 금융 대혼란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앞으로 정확한 사건 원인을 이른 시일 안에 밝혀내는 것은 물론이고 통신구 화재 등을 예방하고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장치와 설비를 갖추어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조기에 불을 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은 피해보상을 둘러싼 갈등이다. KT 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약관에는 고객 책임 없이 연속 3시간 이상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시간당 월정액(기본료)과 부가사용료의 6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준으로 고객과 협의를 거쳐 손해배상을 하게 돼 있다고 한다. IPTV는 시간당 평균요금의 3배를 보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신 두절에 따른 영업 피해는 보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예방·감시 비용이 재난 후유증 비용보다 훨씬 값싸

지금은 영업과 결제 등 모든 것을 통신에 의존하고 있어 이번에 피해를 본 서울 일부 지역에서 자영업자의 경우 볼멘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요즘은 경기침체에 따른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져 케이티가 적극적으로 이들의 불만을 보듬어주지 않을 경우 정권 차원에서도 큰 부담을 안게 될 것이 분명하다.

국가기반체계 가운데 하나인 통신마비를 사회재난이라고 해놓고도 그에 걸맞은 비상사태 대비는 허술한 것이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기정통부는 관계부처 및 관련 통신사업자와 함께 중요 통신시설 전체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화재 방지 시설 확충 등 체계적인 재발 방지 조치를 12월 말까지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재난(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준재난에는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방침은 송아지(준재난)를 잃었지만 외양간을 고치겠다는 것인 셈이다.

외양간을 고치려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점은 예방이나 감시 장비 설치에 돈을 들이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건이나 사고가 나지 않으면 여기에 들인 돈이 모두 헛돈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은 훨씬 더 비용 효과적이란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해두어야 한다. 통신대란은 때론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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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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